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이틀 전에 은퇴를 천명한 ‘탱크’ 박정태(35)를 만났다. 은퇴 발표 후 각종 인터뷰와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소년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근성과 오기로 대변되는 허슬플레이의 대표적인 선수로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해간 그는 야구인생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고 되뇌었다.
나이는 분명 서른여섯인데 두터운 회색 니트 셔츠에 모자를 눌러 쓴 박정태는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야구장에서 워낙 살벌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바람에 무뚝뚝함의 대명사처럼 인식됐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그의 재미난 입담과 순박함이 묻어나는 환한 웃음에 보고 있는 사람까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여전히 은퇴했다는 ‘실감’보다는 선수로 뛰고 있다는 ‘착각’이 앞선다는 그는 올시즌을 치르며 은퇴에 대한 압박을 받으면서도 폼 나는 은퇴를 하고 싶어 결정 직전까지 숱한 고민과 갈등 속에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정말 아쉬워요. 무엇보다 내 자신에 대해 실망이 커요. 이런 모습으로 그만두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미련을 떨치지 못해 여러 사람 곤란해지는 것보다 빠른 결정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어요. 그래도 아쉽네요.”
롯데가 4년 연속 최하위로 내몰리는 수모를 겪는 과정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박정태를 힘들게 했다. 롯데의 전성기와 쇠락을 함께 한 그로선 재건에 그가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은퇴를 한 지금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박정태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악바리’로 요약할 수 있다. 운동장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을 발휘하며 악착같은 플레이를 추구했던 그는 그 배경으로 가난했던 가정환경을 연결 지었다.
“집이 어렵다보니 삶 자체가 마치 전쟁 같았죠. 근성 없인 배겨날 수가 없었어요. 그런 성장 과정이 야구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부산 사람들 성격도 한성질 하잖아요. 그 점도 무시할 수 없는 거고.”
몸을 불사르다보니 ‘고장’도 잦았다. 부상으로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기거나 아예 야구인생을 접을 뻔한 위기도 찾아왔다.
“그래도 부산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어느 선수에게나 팬들이 있지만 저한테 팬은 정말 남다른 존재예요. 그분들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야구선수 박정태는 없었을 것입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박정태는 올시즌 대부분의 시간을 2군에서 보냈지만 박정태가 1군에서 뛰는 모습을 한번만 보게 해달라는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양상문 감독이 1군으로 불러들일 정도였다. 빛나는 주전에서 대타 인생으로 신분 하락을 맛보면서도 박정태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 사랑에 박정태는 대타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고 한다.
2년 전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은 뒤 계약하지 않겠다는 구단과 갈등을 빚은 박정태는 말 그대로 우여곡절 끝에 2년간 6억원의 계약을 한 뒤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거듭 태어났다(이때도 롯데팬들이 박정태와 계약하라는 압력에 못 이겨 구단이 항복한 모양새였다). 계약 과정에서 심적 고통을 겪은 그는 터무니없이 낮은 액수의 계약금을 제시받고 잠시 흥분하기도 했지만 성적으로 구단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잔부상과 체력 저하로 2군을 전전했던 것.
“14년간의 선수 생활 동안 부상이 아닌 이유로 2군에서 생활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후배들과 여관에서 자고, 고기 대신 된장찌개 먹으며 밥 한 공기 더 먹는 것을 눈치 보는 그런 생활은 정말 적응하기 힘들더라구요.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다보니 나중엔 2군 생활이 편해졌어요. 오히려 1군에 올라가면 어색하더라구요. 후배들도 가지 말라고 하고. 하하. 2군에서 오만가지 일 다 했어요. 주장에다 코칭스태프의 든든한 신뢰 속에서 말년 병장 생활을 누렸죠.”
2년 동안 1군에서 생활한 건 4개월뿐이라고 한다. 당시엔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지만 지나고 보니 2군 선수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지도자 생활하는데 큰 경험으로 작용할 것 같다며 이젠 ‘감사하다’고 한다.
지난 10월5일 잠실구장에서 LG 유지현의 은퇴식이 거행됐다. 당시 상대팀으로 나온 롯데 선수들은 5회가 끝난 뒤 더그아웃 밖으로 나와서 유지현이 떠나는 장면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 속에 박정태도 있었다. 평소 유지현과 둘도 없는 형제애를 나누며 가깝게 지낸 박정태로선 유지현의 은퇴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증상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유지현의 은퇴사를 듣고 있던 박정태는 갑자기 유지현이 꽃다발을 들고 롯데 덕아웃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었단다.
