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의 모친은 하루가 멀다하고 경찰서를 찾아와 “내 딸은 살해된 것이 분명하다”며 실종 전까지 동거했던 교회 장로 황정기 씨(가명·44)를 철저히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수사기록에는 처음 신고를 접수한 형사들이 이 사건을 범죄와 무관한 단순 가출 사건 정도로 여겼다고 나와 있다. 실종자가 사리분별이 가능한 성인 여성이라는 점, 직업이 유흥업소 종업원이라는 점도 그랬지만 가족들이 동거남으로 지목한 사람은 덕망 있는 유명교회 장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약 두 달 만에 드러난 사건의 결말은 충격적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얘기는 무려 50년 전 당시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유명교회 장로와 유흥업소 종업원 간의 불미스런 치정에 얽힌 사건이다. 당시의 수사기록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마지막으로 김 씨의 행적이 확인된 것은 1959년 11월 15일이었다. 그 무렵 내연남인 황 씨와 동거생활을 하던 김 씨는 그날 밤 마포구에 사는 친언니의 집에 불쑥 찾아왔다.
당시 김 씨는 언니와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 벌벌 떨면서 “황 장로 부인이 우리 관계를 알고 난리가 났다. 무서워서 피해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니네 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돌아갔다. “모든 일이 원만히 해결됐으니 돌아오라”는 황 씨의 연락을 받은 후였다.
김 씨는 언니에게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가족들에 따르면 평소 김 씨는 종종 집에 들러 안부를 전하곤 했는데 “황 장로 부인이 성질이 보통 대단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불륜관계가 들통날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김 씨가 언니네 집에서 나간 17일 이후부터 그 누구와도 일체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사건을 접수받은 수사팀은 “아무래도 동거남인 황 장로가 수상하다”는 가족들의 계속되는 민원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유명한 교회 장로가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황 장로는 한 집안의 성실한 가장으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성공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주변에서 평판이 상당히 좋았다.하지만 황 장로는 김 씨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김 씨가 실종되기 직전까지 그녀와 동거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올랐다. 수사팀은 조심스레 황 장로에 대한 내사를 시작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수사팀은 ‘전에 동생이 서대문구 의주로 길가에 있는 방 두 개짜리 2층 집에서 살고 있다. 꼭 지하실처럼 어두침침하고 무섭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김 씨 언니의 말을 근거로 탐문수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서대문구 의주로 2가에 있는 문제의 집을 찾아냈다.”수사팀이 그 집을 찾아갔을 때 황 장로는 없었다. 대신 황 장로의 처형과 조카 등이 최근에 이사 와서 살고 있었다. 이웃들은 “그 집에서 황 장로와 김 씨가 같이 살았는데 약 한 달 전부터는 남자만 가끔 보이고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상한 것은 황 장로의 일관성 없는 진술이었다. 연초에 김 씨의 가족들이 황 장로의 집을 찾아가 김 씨의 소재를 묻자 황 장로는 “영란이와는 교회에서 알게 됐는데 몇 달 전부터 교회도 나오지 않고 일체 소식도 없다”고 말했다.
김 씨의 실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황 장로는 말을 바꿨다. “사실은 지난해 12월 20일 영란이를 만났다. 부산에서 새 살림을 꾸리기로 약속하고 며칠 후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약속장소인 서울역에 나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 영란이가 자신의 짐을 몽땅 돌려보냈다”는 것이었다.황 장로에 대한 내사가 진행되는 도중 황 장로는 개인적인 이유로 1월 하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외부와 일절 연락을 끊은 채 돌연 잠적했다.
그런데 며칠 후인 1월 25일 황 장로는 김 씨의 어머니와 자신의 남동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당시 수사기록에 나와 있는 편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황 씨는 자신의 남동생에게 “영란이를 가족에게 데려다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니 나도 죽어야겠다. 영란이는 지난해 2월에 계모임 관계로 친구들과 시내의 바에 가서 처음 알게 됐다. 그 후 다방에서 다시 만났는데 영란이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런 유흥업소에서 빠져나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내가 매달 2만 환 씩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미장원을 차리고 싶다고 하더라. 또 10만 환만 있으면 의주로 전매청 공장에 취직할 수 있다고 하기에 10만 환을 줬는데 영란이는 취직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자주 만났다.
하루는 인천에 놀러 갔다가 배가 아프다고 하기에 근처의 여관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 영란이가 배를 자꾸 만져달라고 해서 만져주다가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갖게 됐다. 분명 영란이가 나를 유혹한 것 같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황 장로의 서신을 받은 김 씨의 어머니는 수사팀에게 이 편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황 장로의 남동생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1월 30일 남포동의 한 여관에 은신해 있던 황 장로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황 장로를 설득해 김 씨와의 관계 및 행방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날 황 장로는 몹시 불안한 듯 횡설수설하며 이상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황 장로는 김 씨의 어머니에게 ‘정말 죽을 죄를 졌다. 이제 나를 살리고 죽일 사람은 당신뿐이다. 살려 달라.
