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연장 11회말 추신수가 끝내기 안타를 치고 제프 배니스터 감독의 축하를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 사건의 재구성
지난 11일 텍사스 레인저스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의 2차전 당시의 상황이다. 8회 1사 1루에서 오클랜드 벤 조브리스트의 우전안타 때 1루주자 조시 레딕이 2루를 거쳐 3루로 향했다. 우익수 추신수는 타구를 잡아 3루로 송구했다. 3루수 조이 갈로는 이미 3루 베이스를 향한 레딕 대신 2루를 공략하기로 하고 송구했지만 그 공은 빗나갔고, 결국 레딕은 득점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4-3으로 텍사스가 앞서있었다. 그러나 후속타가 터지면서 오클랜드의 조브리스트까지 홈을 밟아 오클랜드는 4-4 동점에 이르렀다. 텍사스는 9회 말 끝내기 안타를 맞고 4-5 역전패를 당한다.
경기 후 오클랜드 더그아웃은 난리가 났다. 끝내기 안타를 터트린 선수에게 음료수를 들이 부으며 신나는 세리머니를 즐겼다. 상대편 더그아웃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특히 배니스터 감독은 곧장 클럽하우스로 향하지 않고, 한 선수를 노려본 채 서 있었다. 그의 ‘레이저’가 향한 곳은 추신수였다. 장비를 챙겨 들어가려던 추신수를 배니스터 감독이 불러 세웠다. 당시 주변에는 기자들, 선수들도 많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니스터 감독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추신수에게 “2루가 아닌 3루로 송구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역전패를 당한 바람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추신수도 예상치 못한 감독의 질문을 받고 당황하기보다는 화가 치밀었다. 마치 팀이 패한 이유를 자신에게 몰아붙이는 감독의 태도가 황당했다고 한다.
이후 배니스터 감독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추신수의 잘못된 송구를 지적했고, 그 얘기를 들은 기자들은 추신수를 찾아가 당시 상황에 대해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추신수는 “내가 글러브 줄 테니 직접 해보시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추신수의 이 말은 국내 언론에 ‘추신수가 감독에게 글러브 줄 테니 직접 해보라’고 말했다는 내용으로 기사화됐다. 그러나 추신수는 기자들의 질문에 화가 난 나머지 기자들에게 말한 얘기였다고 한다.
이후 미국 현지 기자들과 현장을 직접 목격한 국내 기자들을 통해 추신수와 배니스터 감독의 갈등이 표면화됐고, 이후 오랫동안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에 대해 추신수의 얘기를 직접 들어봤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 10년이 넘는 베테랑 선수에게 감독이 경기 직후 질책성 얘기를 전한 것은 상당이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당시 송구는 3루가 아닌 중간 수비 선수에게 던지려 했지만, 공이 미끄러워지면서 제구가 안 된 채 공이 나가는 바람에 3루수 조이 갈로에게 향한 것이다. 결국 그로 인해 득점이 나고 점수를 내주게 됐지만, 패인을 내 송구로 몰아가는 감독의 태도가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따지면 투수가 공을 더 잘 던져서 안타를 맞지 말아야 한다. 조이 갈로도 2루에 정확히 송구했어야 한다. 경기를 하다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실수이고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인데도, 감독이 감정적으로 나를 대했다는 점에서 화가 난 것이다.”
한바탕 난리가 난 11일을 보내고 난 12일, 배니스터 감독은 치료실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는 추신수를 찾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감독은 “어제는 서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며 악수를 청했지만, 이미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추신수는 악수를 받으면서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힘을 내요~ 수퍼 choo” 추신수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팬들.
# 갈등설의 배경
피츠버그에서만 선수 생활을 비롯해 코치까지 29년을 보낸 제프 배니스터 감독의 야구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고교 시절 ‘골암(뼈에 생기는 암)’에 걸려 7번에 걸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고, 대학 때는 경기 중 목이 뒤로 젖히는 바람에 온몸이 마비되는 충격적인 증상을 겪은 적도 있었다. 메이저리그는 딱 한 번 경험하는 등 선수로선 불운했지만, 1993년 만 28세에 은퇴 후 피츠버그의 마이너리그 코디네이터 및 감독으로 일했고, 2010년 빅리그 벤치 코치로 발탁돼 허들 감독과 함께 2014 포스트시즌 진출에 공을 세운 숨은 조력자로 알려졌다.
