홍 씨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의 자산관리사로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다. 이후 홍 씨는 억대 연봉을 받는 스타급 선수들의 자산을 관리하며 ‘프로야구 선수 재테크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한 케이블TV의 강사로 활동하며 일반인들에게도 얼굴을 알렸다. 회사 내에서도 우수 사원에게 수여하는 ‘신메리츠인’상을 2004년 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홍 씨가 사기 행각에 이러한 자신의 명성을 십분 활용했다”는 것이 이번 수사를 담당한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피해자들이 수억 원의 돈을 맡기면서 홍 씨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회사 측에서도 홍 씨가 2003년부터 돈을 빼돌렸지만 지난해 12월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에 따르면 홍 씨는 자신을 찾아온 고객들에게 “고수익을 보장하는 상품이 있다”며 투자를 권유한 뒤 그 돈을 자신의 개인 계좌로 빼돌려 선물·옵션 등에 투자했다가 대부분 날린 것으로 전해졌다. 홍 씨로 인해 1억 2000만 원의 손실을 입었다는 한 40대 여성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지인의 소개를 받고 홍 씨에게 돈을 맡겼다. 대구에서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고 야구선수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해 사기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홍 씨는 피해자들이 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경우 또 다른 투자자들에게 돈을 받아 돌려막는 이른바 ‘폰지 사기’ 수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얼마 전 미국에서 터진 ‘메이도프 사기사건’과 같은 수법. 또한 홍 씨는 피해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점장의 직인을 위조해 금액을 부풀린 허위의 잔고증명서도 발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들 중 일부는 홍 씨가 위조한 이 증명서를 보고 추가로 돈을 투자하기도 했다고 한다.
5년여 동안 계속되던 홍 씨의 범행은 지난해 12월 초 한 피해자가 메리츠증권 측에 ‘홍 씨에게 투자한 돈에 대한 이자가 지급되지 않았다’고 문의하면서 그 꼬리가 잡혔다. 메리츠증권은 자체 조사를 통해 홍 씨의 비위 사실을 적발, 파면시키고 12월 24일 사기와 횡령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또한 지점장에 대해서는 감독책임을 물어 견책 조치를 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홍 씨에게 투자했던 피해자들도 회사를 항의 방문하는 한편 잇달아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피해자들은 대책 마련을 위해 모임을 갖는 등 공동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회사와 피해자들의 고발장을 접수한 경찰은 잠적한 홍 씨 검거에 나서 추적 끝에 지난 1월 7일 홍 씨를 체포했다. 홍 씨는 경찰 진술에서 대부분의 혐의를 시인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들과 홍 씨 간에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 확인 중이다. 하지만 홍 씨가 고객의 돈을 자신의 계좌로 수령해 주식 투자를 한 것은 인정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홍 씨가 자신의 계좌뿐 아니라 차명계좌도 만들어 돈을 수시로 입금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경찰에 따르면 홍 씨에게 돈을 맡겼다가 손실을 입은 피해자 중에는 현직 프로야구팀 코치 A 씨의 가족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5억 원가량을 투자했다가 1억 원만 돌려받고 4억 원은 받지 못한 것이다. 홍 씨는 A 코치의 공식 팬클럽 회원으로 지난해 5월 A 코치의 유니폼 경매에서 1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 받아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프로팀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B 씨도 약 8900만 원을 떼였다고 한다. 경찰은 “현재까지 이들 이외에 피해를 본 야구 관계자들은 없다”고 밝히면서도 평소 홍 씨의 야구 인맥을 고려해 또 다른 피해 선수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경찰이 당초 홍 씨를 구속하면서 밝힌 총 피해액수는 30억 원가량, 피해자는 23명이었다. 구속 이후 피해자들의 고소가 잇따르면서 피해금액은 58억 원, 피해자는 50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증권가에서는 ‘100억 원을 훌쩍 넘을 것’이란 말도 나오고 있다. 경찰은 정확한 피해규모 파악을 위해 수사력을 모으고 있지만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는 터라 한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 규모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맞다. 홍 씨가 빼돌린 돈의 정확한 사용처도 조사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회사 측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직원 관리 및 감사를 소홀히 했다는 것. 앞서 언급한 여성 피해자는 “우리가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기는 계속됐을 것 아니냐. 거액을 관리하는 직원의 비리를 5년이 넘도록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피해자들은 회사 측에 대한 소송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사건이 터진 후 조사한 결과 메리츠증권이 내부 시스템 접근에 대한 감독과 고객 관리를 허술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메리츠증권 측은 “홍 씨가 개인 계좌로 거래를 해 알 수 없었다. 일단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 본 후에 책임질 일이 있으면 질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이승엽 선수의 아버지 이춘광 씨는 “나와 승엽이는 홍 씨에게 맡긴 돈이 없다. 우리는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이 씨에 따르면 지난 2003년 홍 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는 이승엽 선수의 마중을 나오면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 씨는 “승엽이는 홍 씨를 잘 모르고 나와 안면이 있는 정도다. 그가 내게 투자 제의를 한 적은 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면서 “(홍 씨가)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구속 소식을 듣고 놀랐다”고 덧붙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