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로 진출해 맹활약중인 이영표가 <일요신문> 창간 700호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 ||
한국에서 취재를 왔다고 해서 특별히 시간을 내기는 어려워 보였다. 네덜란드에서 보내온 이삿짐이 도착한 데다 새로 얻은 집도 채 정리되지 않았고 갓난아이만 돌보기에도 벅찬 아내한테 모든 걸 맡기고 연습장에 나온 그한테선 조금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사전에 구단과 약속이 된 인터뷰라 마음의 준비는 한 듯 했지만 이영표의 머릿속엔 풀다 만 이삿짐과 가족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인터뷰 일정을 상의하다가 구단에서 갑자기 런던 시내로 나가 양복(단복)을 맞춰야 한다고 알려와 졸지에 취재진은 이영표의 승합차에 올라타야 했고 런던으로 향하는 동안 녹음기를 ‘들이대고’ 물을 것 다 물어보고, 할 말 다 하는, 비교적 긴 인터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운이었다면 런던으로 나가는 동안 엄청난 교통 체증 덕을 봤다는 사실이다.
이영표를 만났을 때는 프리미어리그에 데뷔해 세 번 연속 경기에 출장했다는 뉴스가 영국과 한국의 스포츠 뉴스에서 주요 소식으로 다뤄졌을 즈음이다. 아직은 프리미어리그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초짜’ 그 자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가 접해본 축구와는 색깔도 깊이도 맛도 다르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거칠다는 표현은 너무 약해요. 거칠고 저돌적인 것보다 더 강한 표현 없을까요? 아, 이런 표현은 어떨까요? 선수들이 마치 ‘싸우는 머신’같다고. 경기장에선 모두가 기계예요. 힘과 기술이 적절히 섞여서 엄청난 파워를 발휘하는 지능있는 머신 있잖아요. 제가 지금 그런 선수들을 상대하고 있는 거죠.”
이영표의 입술은 찢겨져 있었다. 인터뷰 전날(20일 현지시간) 칼링컵 4부리그 그림스비타운과의 경기에서 힘을 앞세우며 총공세를 펼치는 상대의 파워에 심하게 부대끼다 전기리그 최초로 패배의 쓰라림을 맛본데다 전력상으론 도저히 비교조차 안 되는 팀한테 졌다는 수모까지 보태져 그의 상처를 훨씬 더 아프게 했다.
“아직은 우리 팀 선수들도 잘 모르는 상태예요. 선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파악이 안 돼 패스 미스도 일어나고 리듬을 타지 못하는 실수를 벌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러면 좀 어때요? 전 프리미어리그십을 충분히 즐기고 있고 중·고등학교 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팀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걸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와요. 우리 팀에서 뛰고 있는 16명의 모든 선수가 각 국을 대표하는 대표팀 선수라는 사실이요. 그냥 대표팀 선수가 아니라 베스트 일레븐으로 뛴 선수들만이 모인 곳이 프리미어리그이고 토트넘이라는 거죠. 이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영표는 네덜란드 PSV에 처음 입단했을 때보다 지금의 상황이 훨씬 더 적응하기 편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선 이영표의 존재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한국대표 선수라는 타이틀뿐이었지만 토트넘에 입단한 이영표한테는 네덜란드리그 정상에 올랐고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는 배경이 엄청난 차이점을 만들어 준 것이다.
▲ 영국을 방문한 기자와 함께 기념사진 한컷.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영표의 입단을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당연히 욜 감독이었다. 으레 하는 상투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욜 감독과 히딩크 감독의 차이점을 물었다.
“두 분이 많이 비슷해요. 별다른 차이점을 못 느낄 만큼요. 욜 감독도 일방적이지 않고 선수를 인간적으로 대해줘요.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스타일이더라구요. 아직까지 전술적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래도 한 가지 차이점을 말해 달라구요? 하하. 두 분 이름이 다르잖아요.”
이영표는 ‘행복한 사나이’다. 토트넘으로 오기까지 그가 선택할 팀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PSV 잔류라는 매력적인 유혹에다 AS 모나코 등 이름만 들어도 호흡이 가빠지는 명문 클럽들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최종 선택은 토트넘이었다.
