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정환 선수 | ||
안정환은 아드보카트 감독의 용병술을 히딩크 감독 때처럼 ‘선수 길들이기’ 차원으로 해석했다. 물론 주전으로 뛰었더라면 프랑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은’ 아쉬워도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 것임을 믿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그다.
지령 700호 특집 유럽파 3인방 현지 취재, 그 마지막 편.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힘들게 만났던 안정환과 메스에서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친절한 정환씨’
안정환을 만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과 과정들을 거쳐야 했다. 서울에서 영국 맨체스터, 그리고 토트넘, 다시 맨체스터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갔다가 메스로 향하는 스케줄 끝에 그와 인터뷰를 하게 된 것. 그래서인지 메스 시내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안정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반가움이 ‘오버’돼 덥석 손부터 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메스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소박한 호텔의 커피숍에서 안정환과 마주 앉아 있는 느낌이 서울과는 또 다른 감상을 갖게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탈리아를 제외한 일본 시미즈 S 펄스 시절과 지난 겨울 요코하마가 제주도에 왔을 때 등 유난히 안정환을 쫓아다닌(?) 기억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제가 많이 (인터뷰에) 응한 거죠”라며 농담 섞인 생색을 낸다.
팀이 리그 최하위인 데다 안정환도 프랑스리그에 데뷔하자마자 첫 골을 터트린 후에는 부상 등의 이유로 ‘개점휴업’ 상태라 인터뷰하기 전 내심 걱정을 했는데 의외로 안정환은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J리그에서 전반기를 뛰고 바로 이곳 리그에 참가를 해서 그런지 좀 무리가 온 것 같아요. 그런데 팀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 이틀 쉬고 바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심한 부상은 아니고 허벅지에 약간 문제가 있는 거라 크게 어렵진 않아요.”
메스는 이번 시즌에 감독을 교체한 데다 선수들도 새얼굴이 많아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기를 거쳐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었다. 한 가지 부러운 게 있었다면 비록 팀 성적이 바닥을 헤매도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메스 시내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축제 분위기이고 경기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꽉꽉 들어찬다는 사실이다.
▲ 그림 같은 메스의 고성 앞에서 안정환과 기자가 함께했다. | ||
한국축구대표팀에서 안정환처럼 많은 리그를 접해본 선수도 없다.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지금의 프랑스까지, 그의 축구 인생은 외국 생활의 연속이다. 메스와 1년 계약을 맺은 안정환은 독일 월드컵 이후 또 다른 리그로의 도전을 꿈꾸고 있다. 왜 그렇게 다양한 리그를 접해보려 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전 축구를 통한 비즈니스를 꿈꾸고 있죠. 그래서 리그를 많이 알수록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뭐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스페인리그를 가기 위해 여러 리그를 거친 듯한 느낌이에요. 어휴, 그러고 보니 언어도 다양해지네. 이탈리아어, 일어, 프랑스어에다 미래의 일이지만 스페인어까지. 왜 영어권 나라에는 안 끌리는지 몰라요.”
안정환한테 이탈리아 세리에A 경험은 외국 생활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훨씬 많은 기억을 갖게 한다. 빅리그인 데다 ‘싸움꾼’ 기질이 다분한 거칠고 과격한 이탈리아 축구에 적응하느라 많은 시간 동안 힘들게 보내며 속앓이를 했기 때문이다.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어요. 우리보다 월등히 잘하는 선수들이 모인 리그였고 그동안 제가 몰랐던 축구의 재미와 쓰라림도 있었거든요. ‘이게 바로 세계 축구구나’ 하는 걸 깨달았는데 2002월드컵때 이탈리아와 맞붙는 바람에 이후 맘고생 좀 할 수밖에 없었죠.”
일본 J리그는 안정환이 원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페루지아와 원 소속팀이었던 현대산업개발이 선수 소유권 다툼을 벌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엄청난 이적료가 붙었고 그 이적료에 발이 묶여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던 ‘아픈 추억’이 있다.
골 내기 어려운 프랑스리그
처음 프랑스리그를 선택할 때만 해도 이탈리아리그보단 한 수 아래일 것으로 짐작했단다. 그러나 그 생각이 판단 착오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흑인 선수들이 많아요. 그래서 스피드와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여러 팀을 거쳤지만 흑인 선수랑 한 팀에서 생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같이 지낼수록 그들의 탁월한 신체조건과 파이팅이 너무 부러워요.”
갑자기 기자가 묵었던 한국 민박집 주인의 멘트가 생각났다. 안정환이 프랑스리그를 선택한 건 잘못된 거라는 지적이었다. 왜냐하면 흑인들이 대부분인 프랑스리그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펼치고 있는 부분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설명이었다.
