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한강에 별게 다 떠내려 오는군!”
안 그래도 수년간 한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건져 올린 A 씨. 그는 혼잣말로 투덜대며 이번에도 낚싯대를 던져 여행 가방을 끌어올렸다. 가방은 부피만큼이나 상당히 묵직했다.
아무 생각없이 가방을 열어보던 A 씨는 잠시 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은 시퍼렇게 변해버린 사람의 사체였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당시 온갖 추측과 루머들을 낳으며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던 ‘공인회계사 살해사건’이다. 이 사건은 1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제로 남아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여행가방 안에는 검정색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웅크린 채 죽어있었다. 부패는 거의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얼굴에 씌워진 비닐봉지를 벗겨보니 남자의 안면부 곳곳에 외상이 있었다. 남자의 오른쪽 눈 부위에는 멍이 심하게 들어 있었으며 뒤통수에서도 찢어진 상처가 발견됐다. 사체상태만 봐도 타살임이 확실했다.”
사체의 주인은 공인회계사 양석수 씨(가명·50)였다. 양 씨는 공중파 TV와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는 등 업계에선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조사결과 그는 이미 수일 전 가출신고가 돼 있던 상태였다. 가출신고를 한 사람은 양 씨의 부인 박미숙 씨(가명·43)였다. 박 씨에 따르면 남편 양 씨가 사라진 것은 지난달 28일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박 씨는 ‘남편은 지난달 28일 오후 2시경 잠깐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직접 차를 몰고 나갔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양 씨는 그날 밤 이후 귀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박 씨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양 씨가 이미 바깥에서 따로 살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 씨가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은 다음날 오후. 당시 양 씨가 고정 출연 중이던 한 방송사로부터 ‘양 씨가 오후 예정된 프로그램 녹화에 나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난 후였다.”
방송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박 씨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고 판단, 경찰에 가출신고를 했다. 그도 그럴것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을 기했던 양 씨의 성격상 ‘잠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모습을 감춘 지 6일 만에 양 씨가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부검결과 양 씨의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양 씨의 머리에 난 상처는 몽둥이나 벽돌 등 둔탁한 둔기로 맞은 것이 분명했다. 사망 전 납치와 폭행 등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체의 부패 진행상태 및 위 안의 음식물 소화정도로 보아 양 씨는 사망한 지 이미 5~6일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수사팀은 양 씨에게서 폭행 상처 외에는 이렇다 할 반항흔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양 씨가 얼굴이 비교적 잘 알려진 공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수사팀은 범행 목격자를 찾는 데 주력했다. 사체를 가방에 담아 한강에 유기한 대담한 범행수법으로 볼 때 분명 목격자가 있을 법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실종 당일 이후 양 씨의 행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는 사실이었다. 사건해결을 자신했던 수사팀 내부에서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방법은 역시 탐문수사였다. 수사팀은 우선 양 씨의 가족과 주변인물들을 통해 양 씨의 기본 정보들은 물론 실종 전 근황에 대해 하나하나 추적해나가기 시작했다.
양 씨의 행적을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양 씨의 운전기사인 장태성 씨(가명·34)였다. 당연히 그는 1차 용의선상에 올랐다. 그런데 장 씨는 11월 초 결혼해 강원도로 신혼여행 중이었다. 양 씨 피살소식을 들은 장 씨는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직접 경찰에 출두의사를 밝힌 장 씨는 5일 오후 상경, 자발적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10년 가까이 양 씨의 승용차를 운전해왔던 장 씨는 양 씨의 스케줄 등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사팀은 그를 조사하면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장 씨는 “결혼을 앞두고 양 씨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잠시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이번 사건과 무관하고 아는 바도 없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조사결과 장 씨는 모든 알리바이가 확실했으며 특별한 혐의점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양 씨를 조사하고도 아무 소득이 없었던 수사팀은 이후 수사방향을 크게 세 가지로 잡았다. 첫 번째는 업무 때문에 피살됐을 가능성이었다.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양 씨가 회계·세무 관련 업무를 담당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조사결과 양 씨와 계약을 맺은 기업들은 당시 대기업을 포함해 100여 곳에 달했다. 수사팀은 양 씨가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객의 비밀에 대해 상세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업무상 원한 등으로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양 씨가 상당한 규모의 금전거래를 해왔던 점에서 채권·채무관계를 둘러싼 청부살인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에 수사팀은 양 씨가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기업체 회계자료와 각종 서류 등을 압수해 분석하는 등 다각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두 번째는 원한살인일 가능성이었다. 양 씨는 여러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고향과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마당발 인맥 등을 기반으로 국회의원 선거에도 3번이나 출마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폭넓은 인맥과는 달리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양 씨가 평소 일부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진술을 확보한 수사팀은 원한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도 열어놓고 수사를 진행했다.
