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일 앙골라전에서 박주영이 상대 수비수들을 뚫고 드리블 하고 있다. 박주영은 이날 결승골을 터뜨려 자신의 ‘위기론’을 잠재웠다.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이번 대장정을 통해 대부분 베스트 11의 윤곽이 밝혀졌다고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해외파들이 빠진 것이라 절반의 실험이라고 하겠지만 어차피 아드보카트 감독은 처음부터 각 포지션별로 해외파의 추후 가세를 감안해 퍼즐을 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과거 히딩크 감독이 오자마자 시달린 주문은 왜 빨리 베스트 11을 조기 확정하여 수험 준비에 들어가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축구계나 언론의 감각이 상당히 떨어져 있을 때라 옛날처럼 똘똘한 놈들만 빨리 뽑아 담금질만 시키면 되는 것으로 이해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다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은 계속된다는 히딩크 감독의 표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상당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어느 나라나 월드컵 개최 직전까지 시즌 중에 가장 뛰어난 선수들을 대표팀에 부르도록 돼 있다. 지단이나 호나우디뉴 정도가 월드컵 직전의 시즌에 좀 시원찮다고 해서 빠지는 경우는 없지만 웬만큼 유럽에서 이름을 날린다는 선수들도 부상을 당했거나 제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가차 없이 제외시키는 것이 관례다.
74년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였던 서독의 균터 네처는 헬무트 쉔 감독과의 불화로 월드컵 대회에 불참했다. 그러나 서독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92년 유럽컵 당시 덴마크는 미햐엘 라우드럽을 제쳐 놓고도 화란(네덜란드), 독일을 격파하고 신데렐라 우승을 낚아챘다. 98년 에메 자케는 90년대 프랑스 최고, 아니 유럽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알려진 칸토나와 지놀라를 빼고도 사상 초유의 우승을 이룩했다. 너무나 완벽했던 스타플레이어 없이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했던 기록은 부지기수로 있다.
팀워크와 선수 개개인의 상태에 따라 월드컵 대표팀의 모양새는 크게 달라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선수들 사이의 경쟁이 지속된다는 것은 어느 참가 국가나 매한가지다. 개최국 독일도 사정이 비슷하다. 클린스만 감독은 바이에른 뮌헨의 올리버 칸과 아스날의 옌스 레에만을 대표팀 골키퍼로 번갈아 기용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팬들의 끊임없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도르트문트의 노장 수비수 크리스티안 뵈른스는 자신이 대표팀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데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고 있지만 클린스만과 수석코치 뢰프는 뵈른스가 동료선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팀워크상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뵈른스를 다시 기용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2002 월드컵의 수훈갑 수비수 멧첼더와 공격수 클로제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엔트리를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다. 클린스만은 독일의 베스트 11은 월드컵 직전 확정짓겠다는 점을 거듭 천명했다.
자, 이쯤 되면 지난 41일간의 한국대표팀 전지훈련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드보카트 감독이 국내 리그의 일정에 영향을 주면서까지 대표팀의 소집을 강조하는 것은 K-리그가 유럽의 메이저리그 같은 경쟁력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 히딩크식의 집중 수험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당면 문제는 해외파와 국내파의 기량 비교라는 측면으로 좁혀졌다. 단 한 번이라도 벤치를 지키게 되면 ‘박주영 어떡하나’ 등의 탄식이 나올 정도로 생각보다 선수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경쟁에 의한 스트레스로 플레이가 제대로 안된다면 문제지만 이제 우리는 히딩크 감독이 신경질적으로 강조했던 ‘한 포지션, 두 명의 후보’라는 공식을 입버릇처럼 외우면서 100일 뒤의 대회를 준비하는 성숙함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이 지난 2001~2002년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점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특히 유럽의 경우 일류 스타플레이어들의 부진과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대표팀의 전력에 차질을 초래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스타플레이어가 빠진 대표팀은 다소 김이 빠져 보여 재미가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타만으로 대표팀의 전력이 극대화되는 것은 아니다. 88년 유럽컵을 석권한 네덜란드는 일찌감치 90년 월드컵의 우승후보 1순위로 지목되면서 유명 선수들의 시건방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수 선발과 포메이션, 기본 전술에까지 감독의 영역에 침범하는 스타급 선수들 때문에 팀의 사기는 그야말로 개판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극히 저조한 성적으로 조 예선을 통과한 후 16강전에서 독일에게 패배, 생각보다 일찍 보따리를 쌌다.
피천득이라는 소설가가 쓴 단편에 보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내는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논한 대목이 있다. 축구는 11명이 한다. 호나우두급의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들 11명이 한 팀을 구성한다고 해서 세계를 제패하리란 보장은 없다. 문제는 밸런스다. 수비와 미드필더, 그리고 공격진, 거기에다가 필살기 한 방을 갖고 있는 탄탄한 벤치 멤버가 있을 때 팀은 최상의 전력을 시현한다.
히딩크 감독 이래 우리나라 축구계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던 장유유서와 연공서열의 전통은 사라졌다. 분데스리가의 안정환이나 차두리, 벨기에의 설기현이 자리를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지금의 분위기는 한국축구 대표팀이 제 자리를 가고 있다는 증표다. 그래서 기쁘다.
2002 한국대표팀 미디어 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