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게 집중력’ 지난 28일 제주도에서 열린 CJ나인브릿지 프로암대회에서 박지은의 모습. 골프에 집중하기 위해 인터넷도 멀리한다는 박지은의 눈이 매섭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라운딩을 돌며 윤 회장에게 원 포인트 레슨을 마다하지 않았던 박지은은 이전보다 훨씬 안정감있고 여유있는 몸짓으로 대회 전날의 긴장된 분위기를 편안하게 풀어나갔다. 프로암대회를 마친 후 박지은과 오랜만에 인터뷰를 가졌다.
관심사는 오직 골프 박지은과는 인터뷰가 쉽기도 하면서 어렵다. 인터뷰 당시엔 어느 선수보다도 적절한 대답과 언어구사로 기자들의 글쓰기 수고를 덜어주는 데 반해, 그렇게 인터뷰하려면 끈질긴 기다림과 거듭된 요청이 필요하다(실제로 기자도 이날 인터뷰를 위해 박지은을 따라 18홀을 죄다 돌며 개별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한 ‘정성’을 보여야만 했다). 프로 데뷔 초반에만 해도 인터뷰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던 그가 이처럼 까다롭게 구는 이유가 뭘까.
“별다른 이유는 없는데…. 그냥 경기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죠. 뭐, 딱히 할 말도 없고. 특히 골프 외적인 부분에 대해선 더더욱 그래요.”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조차 네임 밸류있는 골프 스타이다보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는 부분들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특히 눈에 띄는 외모와 친근한 대인관계로 인해 남자친구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들은 스캔들까지는 안 돼도 이런저런 소문을 양산했던 게 사실이다(몇 년 전 기자도 비슷한 소문을 듣고 어렵사리 소문 속의 ‘그 남자’를 직접 만났다가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였다는 부분과 ‘곧 결혼할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에 취재를 포기한 일이 있었다).
올 6번의 준우승 올해는 ‘준우승’이란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그로 인해 애니카 소렌스탐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항상 우승 문턱에서 맴돌아야 하는 현실의 연속으로 속을 끓이기도 했다.
“물론 우승을 못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준우승에 오르기도 힘들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만족하려고 노력중이에요.”
하지만 속마음을 숨길 수는 없다. 기자가 그래도 열 받지 않느냐고 묻자 재빨리 “열 받죠”라며 반응한다. “솔직히 ‘준우승 징크스’라는 타이틀도 싫지만 우승을 못한 부분 때문에 더 열받아요. 우승은 노력한다고, 욕심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운도 따라야 해요.”
박지은의 벽으론 애니카 소렌스탐도 있지만 박세리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박세리가 98년 US오픈 우승 후 미LPGA 무대를 주름잡을 때 박지은은 미국 아마추어무대에서 55승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뒤 프로에 데뷔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 해마다 1승을 올리며 지금까지 통산 5승(나인브릿지대회 우승으로 1승을 더 챙겨 6승이 됐다)의 성적을 올렸고 특히 올시즌 박세리가 부진의 늪에 헤매고 있을 때 박지은은 6개 대회에서 준우승을 이루며 박세리를 자극시켰다.
▲ 지난 31일 CJ나인브릿지 프로암대회에서 16언더파로 우승한 박지은. 우승트로피를 품에 꼭 안은 모습이 ‘준우승 징크스’를 날려버린 듯 홀가분해 보인다. 사진제공=스포츠투데이 | ||
“넘버 원이니 넘버 투이니 하는 얘기에 대해선 관심 없어요. 그리고 미국에서 한국 선수들끼리 경쟁하는 것도 별다른 의미가 없구요. 물론 제가 넘버 원이 된다면 너무 좋겠죠. 아직까지 그게 안되니까 더 노력해야 되는 거고…. 올시즌이 그 ‘문턱’을 넘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어요.”
별난 ‘부잣집 딸내미’ 박지은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철없는 부잣집 딸내미’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골프와 관련해선 아버지인 박수남씨(삼호F&G 대표이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 남부러울 게 없이 자라 자칫 승부 근성이 줄어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골프와 관련해선 욕심도 엄청나고 오기가 대단하다며 자랑이 한창이다.
