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유의 박지성 선수.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네덜란드 초년병 시절과는 완전 딴판으로 프리미어리그의 초짜 생활을 화려하게 펼쳐 보이는 박지성을 귀국 전인 지난 9월22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캐링턴 훈련구장에서 만났다.
출입조차 힘든 맨유 연습장
맨유의 캐링턴 연습장은 맨체스터 외곽에 자리한다. 라이벌 아닌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 전용 경기장 바로 옆에 위치한 캐링턴 연습장은 입구에 표지판조차 없어 관계자들 아니면 찾아가기가 어려울 정도다. 연습장으로 들어가려면 넓디넓은 목장을 지나 2중 바리케이드를 거쳐야 클럽하우스까지 도달하게 된다. 사전 약속이 돼 있지 않으면 출입을 철저히 통제할 만큼 선수 보호에 만전을 기울인 흔적들이 도처에 숨어 있었다.
박지성보다 먼저 나타난 사람들은 박지성의 부모였다. 가끔 연습장에 나와 아들의 훈련 장면을 먼발치서 조용히 지켜보고 돌아간다는 그들은 연습장에서 퍼거슨 감독이 걸어 나오자 “우리만 보면 ‘밥 먹고 가라’고 성화를 부린다”며 “아무리 밥이 맛있어도 선수들 있는 데서 어떻게 식사를 하겠냐”고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맨유의 언론 담당관 다이애나 로의 안내로 인터뷰실에 들어서자 곧이어 박지성이 나타났고 취재진과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한국에서 오랜 시간 비행과 기다림 끝에 만난 박지성이었지만 막상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우리가 있는 곳이 맨체스터가 아닌 한국의 파주 트레이닝센터 같은 느낌이었다.
첫 질문을 고르다가 박지성의 입이 부르튼 것 같아 피곤하냐고 물었더니 ‘지송 빠르크’ 왈, “피곤할 리가 있나요? 경기를 1분밖에 안 뛰었는데, 하하”였다. 1분밖에 못 뛴 게 아니라 1분밖에 안 뛰었다는 표현에서 그의 축구관이 잠시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다.
지금은 적응기간!
자연스레 질문은 출전 시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박지성은 지금까지 축구를 시작한 이래 경기에서 1분을 뛴 것은 지난 리버풀전이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1분 남겨 놓고 경기장에 들어가라는 퍼거슨 감독의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았고, 실제로 공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경기는 끝이 났다.
“1분만 뛰었다고 해서 특별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냥 ‘아, 이번에도 한 게임 뛰는구나’ 뭐 이런 생각만 들었죠. 기자분들은 제가 몇 분을 뛰었는가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시지만 솔직히 지금의 전 출전 시간을 따질 만큼 여유롭지 않아요. 아직은 적응하기에도 바쁘거든요.”
박지성은 1분이든 10분이든, 경기에 계속 나갈 수 있는 데 만족하고 있었고 맨유에 입단하면서 처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겠다거나 전 경기에 출전하겠다는 ‘엄청난’ 희망사항은 애당초 가져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생각보단 빠르게 적응하고 있어요.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선수들도 많구요. 개인 기량이나 팀 환경들이 이전 팀들과는 엄청나게 달라요. 그래도 네덜란드에 처음 갔을 때보단 훨씬 나은 편이죠. 유럽 축구에 대해 경험을 해보고 간 것과 아닌 것과는 큰 차이가 있더라구요.”
PSV 에인트호벤에선 항상 주전이었지만 맨유에선 매 경기마다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박지성은 어차피 프리미어리그 진출 자체가 도전을 통해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생을 선택한 것이기에 설령 주전에서 밀려난다 해도 크게 상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에 첫발을 내딛을 때도 전 주전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어요. 월드컵 4강을 이루고 온 동양 선수였을 뿐이죠. 여기도 비슷하지만 그래도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에인트호벤시절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골을 넣었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프리미어리그에 입문한 지 두 달 조금 더 된 선수에게 소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방송과 신문에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데, 박지성은 이번엔 조금 다른 속내를 드러냈다.
“영표 형도 비슷한 얘기를 했겠지만 프리미어리그 선수들, 정말 빨라요. 체격 조건도 엄청나잖아요. 경기를 할 때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 게 많은지를 깨닫게 돼요. 그게 뭐냐구요? 어휴, 너무 많아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여긴 템포가 빠르면서도 킥이 많아요. 그런데 상위팀일수록 킥보단 패스 위주의 플레이를 펼쳐요. 크게 문제될 건 없어요. 경기하면서 보완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면 조금씩 업그레이드되지 않겠어요?”
▲ 지난 1일 풀럼과의 경기에서 박지성이 상대팀 선수들을 헤치며 드리블하고 있다. 이날 박지성은 두 번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쳐 ‘다이너마이트’라는 찬사를 들었다. 로이터/뉴시스 | ||
맨유 유니폼을 입고 프리미어리그 첫 게임을 치렀을 때의 기분이 궁금했다. 이영표는 ‘싸우는 머신’이라고 표현했고 울버햄프턴에서 활약중인 설기현은 선수들이 ‘벽’처럼 느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두 선배들이 표현한 소감을 듣던 박지성이 “두 분 다 언변가시네. 난 그렇게 표현 못하는데”라면서 다음과 같은 느낌을 전했다.