“남느냐 떠나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죠. 떠난다면 어떤 팀으로 가야 하느냐가 그 다음 ‘숙제’였구요. 프리미어리그를 경험해 보지 못하면 축구하는 동안 내내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어떤 리그인지, 왜 대단한 곳이라고 하는지, 직접 말할 수가 없잖아요. 남아야 할 이유보다 떠나야 할 이유가 더 많았어요. 그래서 토트넘을 선택한 거죠.”
세계적인 명문클럽으로 손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과 비교 아닌 비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토트넘보다 맨유 같은 상위팀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더라면 그 만족감이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영표는 ‘진심으로’ 지금의 현실에 대해 만족했다. 토트넘에도 다비즈, 로비 킨 등 각국 대표팀의 주축 멤버들이 뛰고 있는 데다 입단하자마자 그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겨누고 있는데 여기서 뭘 더 바라겠느냐는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지성이는 풀타임으로 뛰지 못하고 있고 전 풀타임으로 뛰고 있는 부분에선 큰 차이가 있겠죠. 전 어느 팀에서 뛰느냐보다 어떻게 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지성이처럼 출전 시간이 적어도 그 안에서 자기가 배우고 느낄 수 있다면 시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저랑 지성이는 비교 상대가 안돼요. 비교해서도 안되구요. 서로 프리미어리그를 시작하는 방법이 다른 데다 어떠한 기준으로도 비교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비록 세 게임밖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 적응하는 데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대뜸 체력이 걸림돌이 되느냐고 ‘덫’을 놓아 봤다.
“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단지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면 상당히 견디기 힘들 거라곤 생각해요. 물론 컨디션과 체력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분명히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다보면 워낙 경기 수가 많다보니까 집중이 안 될 수도 있거든요.”
이영표는 K-리그에서 뛸 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경기의 리듬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이유는 한 가지. 체력적인 밸런스를 회복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외국 생활을 하다보면 훈련 외엔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 그러나 한국에선 가야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원치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즉 훈련 외에 할 일이 많다보니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그 결과 경기하는 데까지 지장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 이영표 선수.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금까지 제가 하는 말들은 제가 실천하길 바라는 희망사항들이 많아요. 그렇게 하려고 지향하는 부분들이죠.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말과 행동이 일치할 수가 있겠어요. 때론 실수도 하고 화도 내고 남을 원망하기도 하고, 뭐 그런 일반적인 감정들 다 느끼거든요.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는 게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어요.”
잠시 한국 축구대표팀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차는 토트넘을 떠난 지 50분이 지났는데도 꽉 막힌 런던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토트넘 선수들의 전용 양복점을 찾아 헤맸다. 팀의 주무가 탄 차가 이영표를 가이드하는 중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많아요. 우리가 좋은 경기를 못해서 더욱 아쉽죠. 실력이 부족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선수들이 배가 불러서 못 뛴다고 비난하는데 저로선 황당할 따름이죠. 선수들 호흡이 안 맞는데 어떻게 잘 뛸 수가 있어요. 패스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고 움직여도 치고 들어가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좋은 경기를 펼칠 수가 있겠어요. 너무 비난과 비판을 앞세우다보니 선수들 스스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요. 몇몇 선수는 심리적인 압박이 심한 나머지 아예 게임을 제대로 뛰지도 못하더라구요.”
이영표는 축구의 기본은 즐기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리그 경기든 A매치든 축구를 즐기며 봐야 한다고, 그 틀 안에서 비난과 비판이 오가야 하는데 팬들 중엔 일부 악의적인 비난으로 축구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드보카트 신임 감독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선수들이 자신감을 되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영표는 히딩크 감독 이후 부침이 잦았던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가 하루 빨리 안정되길 바랐다.
드디어 그 양복점이 나타났다. 고풍스런 건물에 럭셔리한 인테리어로 이방인을 잔뜩 주눅 들게 만드는 양복점 앞에서 차는 멈춰섰고 이영표는 서둘러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제가 토트넘에 입단했다고 해서 토트넘이 엄청나게 달라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아요. 어떤 굴레를 갖고 뛰기보단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달려갈 거예요. 프리미어리그를 준비하고 열심히 뛰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을까요? 전 더 이상 잃을 것도, 누릴 것도 없거든요.”
영국=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