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약속된 김현숙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기자는 조금 들떴다. ‘출산드라’로 떠서 ‘막돼먹은 영애씨’로 확실히 자리를 굳힌 김현숙을 만난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자 앞에는 ‘출산드라’도 ‘영애씨’도 아닌 인간 김현숙이 존재했다.
김현숙을 방송계에 데뷔시킨 이는 다름 아닌 개그맨 박준형이다. 그것도 6년여에 걸친 오고초려(五顧草廬) 끝에 겨우(?) 데뷔시킬 수 있었다. 부산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캠퍼스 최강커플>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현숙을 당시 무명의 리포터이던 박준형이 눈여겨본 것. 그 자리에서 박준형은 김현숙에게 함께 개그를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김현숙이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6년 뒤 다시 박준형을 만났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부산에서 연극 무대에 서며 배우의 꿈을 키웠는데 아무래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어요.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다 <쇼 뮤지컬 펑키펑키>에 출연하게 됐는데 거기서 김지혜를 만났죠. 지혜가 준형이 오빠한테 ‘골 때리는 언니’가 있다며 내 얘길 했는데 오빠가 날 기억해내고 찾아와 다시 같이 개그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세 번이나 거절하다 결국 <개그콘서트(개콘)>로 데뷔하게 됐죠.”
그가 개그우먼 데뷔 기회를 6년 동안 네 번이나 거절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처음 박준형을 만났을 당시에는 스스로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6년 뒤 다시 만났지만 개그보다는 연기에 대한 꿈이 더 컸던 터라 쉽게 응할 수가 없었다고.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미아동에 있는 옥탑방에서 짐을 풀면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어요. 부산 지역에선 어느 정도 인정받는 연극 배우였지만 서울에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방송까지 데뷔하게 됐는데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분당 지역에서의 시청률이 높게 나왔다는 얘길 듣고 내가 왜 ‘분당’에서 인기가 많은지 궁금했을 정도니까요. 더 보여줄 게 없으면 안 된다, 방송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곳이니 밀려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지냈던 것 같아요.”
‘출산드라’는 그의 저력을 잘 드러내는 코너였다. 신인 여자 개그우먼이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으며 웃음을 선사해야 하는 다소 어려운 캐릭터였는데 이미 김현숙은 연극 무대를 통해 기본기를 다진 ‘준비된 신인’이었다. 김현숙은 ‘출산드라’ 코너를 짜는 과정에서부터 연극적인 요소를 강조했고 그 덕분에 흔들림 없는 개그 연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김현숙은 ‘출산드라’가 아니다. 현재 그의 애칭은 ‘영애씨’다. 벌써 다섯 번째 시즌에 돌입한 인기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의 주인공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
“출산드라 당시에는 그냥 하나의 이슈였던데 반해 영애씨에 대한 팬들의 반응 자체가 달라요. 제 미니홈피에 찾아와 ‘정말 내 얘기 같아요’라는 글을 남겨주는 분들이 많아요. 고민을 상담하는 장문의 글을 볼 땐 마치 카운슬러가 된 것 같아요. 지치고 힘들고 고민 있는 여성들에게 옆집 언니같이 편하고 기대고 싶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사명감까지 생기거든요.”
얼마 전에는 우연히 청담동의 한 술집에서 <막돼먹은 영애씨> 열성팬을 만났다. 청담동엔 연예인 뺨치는 미인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여자 연예인을 봐도 새침한 표정으로 곁눈질 몇 번 하는 정도가 관심 표현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그 여성 팬 역시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주저 없이 다가와 <막돼먹은 영애씨> 열성팬이라며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동석한 남자 친구가 김현숙을 강하게 질투했을 정도라고.
“정말 <막돼먹은 영애씨> 골수팬들은 확실히 달라요. 그 분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오래 전부터 꿈꿔온 콘셉트의 드라마에 시즌 5까지 주인공으로 연이어 출연하게 된 게 개인적으로 가장 큰 행복입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골수팬들이 늘 큰 힘이 되어줬어요.”
▲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5. | ||
“배우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우울증을 겪죠. 문제는 어떻게 극복하느냐예요. <막돼먹은 영애씨>를 처음 시작할 땐 ‘영애’라는 캐릭터와 제 자신의 충돌이 잦았어요. 난 그 누구보다 내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적인데 영애는 늘 자기 콤플렉스로 힘들어하고 히스테리도 많잖아요. 난 한 번도 제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배우가 캐릭터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계속 힘들어할 순 없어요. 그런 고민엔 답이 없잖아요. 드라마 초반엔 시즌과 시즌 사이 촬영 없는 몇 달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다 우울증을 겪기도 하고.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영애하고 혼연일체가 된 것 같아요.”
요즘 고민은 지나친 나르시시즘(자기애)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부분이란다. 또 <막돼먹은 영애씨>가 시즌 5까지 오는 동안 영애라는 캐릭터하곤 충분히 가까워졌지만 그만큼 나태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영애’라는 캐릭터와 김현숙이라는 인간이 혼동되는 부분도 안타깝다고 한다. 김현숙은 스스로를 ‘상당히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며 ‘막돼먹은’ 영애씨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했다.
얼마 전 <막돼먹은 영애씨> 제작진이 난리가 났었다. 김현숙이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맡은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체중을 5㎏ 감량했기 때문. 심지어 tvN 내부에선 출연 계약서에 체중 감량을 금지한다고 명기하지 않았음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높았을 정도란다.
“살을 빼야 하는 역할 섭외가 들어오면 충분히 체중을 감량할 자신 있어요. 연극할 때에도 캐릭터 소화를 위해 한 달 만에 12㎏을 빼 본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막돼먹은 영애씨>에 출연하는 동안에는 힘들 것 같아요. 제작진의 반대는 안 무서운데 시청자들이 살 빠진 영애씨를 싫어할까봐 걱정되거든요. 또 영애씨에 대한 배신인 것 같기도 하고.”
출산드라에서 영애씨를 지나 앞으로 김현숙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김현숙 역시 그 해답은 모른다. 다만 출연 분량과 관계없이 임팩트 있고 의미 있는 역할을 맡고 싶다는 게 요즘 김현숙의 바람이다.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캐릭터는 그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배우로서의 철칙에 충실하고 싶다고. 모를 일이다. 그가 공언한 것처럼 다음 작품에선 수십 kg을 감량해 또 다른 모습의 김현숙으로 나타날지도. 다만 지금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김현숙을 마음껏 좋아하고 또 응원하고 싶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