텍사스의 존 다니엘스 단장이 숱한 감독 후보자들을 물리치고 배니스터 감독에게 팀을 맡긴 배경에는 그의 녹록지 않은 야구인생과 허들 감독 밑에서 지도자 경험을 했다는 데 대해 큰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감독을 맡은 배니스터의 올 시즌 행보는 일단 성공적이다. 지난 시즌 주전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최악의 한 해를 보낸 텍사스는 팀 에이스인 다르빗슈 유, 데릭 홀랜드는 물론 팀의 정신적인 지주, 벨트레 등이 수술과 부상으로 빠져 있는 상황에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2위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배니스터 감독과 추신수의 갈등 이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추신수는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지만, 스프링캠프 초반부터 계속된 라인업 변경 또는 잦은 휴식 등이 작은 앙금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게 현지 기자들의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텍사스 전담 기자는 “지난 시즌 수술과 재활을 경험한 추신수에게 감독은 캠프 초반 많은 휴식을 제공했다. 선수 입장에선 경기에 자주 나가 감각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감독은 계속 쉴 것을 주문했다”면서 “(추신수가) 처음에는 이해를 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계속되는 휴식과 라인업 변경 등이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하나는 시즌 중의 일이다. 배니스터 감독은 4, 5월 8, 9회에 추신수를 빼고 유망주 제이크 스몰린스키를 수비로 내세웠다. 유독 추신수만 수비 교체가 잦았다. 추신수는 기자에게 그 일과 관련해 감독에게 면담 요청을 하고 개별 미팅을 한 적이 있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감독의 수비 교체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듣고 싶어 미팅을 요청했고,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감독도 부상 경험이 많은 분이라 나의 부상 경력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경기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수비 교체를 지시했다고 설명하셨다. 감독과 선수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대화였고, 잘 마무리했다.”
그 후로 배니스터 감독은 경기 후반 추신수의 수비 교체를 자제하는 편이다.
# 공개적 화해
지난 16일, 미국 텍사스 주 알링턴의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선 LA 다저스와의 홈경기를 앞두고 ‘한국의 날(Korea Heritage Night)’ 행사가 열렸다. 경기에 앞서 추신수와 그의 아내 하원미 씨가 달라스문화원에 10만 달러를 기부하는 행사를 가졌는데, 텍사스 더그아웃 옆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하원미 씨에게 배니스터 감독이 다가섰다. 감독이 무슨 얘기를 하자, 하 씨는 크게 미소를 지었고, 다가온 추신수에게 그 얘기를 전하자, 세 사람은 폭소를 터트렸다.
추신수는 지난 16일 ‘한국인의 날’ 행사를 맞아 더그아웃을 찾은 아내 하원미 씨, 배니스터 감독과 파안대소하며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그 장면은 기자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갈등을 빚었던 감독과 선수가 취재진들이 보는 앞에서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며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 없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행사를 마친 하원미 씨에게 찾아가 당시 감독이 무슨 얘길 했는지 물었다. 하 씨는 “감독님이 내게 배팅하러 왔느냐며 웃으시기에, 무빈 아빠(추신수)에게 ‘나 야구할까?’라고 물었더니 무빈 아빠가 ‘넌 실력이 없어서 안 된다’고 말해 서로 웃었다”는 뒷얘기를 전했다.
이 장면을 놓고 현장에서 취재하던 한국의 취재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배니스터 감독이 한국 기자들 앞에서 일부러 그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부터 ‘추신수도 더 이상 소문이 불거지는 걸 원치 않아 감독의 쇼에 응한 것’이라는 내용 등이 제기됐지만, 분명한 것은 한때 첨예하게 대립했던 한국 선수 출신의 추신수와 전형적인 미국 출신의 지도자 배니스터 감독의 갈등은 화해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달라스=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