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현대 복귀 후 K리그 우승을 이끈 이천수. 나이를 먹은 탓일까 시련을 겪은 탓일가. 그는 예전의 ‘천방지축’이 아니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5일, 새해 처음 시작하는 팀 훈련에 합류한 이천수(25·울산 현대)를 만났다.
―지난 연말 K-리그 최고의 상인 MVP를 수상했다. 막판까지 박주영과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수상해서 그런지 이천수란 이름이 호명됐을 때 눈물을 보이더라.
▲MVP는 쉽게 받을 수 있는 상도 아니고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상도 아니다. 우승팀에서 MVP가 나오는 게 관례였지만 이번에는 (박)주영이가 시즌 초·중반 강한 신드롬을 일으키는 바람에 발표하기 전까지 수상을 장담할 수 없었다. 스페인에서 힘들게 귀국한 뒤 초기에 시련을 많이 겪었는데 결국 마지막에 웃게 된 것 같아 가슴이 복받쳤다. 나도 이런 상을 받을 수 있구나 싶어 참으로 행복했다.
―스페인에서 적응 실패로 국내 U턴 뒤 이전의 기량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떻게 보면 스페인에서 경기 출장하지 못했을 때보다 더 힘든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작년 2월 친정팀 울산으로 돌아온 데다 병역 혜택으로 받은 4주간의 군사훈련 뒤 재기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4개월가량 경기에 뛰지 못했던 것 같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못하고 있으니까 말들이 많았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분이 ‘은퇴했냐’고 물어보더라.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천수는 자신의 축구 인생 중 그때가 ‘바닥’이었다고 회상했다. 경기장에 가도 자신의 존재가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이천수도 이렇게 사라지는 구나’하고 생각하면 목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국내 복귀를 결정하기 전에 다른 유럽 리그 진출은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충분히 다른 팀에 갈 수 있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중하위권팀에서도 콜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고민은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유럽팀으로 옮겨갔을 때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스페인에서 벤치 신세로 전락하며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라 나도 날 장담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월드컵은 다가오고 대표팀에선 신임을 못 얻고 클럽에서도 그렇고…. 그럴 바엔 빨리 한국으로 들어가 자리 잡은 뒤 다시 한번 경쟁 구도로 가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난 요즘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언론에서 관심을 표해주고 그래야 힘을 받는다. 시끄럽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가야 내 것을 찾는다.
―축구선수 중에서 유난히 안티 팬이 많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말이 앞선다, 말로 축구하는 게 아니다’라는 지적들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난 뱉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뱉어놓고 목표를 찾아가는 스타일이다. 절대 입으로만 축구하는 선수가 아니다. 일단 말을 해놓고 그렇게 되기 위해 죽기살기로 덤벼든다. 올 초에도 울산 복귀 후 울산현대가 우승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수원삼성이 독주할 때였다. 결과를 봐라. 울산이 우승하지 않았나.
―이천수가 ‘바닥’을 헤맬 때 박주영과 박지성이 상승가도를 내달렸다. 각각 인연이 있는 후배고 선배인데 그들의 플레이와 상승세를 보며 어떤 느낌표를 가졌나.
▲완전 자극이었다. 주영이의 인기, 아니 ‘박주영 신드롬’은 2002월드컵 때 (김)남일이 형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지성이 형도 처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란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할 때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라며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정말 맨유를 가더라. 지난해에는 두 선수가 날 울리기도 했고 죽이기도 했으며 또 날 살리기도 했다.
이천수는 박주영과 박지성이 국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을 때 한없이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짐을 절감했다고 한다. 순간 부럽기도 했고 자신이 그 주인공이 못 되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은 법. 이천수한테는 2006년이 기다리고 있다.
▲ 지난해 7월21일 레알 소시에다드 소속으로 피스컵 경기에 출전했던 이천수.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 한다. 사진제공=세계일보 | ||
▲2002년에는 뭣도 모른 채 월드컵이 지나갔다. 당시에는 어렸고 미숙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난 혼자 축구를 한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듣질 않았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경험과 경력이 쌓이면서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자제와 친절도 배웠다. 주위에서 ‘친절한 천수씨’라고 부르는 게 다 이유가 있다. 나도 언젠가는 ‘착하다’는 얘기 좀 듣고 싶다.