“뭐, 여기 선수들이 ‘장난 아닌데’하는 느낌은 없었어요. 단지 정말 굉장한 것은 여기에 모인 선수들을 왜 세계 최고라고 부르는지를 경기할 때가 아닌 연습할 때 더 크게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1일 풀럼과의 경기가 끝난 뒤 웨인 루니는 박지성을 가리켜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박지성의 폭발적인 플레이는 훈련에서 늘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띄운 적이 있었다. 박지성도 웨인 루니의 천재적인 골 감각이나 반 니스텔루이의 안정된 골키핑, 호나우두의 천부적인 발 놀림 등이 경기가 아닌 연습 때 충분히 나타나고 그걸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배우고 채우려 노력한다는 설명이었다.
박지성한테 동료들의 엄청난 ‘스타파워’에 스스로 위축된 적이 없는지를 물었다. 박지성은 당당했다.
“그들이 많은 장점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저한테는 그들이 갖지 못한 장점도 있을 겁니다. 서로의 장점을 공유하면 실력이 더욱 늘어날 거라 믿기 때문에 제 옆에 웨인 루니가 있다고, 호나우두가 버티고 있다고 해서 쪼그라든 적은 없어요. 맨유에서 신기했던 것은 이렇게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모두 ‘하나’가 돼 움직인다는 사실이었어요. 어쩜 이전에 제가 경험했던 팀들보다도 더 희생정신이 투철한지도 몰라요. 그런 희생정신이 있기 때문에 맨유가 세계 최고의 구단으로 평가받는 것 같아요.”
맨유의 클럽 마크가 새겨진 벽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박지성은 이전 네덜란드에서 부상과 재활로 시련기를 보냈던 그 박지성이 아니었다. 에인트호벤 팬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퇴장했던 그 박지성도 아니었다. 어느덧 맨유의 선수로 자연스럽게 그 속에 녹아 있는 프리미어리거였다.
맨유에서 박지성한테 가장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은 잘 알려졌다시피 반 니스텔루이다. 반 니스텔루이는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박지성 어머니한테까지 빨리 집들이를 하라고 성화하는가 하면 자신을 초대할 때는 매운 음식은 가급적 하지 말아달라는 스페셜 부탁까지 하는 등 박지성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라운드의 악동’으로 소문난 웨인 루니는 어떨까?
“저한텐 그렇게 성질 안 부리던데…(웃음). 서로 성질이나 성격이 비슷해야 싸우는 거잖아요. 워낙 저랑 다른 스타일이라 싸울 일이 없죠. 웨인 루니, 호나우두가 나이가 어려서인지 저한테 공으로 장난을 걸면서 살갑게 대하는 편이에요. 아직 영어로 말하는 게 유창한 편이 아니라 밀착된 관계로 발전할 순 없어도 네덜란드 때보다는 훨씬 나은 거죠. 그땐 영어는 물론 네덜란드어까지 버벅댔으니까.”
지난 풀럼전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박지성한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면 첫 골이다. 하루 빨리 첫 골이 터지길 소원하는 팬들 입장과는 달리 박지성은 첫 골에 대해선 의외로 담담해 했다.
“제가 공격 부문을 맡고 있기 때문에 골을 넣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해요.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상황이 연출돼도 골을 넣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골이 터지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물론 골을 넣으면 정말 좋겠죠. 하지만 골이 터지지 않는다고 해도 경기 내용이 좋다면 전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지금은 제가 갖고 있는 걸 얼마나 제대로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해요. 솔직히 신경 안 쓰려고 무지 노력중입니다.”
박지성은 자신이 여러 팀들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맨유를 선택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남들과 다른 기회를 잡고 싶어서, 두 번째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세요? 그건 첫 골도 아니고 경기 출전 시간도 아니에요. 바로 아예 경기에 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뭐 부상도 될 수 있고 감독이 제쳐놓을 수도 있어요. 선수가 경기를 뛰지 못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또 있겠어요?”
맨유에 입단하기 전 한국에 있는 동안 전국이 들썩일 정도로 박지성 열풍이 불었던 지난 여름에 대해서 박지성은 이미 초연해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가라앉는 건데요”라며 과거의 일로 받아들였다.
“맨유에 입단 후 참으로 여러 가지의 반응들이 있었어요. 다행인 게 그동안 인터넷이 안돼 그 반응들을 모르고 지날 수 있었던 거죠. 전 제가 처한 위치를 너무 잘 알고 있고 앞으로 제가 할 일이 뭔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주위 반응들에 대해 크게 심각해지거나 고민하지 않으려고 해요. 칭찬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과 비난에도 상처받지 않는 심장도 가져야 하거든요. 프리미어리그가 끝은 아니잖아요.”
맨유 입단 후 박지성의 실력과 환경뿐만 아니라 인터뷰 솜씨도 수준급으로 올라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친 박지성은 선수들 차량이 주차돼 있는 곳에서 구단으로부터 받은 아우디 A6 4.2 콰트로 S라인을 타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기자의 마음 한켠엔 왠지 모를 자부심이 피어올랐다. 거긴 파주 트레이닝센터가 아닌 맨유의 훈련구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