“물론 그분 말씀도 맞아요.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일이죠. 물론 미리 알고 온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그렇다면 그걸 극복하고 이겨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여긴 골이 잘 안 터져요. 현재 리그 득점왕도 4골 넣은 게 전부예요. 1-0으로 이기는 것도 버거울 만큼 골이 인색하죠.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시즌을 치르다 보면 한두 번 골이 연달아 터지는 타이밍이 찾아온단다. ‘뭔가가 터진다’는 느낌이 들면 연속골도 나오고 쐐기골도 터지는 상황들이 연출된다는 것. 안정환은 그 ‘타이밍’이 하루 빨리 찾아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여곡절 인생사
안정환만큼 굴곡 많은 인생을 엮어온 선수도 드물다. 비밀 아닌 비밀이 된 출생 스토리, 사연 많은 성장과정, 그리고 안정환을 가장 힘들게 했던 어머니 문제, 또 ‘지원군’이자 ‘행복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아내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사실 등 그의 인생은 ‘노출’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왜 저한테 유독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어요. 귀찮고 성가실 때가 많았어요. 조용히 있고 싶은데 매스컴에선 전 결코 자유롭게 놔 주질 않았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제가 숨기고 싶은 개인사까지 모두 공개가 된 터라 이젠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거죠.”
▲ 이탈리아 페루지아, 일본 시미즈 S 펄즈와 요코하마를 거친 안정환은 최근 프랑스리그 FC메스에 합류했다. 맨위 사진은 지난 10월1일 안정환이 보르도와의 경기에서 뛰는 모습. 로이터/뉴시스 | ||
“축구선수치고 좀 예쁘장하게 생겨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젠 저도 많이 늙었죠. ‘테리우스’ 때의 안정환이 아니니까요. 물론 어렸을 때는 제가 최곤 줄 알았어요. 절 좋아하는 팬들도 많았고 여자들도 많이 따랐어요. 다 옛날 얘기일 뿐이에요. 지금도 그런 생각에 빠져있으면 제가 바보게요?”
안정환한테 이전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가 아들한테 가장 미안한 일이 안정환처럼 잘생긴 얼굴로 낳지 못한 거라고 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자 안정환이 이렇게 반박(?)한다.
“다 가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지성이는 다른 선수가 모두 부러워할 만한 세계 명문 클럽에서 뛰고 있는데요 뭘. 아버님이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외모에다 실력까지 다 갖췄음 축구 안 하게요? 아 참, 베컴이 있지. 하하.”
어린 주영·지성 부러워
이야기는 어느덧 대표팀 얘기로 흘렀다. 박주영, 이동국 등 쟁쟁한 후배들과 주전 경쟁을 벌이는 현실에 대해 안정환의 생각이 궁금했다.
“제가 신인 때 황선홍, 최용수 선배들도 저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거예요. 마찬가지죠 저도. 주전이냐 아니냐에 집착하고 기분 나빠하면 자신만 손해예요. 물론 제가 소화할 수 있는 경기인데도 안 뛰게 하면 화가 나죠. 감독한테 어필도 하고 싸우기도 해야죠. 하지만 얽매이진 않고 싶어요.”
안정환은 박주영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선수인 건 분명해요. 그러나 앞으로 더 중요한 건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여야 한다는 사실이죠. 골 넣은 걸로만 주목받기보단 팀 공헌도로 더 주목받는 선수였음 좋겠어요. 그래야 외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죠.”
안정환은 어렸을 때만 해도 서른 살이 되면 축구를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나이 먹어서 후배들한테 욕 먹으면서까지 운동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바뀌었다. 아직 못 다 이룬 꿈 때문이다.
“좀 더 어렸을 때 2002월드컵을 치렀다면 더 좋은 리그에서 뛰었겠죠? 아쉬움이 많아요. 나이에 대해서. 그래서 (박)주영이나 (박)지성이가 부러운가 봐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홍)명보 형이나 (황)선홍이 형을 떠올려요. 그분들은 절 부러워할 게 틀림없으니까 하하.”
2006독일월드컵은 안정환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대표팀의 희망이자 자신의 갈망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안정환은 메스역을 향하는 취재진을 따라 나섰다. 직접 배웅하겠다면서. 20여 분 걷는 동안 한 남자한테 꽂히는 프랑스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영표, 박지성을 거쳐 안정환까지 잇는 유럽파 3인방 현지 인터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프랑스 메스=이영미 기자 bom@ilyo.co.kr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