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29일, 동계유니버시아드 전관왕 개선 뒤풀이를 할 여유도 없이 다시 강훈련에 들어간 최은경.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편안한 대답이었지만 기자한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큰 대회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대회를 준비하는 그의 입장에선 휴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빡빡한 일정들이 평범한 일상을 그릴 수밖에 없게 했을 것이다.
‘쇼트트랙의 여왕’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지난 23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막을 내린 2005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 전인미답의 사상 첫 5관왕으로 전관왕을 차지했던 최은경(21·한체대)을 지난 1월27일 태릉선수촌에서 만났다.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하자마자 곧장 선수촌으로 들어왔다는 그는 30일 헝가리 월드컵대회 출전을 위해 또다시 출국해야 한다. 인터뷰 내내 ‘여왕’의 도도함보다는 20대 초반의 풋풋한 향기를 물씬 풍긴 최은경과의 향내나는 ‘리얼토크’를 소개한다.
드디어 오랫동안 연습했던 결과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한국 선수들의 전매특허로 불리는 ‘공포의 날 내밀기’가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최은경은 동계유니버시아드 500m 결승에서 라이벌 중국의 주밀레와 결승선 직전에서 1,2위를 다투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될 만큼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주밀레는 손을 치켜들며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고 최은경은 가쁜 숨을 고르며 판정을 기다렸다. 결과는 세 차례의 비디오 판독 끝에 최은경이 0.009초로 먼저 날을 내민 것으로 결론났다. ‘공포의 날 내밀기’의 승리였다.
“중국 선수는 몸이 먼저, 전 날이 먼저 나갔던 거죠. 몸을 먼저 들이민 선수 입장에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겠지만 빙상에선 스케이트 날이 먼저 들어와야 이기는 거잖아요. (김)동성이 오빠가 나가노동계올림픽에서 처음 공개한 이후로 외국 선수들도 모두 이 방법을 따로 연습한다는데 실제로 성공 확률은 극히 적어요. 저도 쇼트트랙하며 처음으로 성공한 거니까요.”
두 살 위 언니가 스케이트 선수로 생활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보며 재미있을 거란 생각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스케이트를 접하게 됐다는 최은경은 “5학년 때까진 재미있었고 6학년 때 뭔가를 알고나서부터 힘들어졌다”고 회상한다. 그가 말한 ‘뭔가’는 바로 승부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태릉선수촌 생활은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을 흘러 왔다. 최은경의 표현대로라면 청소년기와 ‘성년의 날’을 선수촌에서 보냈을 만큼 선수촌은 최은경의 집이나 마찬가지다.
▲ <일요신문>과 인터뷰중인 모습. | ||
쇼트트랙의 훈련 강도 세기는 선수촌에서도 유명하다고 한다. 레슬링, 유도 다음으로 쇼트트랙이 ‘심하게’ 훈련하는 것으로 손꼽힌다는 것. 아침 6시부터 시작한 훈련은 오후 5시가 돼서야 끝나고 저녁 식사 이후엔 개별 보강 운동에 들어가는 등 하루 종일 훈련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다른 종목의 선수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어요. 쇼트트랙말고 다른 운동을 선택했더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가끔 수영 선수가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쇼트트랙보다 편할 것 같아서…. 그런데 수영하면 어깨 넓어진다는 소리 듣고 일찌감치 포기했죠.”
수영 선수가 어깨 넓어지는 걸 감수해야 한다면 쇼트트랙은 하체의 발달만큼은 ‘팔자려니’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최은경은 치마를 입지 못한다. 다리가 굵은 것도 그렇지만 다리를 모으고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란다. 한 마디로 자세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성 교제 경험이 전무하다는 최은경. 오는 3월이면 대학 3학년인 그로선 이성과 관련해서 별로 할 말이 없다는 ‘커리어’가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가끔씩 남자란 존재에 대해 막연한 상상으로 호기심을 키우며 웃음 짓는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선수촌에서 많은 커플이 탄생했잖아요. 주로 같은 종목에서 그런 ‘역사’가 이뤄지는 것 같은데 빙상 쪽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오빠들이 절 여자로 절대 안 보거든요. 그런데 오빠들이 몰라서 그렇지 저도 보기완 달리 ‘한애교’하는 편이에요. 호호”
자신의 배우자가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바람을 내비친다. 운동 생활의 특이성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스케이트 타는 사람은 사절하고 싶다고. 얼음판과의 친분은 자신 한 사람으로 족하단다.
“운동하는 동안엔 남자를 못 사귈 것 같아요. 주위의 걱정 어린 시선을 견뎌낼 자신도 없고. 그런데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애써 물리치고 싶진 않아요. 정말 힘들 때, 운동이 너무 하기 싫을 때 이성의 존재는 또 다른 힘이 될 것 같거든요. 그런 느낌, 한번 느껴보고 싶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건지, 좀 궁금하기도 하고…”
한국의 쇼트트랙이 워낙 강세를 보이는 까닭에 어느 대회를 가더라도 금메달 획득을 당연시하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다. 그런데 최은경은 이런 시각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평소 인터뷰를 꺼렸던 최은경이 한번은 넘어가야 할 ‘고비’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지만 대표팀 코치의 구타에 못 이겨 선수촌을 집단으로 이탈했던 사건의 후유증은 여전히 최은경이 감당하기 힘든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철없는 행동이었던 것 같아요. 맏언니인 제가 선수들을 다독이지 못하고 그런 엄청난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는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돼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때 그 선생님들에게 무척 죄송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번 대회에 더욱 더 좋은 성적을 내야 했어요. 그래야 그 선생님들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실 것 같았거든요.”
가끔 이전 일을 떠올리며 마음 가득 후회를 안고 있을 때마다 자신의 철없음을 반성한다는 최은경은 누구보다 가족들이 실망감을 나타내는 바람에 심적인 고통이 더욱 컸다고 토로한다.
“엄마가 저한테 많이 실망하셨다고 하시더라구요. 물론 제가 맞으면서 운동했다는 부분에선 가슴을 치며 우셨지만 대표팀 고참으로서 올바른 행동이 아니었다고 나무라셨어요. 우리 가족의 시련기였죠.”
대구에서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가 IMF로 인해 부도를 맞게 되자 최은경의 가족은 아버지만 남겨두고 모두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된다.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최은경이 살 집은 반지하의 단칸방이었다.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 어머니는 생전 처음 이모가 일하는 시장에 나가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생업전선에 뛰어들기도 했다. 최은경한테는 참으로 가슴 아픈 1998년이었다고 한다.
“주위에선 제가 힘들게 생활했던 것을 잘 몰라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개인적인 문제는 꺼내지 않았거든요. 당시 부도 맞았던 아빠가 어디서 생활하셨는지는 지금까지도 몰라요. 대부분 선수촌에서 생활하다보니 가족들이 힘든 얘긴 잘 안해줬어요. 이젠 다 옛날 얘기예요. 아주 부티나게 사는 건 아니지만 생활이 많이 안정됐거든요. 연금 받는 것도 있고 대회나가서 상금도 타고, 언니가 외국 유학중인데 제가 조금씩 보태고 있어요.”
자신의 이상형을 권상우와 차태현이라고 말하며 수줍게 웃는 모습에선 쇼트트랙 역사상 여자 선수 최초로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금메달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름에 체력 훈련 받다가 바닥에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라는 그에게 왜 그렇게 힘든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지 물었다.
“글쎄요. 저도 그게 불가사의해요.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다가도 막상 안타면 너무 허전해지거든요. 레이스할 때의 짜릿함, 아! 그게 ‘마약’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