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스포츠서울 | ||
그러나 지난 12일 밤, 자정 무렵에 시작된 가족회의의 난상토론 끝에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구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인생의 낙오자란 생각으로 고향인 여수 근처인 광양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한 것. 광양에 내려가기 하루 전인 13일, 집 근처인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고종수를 만났다. 적잖이 마음 고생을 한 듯 고종수의 얼굴은 푸석푸석해 보였다.
변현명(변): 모자를 썼네요.
고종수(고):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솔직히 며칠간 진로 문제에 대한 걱정으로 소주를 마셨더니 얼굴도 많이 부었어요. 안 나오려고 했어요. 그래도 <일요신문>에 제 솔직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왔어요. 죄송한데 사진은 찍지 말아주세요.
변: 마음 고생이 심했겠어요.
고: 제대로 잠을 잤다면 미친 놈이겠죠. 그동안 수원 복귀만 생각하고 운동에만 전념했는데 갑자기 트레이드라니 무지 황당하더라구요. 이젠 제 나이도 2년만 더 있으면 서른 살이에요. 왜 이렇게 추락했는지 자괴감도 많이 생겼어요. 정말 은퇴해버리고 싶었어요.
변: 은퇴하면 뭘 하려고 했어요?
고: 아무 생각이 없었죠. 그냥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밖에 없었어요.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었죠.
변: 수원 구단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는데….
고: (목소리에 힘을 주며) 네. 정말 많이 서운해요. 아무리 저를 내보내려 한다고 해도 사전에 통보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인간적인 배신감에 숨이 턱턱 막히더라구요. 하지만 차범근 감독님께는 그런 마음이 없어요. 제가 존경하는 분이니까요. 특히 서포터스들한테 정말 미안해요. 수원 구단 홈페이지에 저의 트레이드에 대해 구단을 성토하는 글을 많이 봤어요. 서포터스들은 잊지 못할 거예요.
변: 그동안 운동은 어디서 했어요?
고: 저녁마다 한남대교에서 영동대교까지 한강 둔치를 뛰었어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뛰었는데 사람들이 알아 볼까봐 날씨가 추워도 밤에 나갔죠. 청계산 등산도 매일같이 했구요.
변: 팬들은 고종수 선수를 보면서 많이 안타까워하는 것 같아요.
고: 저도 제 자신이 한심할 때가 많은데 팬들은 오죽하겠어요. 지난해 수원이 포항을 꺾고 우승하던 날 관중석에서 경기를 봤어요. 모자 쓰고 마스크로 가리니까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구요. 근데 옆에 있던 팬이 친구랑 제 얘기를 해요. ‘고종수 완전히 짤린 거지?’ 정신이 아득했어요.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거죠.
변: 전남은 고향 구단이나 마찬가지잖아요.
▲ 최근 전남으로 트레이드된 고종수는 수원 구단에 서운함을 전하면서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며 ‘재기’를 다짐했다. 사진은 지난 2001년 프로축구 올스타전에서 고종수가 뛰는 모습. | ||
변: 고향이지만 가족은 다 서울에 있죠?
고: 그래요. 광양에서는 숙소 생활을 할 거예요. 밖에 아파트를 얻을까도 생각했지만 나태해질 것 같아 아예 숙소 생활을 자청할 겁니다. 축구에만 몰두했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리며 제대로 볼 한번 차 볼 거예요.
변: 부모님도 걱정이 많겠어요.
고: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죠. 어머니는 허리가 좋지 않고 아버지는 천식기가 있고 시력이 많이 떨어지셨어요. 이번에 은퇴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은퇴는 정상을 밟아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너는 좌절했다고 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눈물이 쏟아지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죠.
변: 항상 술로 인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고: 축구 기사보다 사회면 기사에 한동안 등장했었죠.(웃음) 하지만 이제부터 술은 연중행사가 될 거예요. 정말 술을 먹고 싶다면 허정무 감독님의 허락을 받고 마실 거예요. 광양 시내가 좁은데 내가 술 마시면 금방 소문이 날 것이고 아예 안 마시겠다는 각오를 다질 겁니다.
변: 술 말고 좋아하는 음식은?(웃음)
고: 다 잘 먹는 편이에요. 여수 지역이 워낙 음식 솜씨가 좋은 곳이라 어릴 때부터 가리는 것은 없었어요. 특히 갓김치는 정말 좋아해요.
변: 한동안 살이 많이 불었어요.
고: 다 소주 살일 거예요. 지금은 운동으로 많이 뺐지만 저녁에 술 마시고 현실을 잊으려 한 적이 많았어요. 술에 의존하려 했던 거죠. 그러나 작년에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은 내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변: 친한 후배인 이동국과는 연락하나요?
고: 동국이가 자주 전화를 해요. 지난해 12월 독일전 끝나고도 서로 연락했어요.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정말 잘됐어요. 마음이 여린 놈인데 군대 가서 남자 됐잖아요.(웃음) 후배한테 부끄러운 선배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변: 어느새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됐어요.
고: 네. 정말 하고 싶어요.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할 때 주위에서도 결혼하라는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내 마음도 못 잡는데 한 사람을 어떻게 책임지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올 시즌 변화된 모습으로 성공한다면 그때 결혼을 다시 생각할 겁니다. 그런 다음 좋은 여자 분 좀 소개받고 싶어요. 기자님이 소개시켜 주실래요?(웃음)
변현명 스포츠투데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