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현수가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1천5백m와 1천m에서 2관왕에 올랐다. 사진은 지난 12일 1천5백m 결승에서 선두에 나서는 모습. 로이터/뉴시스 | ||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천5백m와 1천m에서 금메달을 획득, 2관왕에 오른 안현수(21·한체대)의 주가가 폭등하고 있다. 일찍이 쇼트트랙에 데뷔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김동성이 은퇴한 이후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다 급기야 생애 첫 금메달에 이어 1천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거는 감격의 순간을 만끽하게 됐다.
특히 19일(한국시간) 거둔 금메달은 4년 전 한국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줬던 아폴로 안톤 오노를 꺾고 이룬 것이라 더욱 의미가 컸다. 스물 한살의 나이에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스타로 성장한 안현수와 지난 15일 국제전화로 인터뷰를 나눴다.
#자신감 업그레이드
한국시간으론 15일 저녁 6시40분. 토리노 현지에선 1천m 예선전을 앞둔 16일 오전 10시40분이었다. 올림픽 선수촌 식당으로 밥 먹으러 왔다고 말하는 안현수의 목소리는 경쾌하다 못해 튀어 나갈 정도였다. 상당히 자신감에 차 있는 듯했다. 4년 전 앳된 얼굴로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모습과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 차이가 뭘까.
“아무래도 나이 먹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하하 4년 동안 갈고 닦은 경험과 노하우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이번 대회에선 모든 게 다 여유가 있어요. 마음도 편하구요. 그래서 좋은 결과도 나온 것 같아요.”
스물한 살밖에 안 된 어린 친구가 나이 운운하는 게 재미있었지만 안현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긴장과 떨림, 두려움 등의 단어들이 자취를 감춘 건 아니다. 안현수는 토리노 올림픽 첫 출전이었던 1천5백m를 앞두고 아버지 안기원씨에게 전화를 걸어선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저 너무 부담돼요. 내일 오노랑 붙을 것 같은데 만약 이번에도 메달을 따지 못하면 난리 나겠죠?”
그 얘기를 전하면서 안현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든든한 조언을 해주셨어요. 나뿐만 아니라 오노도 똑같이 부담을 느낄 거라구요. 그런 부담 대신 누가 마음을 편히 갖고 레이스를 펼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어요. 그 말씀이 큰 힘이 됐어요.”
#어딜 가도 ‘오노…오노…’
2002년 동계올림픽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벌어진 1천m 결승에서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에 휘말려 아깝게 금메달을 내줬던 한국 선수단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오노란 선수한테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였다. 특히 김동성의 바통을 이어받은 안현수는 더더욱 힘들었다. 국제대회만 나가면 자연스레 오노와의 관계가 라이벌로 부각되었고 오노한테 지면 ‘역적’이나 다름없는 국민들의 반미 감정도 엄청난 부담으로 어깨를 짓눌렀다.
“저, 오노랑 괜찮게 지내거든요? 그런데 매스컴에서 자꾸 라이벌이라고 부추기니까 어색해져요. 더 이상 오노와의 관계는 부각되지 않기를 바래요. 오노 말고도 넘어야 할 ‘벽’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안현수는 19일 벌어진 1천m 준준결승과 준결승, 결승에서도 오노와 함께 레이스를 펼쳐 모두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4년 전 한국 국민들의 ‘한’이 완전히 해소됐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번 동계올림픽 말고도 쇼트트랙 월드컵대회에서 안현수는 여러 차례 오노를 물리쳤다. 2002년 12월 월드컵대회 3천m에서 오노를 꺾고 정상에 올랐고 2004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동갑내기 여자친구
안현수의 금메달 획득과 함께 갑자기 인터넷 검색어 1순위에 뜬 이름이 있다. 바로 안현수의 여자친구로 알려진 신단비양이다. 같은 한체대생으로 동갑내기 커플이다. 신양은 이미 지난 10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안현수와 사귀고 있음을 밝힌 적이 있는데 이번 동계올림픽으로 인해 갑자기 유명 인사가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안현수는 걱정부터 앞세웠다.
“단비랑은 친구 사이예요.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유승민 선수가 올림픽 이후 여자 친구가 공개된 이후 헤어졌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여자친구 문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혼요? 에이 지금 제 나이가 스물한 살인데 아직 멀었죠. 예쁘게 사귀고 싶어요. 전 연예인이 아니니까 그냥 여기서 (관심을) 멈춰주셨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신단비양의 사진까지 공개되면서 신양의 개인 홈페이지는 하루 평균 수천 명의 방문자가 찾을 만큼 관심 폭발 상태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보다도 안현수에게 피해가 갈 것을 더 크게 걱정했다(박스 기사 참조).
#파벌싸움에 은퇴 고민
한국 쇼트트랙은 몇 년 동안 코치 인선과 구타 문제, 파벌 싸움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 가운데서 가장 마음 고생을 한 사람이 선수들이다. 안현수도 마찬가지다. 운동만 하기에도 빠듯한 일정인데 어른들의 ‘계산법’에 따라 하루 아침에 코칭스태프가 바뀌고 뒷말과 흠집내기가 계속되는 과정들이 운동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지난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아버지랑 상의 끝에 운동을 그만둘 생각도 했었죠. 외국 가서 못다 한 공부나 하려고 마음도 먹었어요. 그러다 전명규 교수님(한체대)의 강한 만류로 실행에 못 옮겼죠. 그때 잘 참았던 것 같아요. 그런 시련 끝에 지금의 행복도 있는 거니까.”
98년 IMF로 외환 위기를 겪었을 때 자영업을 하던 아버지 안기원씨는 5억원 정도의 부도를 맞았다. 회생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3남 1녀 중 장남인 안현수를 더 이상 뒷바라지할 만한 능력도 없었다. 당시 아버지 안씨는 큰아들을 불러 놓고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현수야, 운동 말고 공부할 생각이 없니? 남자가 공부로 성공해야지 운동은 미래가 불투명하잖아.”
당시 막 쇼트트랙의 재미를 느끼던 초등학교 5학년 안현수는 아버지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업이 어려워졌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상태라 막무가내로 스케이트를 타게 해달라고 조를 수밖에 없었던 것. 안씨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면서도 빙상 뒷바라지를 포기하지 못했다.
#노현정 아나운서 좋다구?
으레 유명인이 되면 그 사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기사 톤이나 헤드라인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안현수도 이번에 그 사실을 절감했다고 한다.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1천5백m 금메달 획득 후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을 물어봤다. 마땅히 떠오른 사람이 없어 고민하던 안현수는 그 아나운서가 ‘샘플’로 여자 연예인 이름을 나열하다가 노현정 아나운서 이름이 나오자 그냥 ‘찜’했다는 것. 그래서 안현수는 노현정 아나운서를 좋아하는 걸로 알려졌고 그 이후 그 내용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안현수는 1천5백m 결승에서 이호석과 마지막까지 레이스 경쟁을 펼치다가 막판 스퍼트를 앞두고 이호석이 양보한 것 아니냐는 일부 시각에 대해서도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호석이가 저한테 금메달을 양보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제대로 경기를 보셨는지 묻고 싶어요. 일반 팬들은 몰라도 선수들은 잘 알 겁니다. 호석이가 양보를 한 것인지 제가 금메달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를.”
안현수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까지 선수로 활약하다가 멋지게 은퇴한 뒤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