매달 10만 환씩 생활비를 대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수사기록에는 또 ‘원할 경우 영란이의 남동생을 미국으로 유학시켜주겠다’는 제의도 했다고 나와 있다. 황 장로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김 씨의 어머니로서는 황 장로를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김 씨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 장로로부터는 속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날 황 장로는 김 씨 어머니에게 김 씨와 지난해(1959년) 12월 24일 헤어졌다는 말을 했다.
요약하자면 “부산에서 살림을 차려 살기로 약속하고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나가지 않아 관계가 파탄났다”는 것이 황 장로의 주장이었다. 당시 김 씨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황 장로에게 전화를 걸어와 몹시 화를 냈으며 분개한 말투로 ‘이제 나는 영원히 사라지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김 씨는 자신의 모든 수하물을 황 장로의 집으로 보냈다는 것. 황 장로는 그 후 김 씨의 소재나 근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진술했다.
김 씨의 어머니는 황 장로가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죽을 죄를 지었다며 괴로워하고 사죄의 뜻으로 가족의 생계보장까지 제의하면서도 딸의 행방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황 장로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이에 김 씨의 어머니는 황 장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서울로 유인했다.
추후 딸과 관계된 일들을 황 장로와 연관짓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월 31일 상경한 황 장로는 다음날 오후 3시경 서대문구의 노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사팀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됐다. 물론 임의동행 형식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4시 5분경 황 장로는 갑자기 쓰러졌다. 조사가 미처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황 장로는 인근 적십자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으나 15분 후 사망하고 말았다.
수사팀 사이에서는 자살이냐 쇼크사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이틀 후 부검결과 황 씨의 사인은 ‘쇼크사’로 판명됐다.수사팀은 그동안 부산에 은신해있던 황 장로의 석연찮은 행적과 김 씨 어머니 등에게 보낸 서신과 대화내용 등을 분석한 결과 김 씨가 이미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결국 수사팀은 2월 2일 법원으로부터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황 장로와 김 씨가 동거했던 의주로의 주택을 수색했다. 그리고 수색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오전 11시 15분경 마루가 깔려있는 부엌 바닥을 파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1.5m가량을 파자 반듯하게 누운 한 구의 사체가 나온 것. 사체는 안면이 종이와 헝겊으로 싸여 있었고 검정색 양복바지와 버선을 신고 있는 상태였다. 예상대로 사체는 실종된 김 씨였다. 김 씨의 사체는즉시 중앙화학연구소로 옮겨졌으며 부검결과 교살로 드러났다.
그리고 살해 시점은 김 씨의 행방이 묘연했던 지난해 11월 17일경으로 추정됐다.조사결과 드러난 특이한 사실은 사체가 발굴된 집 구조가 변경됐다는 점이었다. 원래 이 집에는 황 장로의 남동생이 살았는데 당시는 부엌 위에 마루가 없었다.
그러나 황 장로가 살면서 부엌 위에 마루를 깔았고 자물쇠까지 채워 놓았던 것이다. 수사팀은 황 장로가 범행 후 사체를 매장한 뒤 새로 마루를 깐 것으로 추측했다. 조사결과 당시 큰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던 황 장로는 재산이 1억 환 정도 되는 부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학 졸업반인 장남 등 세 자녀를 두고 있던 황 장로는 주변에서 상당히 평판이 좋아 이 사건은 더욱 엽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사진행 당시 황 장로가 다니던 교회 신도가 찾아와 “장로님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진정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수사팀은 그동안 진행한 수사자료 및 주변 정황 등을 종합, 황 장로가 불륜관계에 있던 김 씨를 살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던가. 사건의 핵심인물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이 사건은 많은 의문을 남겼다.
특히 유력한 용의자였던 황 장로가 돌연사함으로써 정확한 범행동기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황 장로의 부인이 두 사람의 불륜사실을 알게 된 후 황 장로는 양심의 가책은 물론 주변으로부터 받게 될 비난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왔던 정황이 포착됐다.
특히 신망받는 유명 교회의 장로가 ‘첩살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황 장로에게 큰 짐으로 여겨졌을 터. 이에 황 장로는 김 씨에게 관계청산을 요구했지만 김 씨가 거절하며 모든 것을 폭로할 뜻을 내비치자 범행을 했다는 것이 수사팀의 시나리오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