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원은 귀국하자마자 미용실에서 퍼머를 했다고 한다. 어째 좀 젊어보이려나?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 그가 한국도 아닌 오스트리아 축구계에서 ‘일’을 내고 말았다. 지난 15일, 오스트리아의 유력 일간지 <쿠리어>가 서정원을 ‘올해의 최고 선수’로 선정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1부리그 10개팀에 속한 선수 3백여 명 가운데 최우수 선수라는 의미나 다름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포츠 전문 일간지인 <스포르트보치>는 전 선수의 평점을 매겼는데 서정원이 1위를 차지했다. 오스트리아에 발을 내디딘 지 10여 개월 만에 이룬 업적이다.
막연히 상상한 것보다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훨씬 더 큰 파장과 영향력을 행사하며 빅 스타로 자리매김한 서정원을 만나본다.
오스트리아의 ‘세오’ 열풍:::::
“선수는 나이 삼십 줄에 들어서면 은퇴 압력에 시달리게 돼요. 저도 5년 전부터 구단과 연봉 계약할 때마다 은퇴할 생각 없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은퇴가 아닌 밀퇴죠. 그렇게 제 축구 인생이 마무리되는 게 싫어서 오스트리아로 갔던 거예요. 한국을 떠날 땐 막연하고 막막했었는데 욕심 없이 선택한 기회가 이렇게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될 줄 몰랐어요.”
올 초 매스컴의 관심에서 비켜간 채 조용히 오스트리아로 출국했던 서정원은 첫 팀인 잘츠부르크에서 지난 6월 SV리트로 옮겨갔다. SV리트는 지난 시즌 2부리그에서 올라온 하위권 팀이라 2부리그 강등만은 막겠다는 게 올시즌 목표였다. 그러나 서정원의 합류로 SV리트는 강등은 커녕 상위권 진입을 노리게 됐고 7천여명 규모의 전용 구장은 ‘세오’를 부르는 함성으로 넘쳐 났다. 서정원은 이번 시즌에서 7골을 넣어 리그 득점 순위 5위에 올랐다.
“많은 분들이 한국에선 힘들어 하다가 오스트리아에서 펄펄 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 보세요. 다른 건 없어요. 많이 뛰게 해주니까, 이전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리듬을 찾게 됐어요. 한국에선 출전 기회가 불규칙했거든요. 그러면 경기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서정원의 아내 윤효진씨는 남편의 오스트리아 데뷔전 장면을 잊지 못한다. 팀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에 입장하는 서정원의 모습이 마치 어른들 속에 끼어 있는 중학생으로 비쳐질 만큼 키와 체격 차이가 엄청났던 것이다.
“그런데 제 작은 체격이 오스트리아 팬들한테 좋은 이미지로 어필이 된 것 같아요. 처음엔 전혀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작고 왜소해 보이는 선수가 장신들의 숲을 헤집고 다니며 골을 몰고 다니는 모습에 반했다고 하더라구요. 골도 마음먹은 대로 들어갔어요. 넣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꼭 골이 들어갔으니까. 오스트리아랑 남다른 인연이 있나 봐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마음가짐이 축구를 편하게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나이 많은 노장 선수의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지 않는 언론의 분위기가 오히려 서정원을 덜 부담스럽게 했다고 한다. 이영표, 박지성 등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선수들한테 모든 시선들이 쏠려있는 동안 서정원은 오스트리아에서 자신의 진가를 알리며 경기장에 태극기가 하나 둘씩 늘어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의 희로애락:::::
서정원의 해외 진출은 98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입단이 처음이었다. 출발이 너무 좋았다. 데뷔전에서 첫 골을 터트리며 스트라스부르 홈팬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세오’ 열풍의 출발은 프랑스였다. 팬들은 비록 태극기의 문양이 틀리긴 해도 집에서 저마다 태극기를 그려오는 정성을 내보이며 축구장을 태극기 물결로 수놓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연간회원 모집 광고를 하는데 그때 그 광고 모델이 바로 저였어요. 엄청난 크기의 광고판에 제 얼굴이 실리니까 기분 참 묘하데요. 참으로 짜릿한 시간들이었어요. 스트라스부르랑 4년 계약이었으니까 잘만 한다면 빅리그 진출도 시도해 볼 수 있었죠. 그런데 감독이 바뀌면서 완전히 제 인생이 달라졌어요.”