박지은은 이에 대해 어느날 갑자기 골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 인터넷 게임도 즐기지 않는 편이에요. 골프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서죠. 골프에 방해받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해요. 때론 골프가 지겨울 때가 있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고. 하지만 친구들과 놀러가서도 골프내기를 하며 놀 정도로 골프를 떼어놓을 수가 없더라구요. 골프를 단순히 게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진실로 내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덕분이죠.”
미국 골프장 주인? 박지은이 다른 골퍼와 다른 부분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한 비즈니스 감각이다. 이미 박지은은 아버지 박수남씨가 삼호물산을 인수할 당시 대주주로 참여했으며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초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퍼블릭 골프장의 지분을 매입, 원래 주인과 공동 소유주가 됐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스포츠 재벌’이란 새로운 타이틀이 붙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지은은 여전히 자신은 골프선수임을 강조한다.
“절 그냥 골퍼로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미국의 골프장 인수와 최근 보도된 중국의 골프장 건립 등은 전 잘 모르는 일이에요.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시는 일이라 전 이름만 빌려주는 거구요. 제가 얼마나 벌었는지, 돈을 얼마나 모았는지 잘 몰라요. 아직은 부모님이 모두 관리해주시기 때문이죠.”
박수남씨도 “골프만 치는 애가 사업에 대해 뭘 알겠느냐. 다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또한 “지은이는 자기한테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골프만 칠 때이고 비즈니스는 나중에 관심을 가져도 늦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외로움만큼 성숙 3년 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아버지와 떨어져 혼자 지내는 박지은은 가끔 외롭기는 해도 혼자 생활하는 게 훨씬 더 편하다며 만족감을 나타낸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부모 곁을 떠나 미국 생활의 단맛, 쓴맛, 신맛까지 두루 섭렵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여유도 생기는지 모른다. 한국에선 ‘회장님’으로 불리는 아버지가 딸을 위해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며 백을 메고 손수 운전을 하는 등 모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때도 고마운 마음 한켠에 독립생활에 대한 갈망을 늘 품고 있었던 그이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박지은에게는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이 물씬 풍겼다. 박세리와는 다른 색깔의 카리스마도 골프장에서 그를 더욱 단단하게 보이는 중요한 요소다. 이런 기자의 지적에 대해 박지은도 쉽게 수긍을 한다.
“진짜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경험이 쌓일수록 성숙해지는 것 같고 저만의 카리스마도 있는 것 같고, 많이 안정이 됐어요. 어른이 돼 가는 거겠죠?”
박지은은 인터뷰 때마다 결혼 얘기가 나오면 스물여덟 살 이전에는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골프와는 관련 없는 사람,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 등 다양한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나이 먹어서까지 혼자 살 자신은 없다는 얘기로 마무리하곤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결혼요? 어휴 몰라요. 지금은 결혼 얘기 꺼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아직 계획에도 없고 할 일도 많고 당분간은 생각이 없어요.”
프로 데뷔 초반에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이 5년차가 된 지금은 결혼 계획이 없다고 말하는 부분에는 분명 어떤 변화가 자리해 있을 터이다.
제주에서 만난 한 골프 관계자는 박지은을 가리켜 ‘세기의 신부감’이란 찬사를 보냈다. 외모, 재력, 능력, 인간성 등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기자 앞에 있는 박지은한테선 ‘한가하게’ 사생활을 논할 만큼 틈이 보이지 않았다. 취재기자 중 유일하게 박지은의 생애 첫 홀인원을 현장에서 목격한 그 순간에 박지은은 프로암대회의 홀인원 상품인 3백만원 상당의 고급 시계보다 다음날 대회에서 홀인원하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쉬워할 만큼(대회 중 17번홀에서 홀인원할 경우 상품으로 고급 외제 승용차가 지급된다) 욕심도 많고 눈부신 근성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박지은은 윤세영 회장 일행이 홀인원에 대한 축하의 뜻으로 즉석에서 거둔 ‘금일봉’을 전하자, 양해를 구한 뒤 경기진행요원에게 그 봉투를 그대로 안겨주었다).
“가진 게 많아 보인다고 해서 더 조심스러워요. 조금만 튀어도 욕을 더 먹게 되니까요. 그래도 더 갖고 싶어요.”
그게 돈이냐고 했더니 우승이란다. 우승만 계속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