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드 공개 직후에는 갑론을박도 벌어졌다. 장성우와 박세웅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강민호의 백업 포수였던 장성우는 최근 수년간 여러 팀에서 트레이드를 타진했지만 롯데가 ‘트레이드 절대 불가’ 자원으로 분류했던 선수. 이종운 현 감독의 경북고 시절 제자인 데다, 포수 수비능력과 타격 잠재력을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박세웅은 1군에서 첫 시즌을 치르는 kt가 팀의 미래를 짊어질 토종 에이스로 육성하던 투수였다. 정규시즌 개막 미디어데이에 kt의 대표선수로 내보냈고, 시범경기 때부터 남다른 기대를 받았다. 10개 구단 최고의 백업포수를 내준 롯데와 현재에 올인한 kt. 양 팀 모두 출혈이 컸던 이 트레이드의 손익계산서가 야구계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물론이다.
이뿐만 아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6일 오전 한화와 KIA도 4 대 3 트레이드를 공식화했다. 한화는 계약금 7억 원을 들여 영입했던 투수 유창식(23)을 비롯해 투수 김광수(34), 외야수 오준혁(23)과 노수광(25)을 KIA에 보냈고, KIA는 투수 임준섭(26)과 박성호(29), 외야수 이종환(29)을 내줬다. 올 시즌 벌써 네 번째 트레이드. 또 다시 흥미진진한 거래가 성사됐다.
# 34년간 281건, 612명 이동
트레이드는 말 그대로 구단 간의 ‘선수 교환’이다. 목적은 당연히 전력 강화. 각 구단은 프로야구 선수 시장에서 생산자이자 구매자 역할을 하고,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가치를 얻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흥정을 한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지금까지 총 281건의 트레이드가 성사됐다. 그 사이 612명의 선수가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연 평균 8.3건의 트레이드를 통해 18명의 선수가 팀을 옮겼다는 의미다. 올 시즌이 개막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올해 안에 더 많은 트레이드가 성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트레이드는 출범 첫 시즌이 끝난 뒤인 1982년 12월 7일 처음 이뤄졌다. 삼성 서정환이 해태로 현금 트레이드된 것. 당시 삼성 내야에는 배대웅, 천보성, 오대석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서정환이 뛸 자리가 없었다. 서정환은 구단에 줄기차게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선수가 부족했던 해태는 현금 1500만 원을 삼성에 주고 서정환을 데려왔다. 서정환은 이듬해인 1983년부터 해태의 주전 유격수로 뛰면서 우승 신화에 한몫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김시진 선수. 1988년 시즌이 끝난 뒤 두 차례에 걸쳐 롯데가 최동원, 김용철을 삼성으로 보내고 삼성이 김시진, 장효조를 롯데에 주는 등 11명을 맞교환했다. 사진제공=롯데 자이언츠
야구팬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매머드급 트레이드는 1988년 ‘사건’이 시초로 꼽힌다. 시즌이 끝난 11월 22일 롯데가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을 삼성으로 보내고 삼성이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을 롯데에 내주는 3 대 4 트레이드가 발표됐다. 최동원과 김시진. 롯데와 삼성을 상징해온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교환에 야구계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12월 20일에 양 팀이 또 한 번 블록버스터급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롯데가 내야수 김용철과 투수 이문한, 삼성이 외야수 장효조와 투수 장태수를 맞바꿨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양 팀 선수 11명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부산에서 대구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선수 노동조합 결성과 연봉 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큰 마찰을 빚은 인물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팬들의 입김이 세지 않고 구단의 뜻이 선수단 운영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던 시기다. 구단은 본보기 삼아 칼을 빼들었고, 말을 듣지 않는 베테랑 선수들을 ‘정리’했다.