스트라스부르는 르네 제라드 감독을 내보내고 세네갈 전 대표팀 감독을 새 감독으로 맞아 들였다. 그런데 새 감독이 아프리카에서 선수들을 데려오면서 팀 전체가 물갈이 됐다. 이전의 주전들 중에서 생존자는 프랑스 출신의 선수와 서정원뿐이었다. 과도기를 맞이한 스트라스부르는 조금씩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서정원은 출장 시간보다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 소속팀인 오스트리아 SV리트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서정원의 경기 모습. | ||
서정원은 스트라스부르 시절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었던 르네 제라드 감독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현재 르네 제라드 감독은 프랑스축구협회 소속인데 이번 독일월드컵에서 한국팀이 프랑스와 같은 조에 편성된 터라 서정원은 ‘스승’한테 프랑스대표팀의 정보 좀 얻어야겠다며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대표팀 복귀에 대해:::::
오스트리아에서의 맹활약으로 인해 축구팬들은 서정원을 대표팀에 복귀시켜야 한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이에 대해 서정원은 참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풀어간다.
“오스트리아 기자들은 제가 당연히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걸로 알아요. 인터뷰 때마다 ‘6월에 어떻게 할 거냐’며 묻곤 하거든요. 솔직히 대표팀에 대해선 욕심이 없어요. 전 물 흐르듯이 살고 싶어요. 현재에 만족하면서. 그러나 대표팀에 정말 절 필요로 한다면 안 갈 이유는 없죠.”
서정원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첫 출전하며 월드컵과의 인연을 맺어했다. 94미국월드컵 때는 조별예선 스페인전에서 동점골도 터트렸다. 그러나 98프랑스월드컵 때부터 순조로울 것 같았던 월드컵과의 인연이 꼬이기 시작했다. 대표팀이 본선 무대에 오르기 위해 프랑스로 출국하기 직전 가족들과 하루를 보냈다가 그만 수두에 걸려온 것. 선수들과 격리된 생활을 하며 훈련조차 할 수 없었던 서정원이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기란 만무했다.
2002년월드컵 때는 2000년에 당한 십자인대파열과 수술, 그리고 재활로 이어진 기나긴 시간 동안 서정원은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다 2002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선수가 아닌 해설자로 광주월드컵경기장에 나갔다. 당시 서정원은 마이크 대신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서 뛰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느라 무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인터넷을 보면서 참 많이 행복했어요. 아직도 절 잊지 못한 팬들이 많다는 사실 때문이죠. 나이가 많은 것과 체력이 떨어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뛰는 경기에 독일 분데스리가 스카우트들이 몰려오는 것이겠죠. 그들은 늙은 사람 보러오는 거 아닐 거예요. 선수를 보러 오는 거지.”
유럽파 후배들에게:::::
해외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유럽에서 뛰는 후배들의 근황을 저절로 챙길 수밖에 없나보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안정환 등 서정원은 후배들에 대한 걱정을 잊지 못했다.
“(안)정환이가 제일 힘들 거예요. 프랑스리그가 만만치 않거든요. 심적 부담을 털고 편하게 운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박)지성이는 골을 터트리는 게 중요해요. 첫골이 터지지 않으면 아무래도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골이 나와야 자신감도 생기는 것이고. (이)영표와 (설)기현이는 워낙 성실한 선수라 별로 걱정 안 해요. 축구선수로 성공하려면 인성이 좋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축구도 잘 해요.”
서정원은 내년 5월까지 SV리트와의 계약이 끝나면 1년 정도 더 현역을 뛰다가 3년 정도 유럽에서 축구 유학을 계획중이다. 유럽리그만 보러 다니는 축구 유학이 아니라 유럽 축구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배울 생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3년 동안 대표팀 코치 제의가 와도 오시면 안돼요. 공부 다 마치고 들어오세요.”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