“그 녀석이 사람을 놀래키더라구요. ‘마지막으로 꽃다발을 전해 줄 사람이 있다’며 걸어오길래 난 우리 단장님이나 감독님께 꽃다발을 주러 오는 줄 알았죠. 근데 절 보면서 걸어오는 폼이 예사롭지 않더라구요. 왜 저러나 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나에게 꽃다발을 안기고는 와락 껴안더라구요.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습니다.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나도 울고 우리 선수들도 울고, 난리가 아니었죠. 그때 은퇴를 결심했어요. 후배의 사랑과 배려가 은퇴를 결심하게 만들더라구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장면은 잊지 못할 겁니다.”
유지현은 은퇴 직전 유독 박정태와 전화 통화를 자주하며 인생 상담을 했다고 한다. 박정태는 “내 코도 석자인데 힘내라고 격려 많이 해줬다”면서 “지현인 누가 뭐래도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만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바랐다”고 말한다.
▲ 박정태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은퇴 발표 후 하루도 안돼 야구장이 그리워졌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렇게 잘나갈 때 너무 주위를 돌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마냥 잘나갈 줄 알았던 거죠. 내리막길을 모르고 산 덕분에 실제 내리막길을 달렸을 때는 현실을 인정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잘나갈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거죠. 운동선수들 대부분이 이기적이에요. 사랑받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베풀 줄을 몰라요. 지금 그게 참 많이 후회돼요.”
박정태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까진 좋은데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종종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선수들이 조금씩 거리감을 두기 시작하다가 나중엔 아예 ‘왕따’를 시키는 일도 있었던 것.
“밥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으면 선배들이 곧잘 뒤통수를 때렸어요. 기도는 혼자있을 때 하라면서. 한번은 회식 자리에 참석했는데 한 선배가 폭탄주를 주며 ‘기도하고 마시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기도하면 죽이쁜다’면서 협박한 선배도 있었구요. 겪어보니까 신앙생활도 ‘유들이’가 있어야겠더라구요. 너무 신앙적인 부분만을 고집하다보면 다른 선수들이 불편해지거든요. 근데 재밌는 건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모든 걸 하나님께 의지하며 훈련을 게을리 한다는 사실이죠. 성적이 안 나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하며 마음 편히 먹거든요.”
술 CF가 꽤 들어왔는데 종교 문제로 포기했다는 얘기도 처음 꺼내놓는다. 이미지 관리상 술을 멀리하긴 하지만 실제 박정태는 술도 마실 줄 알고 야구 외적인 사람들과의 친분도 꽤 두터웠다. ‘집사’ 박정태의 세상살이 방법이 유독 빛을 발한다.
2002년 시드니올림픽 예선전 때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참 자세를 잡느라(흔들타법을 하려면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한다. 덕아웃 앞에서 계속 몸을 흔들며 정신 집중을 해야 한다고)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상대팀 투수가 공 던질 생각은 하지 않고 박정태를 쳐다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더라고.
“처음 제 폼을 본 사람들은 거의 미치려고 해요. 웃기는 거죠. 세상에 그런 타법이 다 있느냐면서 신기해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에요. 우리나라 선수들도 아직까지 제 폼에 적응을 못했는데요 뭘. 선수 시절 더그아웃에서 폼 잡고 있으면 꼭 한두 선수들이 제 흉내 내느라 정신이 없어요. 정규리그 마감 직전에 정수근이 타석에서 제 흉내를 내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다가 코치가 수근이를 빼는 바람에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죠. 아 참, 수근이가 지난 올스타전에선 제 흉내를 냈네요.”
은퇴 발표 후 박정태는 제일 먼저 강병철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박정태의 전화를 받은 강 감독이 던진 한 마디가 압권이다. “감독님,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말하자 강 감독 왈, “허허. 지랄.”
“감독님이 SK 감독 시절 더그아웃에서 절 바라보시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마치 그 눈길엔 ‘니 힘들제? 내 다 안다. 그러니 힘내라’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힘든 시기라 그 따뜻한 눈빛이 너무 고마웠죠.”
박정태는 2군 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 했다고 토로한다. 특히 열한 살 된 큰아들은 학교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등 아빠의 슬럼프를 다른 각도에서 체험했다.
“자랑스런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그냥 이렇게 끝을 맺었네요. 야구 그만두면 무지 홀가분할 줄 알았어요. 한달 정도 푹 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하루도 안돼서 야구장이 그리워지더라구요. 지도자로 못다 이룬 꿈을 이룰 겁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랑스런 아빠로 기억돼야죠. 그 꿈을 위해 다시 한번 ‘악바리’처럼 살아보렵니다. 박정태는 죽지 않았으니까요.”
박정태는 미국 시애틀쪽으로 코치 연수를 계획중이다. 몇 년 후엔 박정태 코치로 부산 팬들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박정태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요일 저녁 예배를 보러간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