최동원.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1998시즌이 끝난 뒤 이뤄진 삼성 양준혁과 해태 임창용의 트레이드도 큰 충격을 안겼다. 지금이야 우승을 밥 먹듯이 하는 삼성이지만, 당시에는 번번이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 한 번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결국 마운드 강화를 위해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을 내주고 해태의 사이드암 임창용을 영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최근의 롯데와 kt의 4 대 5 트레이드에 버금가는 대규모 선수 교환도 두 차례 있었다. 1986년 말 롯데가 임호균, 배경환, 양상문, 이진우, 김진근을 내주고 청보에서 정구선, 정성만, 우경하를 받는 5 대 3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2001년 말에는 삼성이 창단 2년째를 맞은 SK에 김태한, 김상진, 이용훈, 김동수, 정경배, 김기태, 여섯 명의 베테랑 선수를 보내고 대신 오상민과 외국인선수 틸슨 브리또, 현금 9억 원을 받는 6 대 2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 트레이드에 돈이 얹히는 이유
요즘은 현금을 선수와 맞바꾸는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한때 자금난에 시달렸던 일부 구단은 팀의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받고 선수를 다른 팀으로 보내는 트레이드를 감수해야 했다. 1990년대 말 모기업의 재정난과 함께 문을 닫았던 쌍방울이 대표적인 팀이다. 쌍방울은 1997년 말 애지중지 키운 포수 박경완을 현대에 넘겨주면서 이근엽과 김형남, 그리고 현금 9억 원을 받았다.
또 1998시즌 도중에는 투수 조규제를 현대로 보내면서 박정현과 가내영, 현금 6억 원을 함께 챙겼다. 현대가 쌍방울의 특급 선수들을 돈으로 ‘수집’하자, 당시 재계 라이벌이었던 삼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98년 12월 25일에 쌍방울 김기태와 김현욱을 데려 오면서 선수 양영모와 이계성, 그리고 현금 20억 원을 보냈다. 양 구단이 서로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대기업의 지원 없이 2008년 독립형 야구기업으로 출발한 히어로즈는 창단 초기에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구단의 핵심 전력들을 다른 구단에 보내야 했다. 특히 2009년 12월에 이택근을 LG로, 장원삼을 삼성으로, 이현승을 두산으로 각각 보내 팬들의 공분을 샀다. 히어로즈는 “순수하게 팀의 미래를 고려한 결정”이라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트레이드 카드만 놓고 봐도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택근은 LG 박영복과 강병우, 장원삼은 삼성 박성훈과 김상수(투수), 이현승은 두산 금민철과 각각 트레이드됐기 때문이다.
히어로즈는 이듬해에도 마일영을 한화로, 그리고 황재균과 고원준을 롯데로 각각 보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현금이 포함된 트레이드였을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쯤 되자 히어로즈에서 좋은 선수를 데려오지 못한 팀들이 오히려 못내 아쉬워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이때 히어로즈가 끝까지 다른 팀에 보내지 않고 지켜낸 선수가 바로 지금은 메이저리거가 된 유격수 강정호였다. 이후 팀 상황이 안정된 히어로즈는 2년 뒤 FA 자격을 얻은 이택근을 다시 팀으로 데려왔다. 다른 팀으로 간 장원삼과 이현승, 황재균 등은 각 소속팀에서 핵심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 트레이드 같은 트레이드 아닌…