20대 초반의 ‘천방지축 이천수’에서 20대 중반인 지금은 ‘친절한 천수씨’로 불리길 소원한다는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이천수도 같이 웃었다. 그런데 장난스런 웃음이 결코 아니었다. 이천수는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모두 ‘내 탓’이라고 시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그 이미지를 좋은 쪽으로 바꿔놓고 싶다고 의욕을 다졌다. 어른스러웠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첼시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게 또 다시 네티즌들로부터 따가운 지적을 받았다.
▲그 얘기를 하면서도 안티 팬들의 반응을 걱정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러나 난 내가 지금 당장 첼시에 가서 뛴다는 게 아니라 앞으로 그걸 목표로 두고 열심히 공을 차보겠다는 각오를 밝힌 거였다. 목표를 말한 게 잘못은 아니지 않나.
―2002년 월드컵 이후 해외 진출이 급물살을 탈 때 여러 팀의 ‘러브콜’ 중 결국 스페인 레알 소시에다드로 결정했다. 그 선택에 후회는 안 했나.
▲지성이 형을 보면서 히딩크 감독이 에인트호벤으로 오라고 할 때 가지 못한 게 아쉽고 안타까운 적이 있었다. 이건 내 의지보다 이적료 부문에서 구단과 구단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못해 불발된 거라 더더욱 아쉽다. 만약 내가 지성이 형이랑 같은 팀에서 뛰었다면 지금쯤 내 모습이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거의 성사 단계까지 갔던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사우스햄프턴건이다. 이것도 역시 이적료가 걸림돌이 됐는데 내가 지성이 형이나 영표 형보다 먼저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혼자 있을 때 가끔씩 상상해보는 ‘놀이’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여자친구인 탤런트 김지유씨(본명 김민경)와의 교제를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이유가 있다면.
▲(기자도)잘 알다시피 여자 문제가 좀 복잡했었다. 대부분 만났던 여자들이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민경이는 이전에 만났던 여자들과는 다른 느낌을 줬다. 어른들 말씀에 결혼할 여자와 연애하는 여자는 다르다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더라. 민경이는 결혼할 여자다. 그래서 이슈된 자리에 동행을 했던 것이다.
―운동선수가 연예인을 만나는 부분에 대해 아직까지 선입견이 있다.
▲난 민경이를 연예인이라서 만난 게 절대 아니다. 나한테는 ‘여자’로만 보였다. 미스코리아도, 연예인이라는 타이틀도 없었다. 자신의 직업을 티 내지 않고 굉장히 예의바르고 어른들한테 싹싹하게 대하며 어떤 상황에도 적응을 잘한다. 그 점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이천수와 김지유를 사석에서 만난 한 기자에 따르면 두 사람이 반드시 결혼할 것 같다는 소감을 전한 바 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사랑이 견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김지유는 올 봄에 시작되는 드라마에 출연할 예정인데 이천수는 여자친구의 직업을 위해 당분간은 ‘이천수의 여자’라는 이미지를 없애 주려고 노력중이란다.
―다시 대표팀 얘기로 돌아가보자. 현재 공격수 자리의 경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다. 나름대로의 생존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자신감이다. 난 할 수 있다. 이천수의 꿈은 이뤄진다는 자신감 말이다. (설)기현이 형, 지성이 형, (차)두리 형, 주영이, 모두 붙어볼 것이다. 그런데 이길 자신이 있다.
―한국이 속한 G조에 대해 평가를 한다면.
▲2002년 때랑 조편성이 비슷한 것 같다. 유럽 두 팀도 그렇고 월드컵 경험이 적은 미국과 토고도 그렇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유럽팀은 별로 걱정 안 된다. 난 토고가 복병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흑인들과의 경기는 무척 힘들다. 토고가 이번 월드컵에서 바람을 일으킬 것 같다.
이천수는 한국이 조별 예선만 통과하면 2002년 월드컵과 비슷한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누나, 월드컵은 말이야, 경험 있고 당돌한 선수를 데려가야 해. 들이댈 줄 아는 선수를 데려가야 팀 분위기도 살고 기 죽지도 않고. 그렇지 않아? 원정경기와 홈경기는 천지 차이거든.”
당돌하고 들이댈 줄 아는 ‘친절한 천수씨’는 오는 15일 대표팀 해외전지훈련 대장도에 오른다. 이천수는 남은 시간 동안 ‘바짝’ 몸 만들기에 ‘올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