마지막은 치정살인이었다. 양 씨의 주변 인물들과 심층적인 접촉을 시도한 수사팀이 눈여겨 본 것은 양 씨의 복잡한 여자관계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자세히 언급할 순 없지만 양 씨의 사생활은 상당히 복잡했다. 양 씨는 부인 박 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고 있었으나 10여 년 전부터 또 다른 내연녀인 김양순 씨(가명·40)와 동거하며 4남매를 두고 있었다. 당연히 양 씨와 본부인의 사이는 좋을 리 만무했다. 조사결과 부인 박 씨는 국세청에 남편의 탈세사실까지 고발할 정도로 부부관계가 나빴다. 특히 이들 부부는 최근에 더욱 사이가 나빠져 이혼 얘기까지 거론되기도 했으며 불화 끝에 양 씨는 노모와 함께 내연녀인 김 씨의 집에서 생활해왔으며 박 씨한테는 간혹 들르곤 했다. 하지만 수사팀이 더욱 주목한 점은 양 씨가 김 씨 외 다른 여성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본 부인을 포함한 양 씨의 여인들이 일제히 용의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주변인들의 진술과 제보만으로 상대를 불러 조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내연관계라는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이후 수사팀은 범행이 벌어진 1차 장소를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수사팀은 양 씨의 양복에 흙이 묻어 있었고 양 씨가 들어있던 가방이 심하게 땅에 끌린 흔적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추적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수사착수 25일 만인 11월 29일 오후, 수사팀 내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간 행방이 묘연하던 양 씨의 승용차가 강남의 한 종합병원 주차장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발견 당시 양 씨의 승용차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문이 잠겨 있었는데 차안 바닥에는 모래와 흙이 묻어 있었다. 주차장 경비원은 “일주일 전부터 문제의 차량이 한 곳에 계속 주차돼있어 신고했다”고 진술했다.
수사팀은 차량에서 채취한 지문 두 개와 머리카락 다섯 올에 대한 정밀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하고 차량 내부에 묻어있는 흙과 모래의 출처에 대해서 조사를 했다. 수사는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감정 결과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어느덧 사건은 해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수사팀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동안 양 씨의 여자관계에 주목, 집중수사를 해온 수사팀은 몇 가지 중요한 정황을 포착한다.
우선 이듬해 4월 수사팀의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간통사건으로 구속된 구영순 씨(가명·40)와 그녀의 내연남(33)이었다. 구 씨는 구속 당시 소지품에서 살해된 양 씨가 생전에 써준 한 건의 영수증이 발견돼 조사를 받았다.
조사결과 구 씨는 1989년 초 세금상담 관계로 양 씨와 알게 된 후 가깝게 지내온 것으로 드러났다. 구 씨는 양도소득세 업무 대행 수수료 명목으로 500만 원을 양 씨에게 건넸으나 양 씨가 일을 해결하지 못하자 돈을 돌려줄 것을 독촉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팀은 구 씨가 여러 번 이혼한 전력이 있고 전 남편들로부터 거액의 위자료를 받아내는 등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는 점, 양 씨의 사체가 발견된 직후 구 씨 내연남의 눈 밑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 그 무렵 그가 양 씨의 차와 같은 종류의 차량을 타고 다니는 것을 봤다는 주변인의 진술 등을 토대로 양 씨 사건과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했다. 하지만 양 씨 사건과 관련된 특이점은 나오지 않았다.
그해 6월 수사팀은 또 다른 용의자에 주목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1991년 6월경 서초경찰서는 A 공업사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60대 남성을 A 공업사 직원들이 집단폭행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경찰은 A 공업 대표를 맡고 있던 이혜옥 씨(가명·40)가 피살된 양 씨와 생전에 내연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사결과 이 씨는 양 씨와 임대관리 업무로 인해 안면을 튼 후 가까워졌는데 평소 사업문제로 종종 갈등을 빚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 씨는 지난해 10월 양 씨가 업무처리 비용을 요구하자 ‘내연관계를 폭로하겠다’며 7000만 원을 요구해 심하게 다퉜던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팀은 이 씨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거나 사업에 방해가 되는 인물에 대해 폭력배를 동원해 청부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양 씨 사건의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올리고 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완강히 혐의를 부인했으며 수사팀 역시 그녀에게서 특이한 사항을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수사 규모는 실로 방대했다. 말 그대로 수사팀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사체가 들어 있던 여행용 가방 구입자를 찾기 위해 가방 제조업체와 판매상을 조사한 것은 기본이었고 사체가 싸여있던 수건의 출처와 관련자들 행적까지도 수사했다.
양 씨의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도 전례없이 치밀하게 이뤄졌다. 양 씨의 사업관계자는 물론 그와 가까이 지내던 여성과 사무실 전·현직 직원, 고객들에 대한 탐문 조사가 진행되었는가 하면 양 씨가 활동하던 클럽과 모임, 방송관계자와 단골술집 사장과 종업원들까지 모두 수사대상에 올랐다. 그럼에도 진척이 보이지 않자 당시 수사팀은 단순 강도사건일 수도 있다고 보고 수사를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 수사팀원들의 진을 쏙 빼놓았던 이 사건은 2009년 12월 현재에도 미제사건 파일에 올라있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회고
실마리 없어 '귀신이 곡할 노릇'
김원배 수사연구관은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유독 많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수사팀이 자존심을 걸고 범인과 한판 승부를 벌였지만 미제사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파일에 이름을 올리게 됐기 때문이다.
“경찰에게 있어서 미제사건만큼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20년이 다 돼가지만 당시 수사팀의 뇌리속에는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이 남아있을 겁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