삼성 장원삼은 사상 최초로 트레이드가 무산돼 친정팀으로 돌아오는 해프닝도 겪었다. 당시 장원삼의 소속팀이던 히어로즈는 삼성 박성훈과 장원삼의 1 대 1 트레이드를 발표했고, 장원삼은 대구로 내려가 등번호 13번이 찍힌 유니폼까지 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구단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KBO가 일주일 뒤 총재 직권으로 트레이드 승인을 거부했다. 장원삼은 일주일 만에 다시 히어로즈로 복귀했고, 1년 뒤에야 결국 삼성 유니폼을 입을 수 있게 됐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넥센발 트레이드 ‘신바람’ 들어온 선수도 떠난 선수도 ‘펄펄’ 트레이드는 분명히 리그 전체에 선순환 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정작 패를 던질 판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많은 구단이 트레이드에 있어서만큼은 무척 폐쇄적이고, 과점적이다. 손해를 감수해야 과감한 투자가 가능한데, 그 위험을 굳이 무릅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장 순위 경쟁을 해야 하는 팀에 유망주 한 명을 무심코 내줬다가 이적 후 부메랑으로 돌아오기라도 하면, 코칭스태프부터 현장 실무자까지 모두 욕을 먹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구단이 핵심 유망주 서너 명을 ‘트레이드 절대 불가’ 자원으로 분류하는 일이 많다. 왼쪽부터 박병호, 김민성.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한 구단 관계자는 “아무리 공평하게 저울질을 해 카드를 맞춰도 급해서 먼저 손을 내민 쪽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현재 우리 팀에서는 경기에 많이 못 나가더라도, 다른 팀에 가서 잘 할 가능성이 높은 선수를 달라고 하면 망설이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팀이 마지막 순간까지 장고를 거듭하고, 많은 트레이드가 성사 직전에 무산된다. 무엇보다 트레이드는 보안이 생명이다. 밖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아무리 ‘윈윈’ 가능성이 높은 트레이드라도 백지화될 때가 많다. 넥센의 과감한 트레이드는 이런 이유로 더 주목받았다.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감행했던 초기의 트레이드는 모든 야구 관계들과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2011년 이후의 트레이드는 그야말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LG와의 2 대 2 트레이드를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4번타자 박병호를 얻은 게 가장 큰 수확이다. 황재균을 롯데로 보내면서 데려왔던 김민성도 국가대표급 내야수로 성장했다. 이성열, 서동욱, 윤석민 등도 트레이드로 영입해 요긴하게 썼다. 반대로 넥센에서 다른 팀으로 보낸 최경철(LG)이나 지석훈(NC)은 새 팀에서 설 자리를 찾았다. 그야말로 트레이드의 원래 취지를 제대로 살린 결과다. 박병호 트레이드 때 LG로 보내야 했던 송신영을 NC에서 되찾아 올 때는 롯데에서 트레이드카드로 받았던 박정준을 다시 활용하는 묘수를 쓰기도 했다. 거대한 모기업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구단주인 이장석 대표이사가 직접 전략을 짜기에 가능한 행보다. 그가 메이저리그의 저 유명한 빌리 빈 단장에 비유돼 ‘빌리 장석’이라 불리는 이유다. [은] |
삼성-한화 ‘정현석 트레이드’ 미담 ‘건강이 우선이야’ 친정팀 돌려보냈다 1992년 LG와 김재박의 ‘조건 없는 이별’처럼, 때로는 트레이드가 갈등을 해결하는 최선의 해법이 된다. 한화 외야수 정현석(31)의 현금 트레이드가 바로 그랬다. 지난해 12월 15일, 삼성은 FA 자격을 얻어 한화로 이적한 투수 배영수의 FA 보상선수로 외야수 정현석을 지명했다. 그러나 곧 정현석이 위암 수술을 받았고, 내년 시즌에 뛸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결국 양 구단이 원만하게 선택한 해결 방법은 현금 트레이드였다. KBO는 야구규약 165조 ‘구단의 보상’ 조항에 따라 삼성의 보상선수 지명 절차를 정상 승인했다. 이후 야구규약 84조 ‘선수 계약의 양도’에 의거해 삼성 선수 정현석과 한화의 현금 5억 5000만 원을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통과시켰다. 삼성은 정현석을 한화로 돌려보내면서 보상선수 대신 지난해 배영수 연봉의 300%에 해당하는 보상금(16억 5000만 원)을 받는 모양새로 정리가 됐다. 한화에서 삼성으로, 그리고 다시 한화로. 정현석의 ‘야구 호적’은 현금 트레이드라는 묘수 덕분에 이틀 만에 원위치로 돌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친정팀에 남은 정현석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복귀를 위해 재활에 매진하고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