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식 감독 | ||
19일 일본과의 4강전이 벌어지기 직전, 김인식 감독의 30년 지기인 코미디언 배일집 씨를 통해 김 감독의 야구 인생을 되돌아 봤다.
인식이의 미국전 ‘도발’
김인식. 요즘 얘가 날 미치게 한다. 하루 종일 울리고 웃긴다. 어떻게 보면 코미디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대하드라마 같기도 하고. 하여튼 인식이 때문에 며칠 동안 구름 위를 붕붕 떠다니는 듯했다. 촬영이고 뭐고 그냥 야구만 보고 살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예선이 벌어졌던 일본에선 전화도 하고 그러더니 미국으로 가선 일절 전화 한 통 없다. 처음엔 조금 서운했지만 지금은 기다리지도 않는다. 지금 나한테 전화 걸 여유나 있겠나.
한국팀의 모든 경기가 드라마틱했지만 난 미국전에서 최희섭이 3점 홈런 쳤을 때를 잊지 못하겠다. 처음에 최희섭을 엔트리에서 뺐을 때만 해도 무슨 꿍꿍이가 있구나 싶었는데 막상 기회가 오니까 과감히 최희섭을 대타로 기용하는 배짱은 인식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도발’이다. 그런데 마치 점쟁이가 예언한 것처럼 최희섭이가 홈런을 치지 않았나. 그것도 3점 홈런을 말이다. 이 순간 난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으~악! 인식이 이×, 개×야. 야 니가 사람 완죤히 죽이는 구나”하며 펄쩍펄쩍 뛰어 다녔다. 아마 그 장면을 보면서 울지 않은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닐 것이다.
팀 옮길 때마다 따라가서 응원
인식이와 알게 된 건 인식이가 배문고등학교 초대 감독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내 친구가 배문고 교장 아들이라 자연스럽게 인식이를 소개받았고 곧잘 어울렸다. 그런데 만나볼수록 진국이었다. 동갑인데도 마치 형처럼 어른스럽고 점잖은 면면들이 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사람들한테 인식이를 소개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인식이는 친구지만 형님 같은 친구”라고 말이다.
배문고 사령탑을 맡아 의욕적인 출발을 하려 했던 인식이는 팀 성적이 좋지 않자 그만 잘리고 말았다. 난 그때 인식이보다 더 친했던 배문고 교장 아들과 절교를 선언했다. 인식이의 능력이 과소 평가된 부분에 대해 서운했고 대책 없이 물러나게 한 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인식이가 배문고 감독을 그만둔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난 당시 명동의 ‘유토피아’라는 유흥업소에서 사회를 보고 있었다. 그때 인식이가 그곳에 찾아와서는 “일집아, 나 잘렸어!”라고 말하면서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일이 꼬이는지 마침 무대에 오르기로 한 가수가 갑자기 나오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사회자인 내가 무대에 올라 노래로 시간을 때워야 하는데 인식이 말을 듣고 무대에 오르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때 인식이 앞에서 부른 노래가 윤항기의 ‘나는 어떡하라구’였다. 1978년인가 79년의 일이다.
그후 인식이는 상문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나 또한 배문고의 ‘광팬’에서 인식이와 함께 상문고의 ‘광팬’으로 모습을 달리했다. 당시 운현궁에서 TBC 녹화가 있을 때 동대문야구장에서 상문 경기가 열리면 녹화를 미룬 채 야구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가기만 하면 상문이 이겼다. 나중엔 상문 교감 선생이 빅게임이 있을 때는 일부러 전화를 걸어올 정도였다. 경기장에 나와 달라고 말이다.
그후 인식이는 동국대 감독으로 ‘승진’했다. 동국대는 내 모교라 더더욱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인식이가 두산으로 갔을 때는 두산 팬으로, 그리고 지금의 한화로 옮겼을 때는 난 또 다시 한화 유니폼에 반색하며 한화 응원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년 전부터 메이저리그 공부
인식이가 WBC를 통해 미국 야구에 이름을 알리게 됐지만 인식이는 아마추어 감독 때부터 메이저리그 경기를 빼놓지 않고 챙겨 봤다. 아마도 국내 야구 감독 중에서 김인식 만큼 메이저리그를 꿰뚫고 있는 감독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정도다. 어느 야구 해설가는 인식이한테 메이저리그에 대해 따로 수업을 받고 해설을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인식이가 메이저리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는 소리다.
인식이가 배문고에서 잘린 이후 가장 가슴 아파했던 일은 두산 감독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하루는 잠원역 부근의 아지트인 통닭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데 인식이가 이런 말을 꺼냈다. “야, 연락이 없다. 재계약해야 하는데 구단에서 연락이 안 와.” 그 말을 듣고 난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고 나 또한 두산과의 재계약은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전 구단 고위 관계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인식이와 나한테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재계약은 요즘 말로 ‘당연하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배신을 때린 것이다.
▲ 코미디언 배일집 | ||
화려한 이면의 쓸쓸한 사생활
인식이의 사생활은 참으로 별 볼 일 없다. 감독이란 자리가 화려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야구 모자를 벗고 일상에서 만나는 인식이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떻게 보면 기계적인 생활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평소에 돈도 잘 쓰지 않는다. 아니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그 많은 돈 어디다 감춰놨냐고. 그럼 인식이 왈 “몰라 내 월급은 통장으로 들어가니까 마누라가 다 챙기겠지 뭘.”
허구헌날 바깥에서 생활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보니까 가족들과의 관계가 그리 따뜻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아내와는 결혼할 때부터 지금까지 신혼이나 다름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선수단 숙소가 집 같고 집이 숙소 같은 생활을 몇 십 년 동안 지속하다 보면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부부 사이가 조금 더 살갑고 다정했다면 인식이가 갖는 외로움과 쓸쓸함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운동 선수로, 지도자로 가정보다는 야구에 빠져 지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친구 입장에선 인식이가 조금 더 따뜻한 분위기에서 생활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인식이는 요즘 일곱 살 난 손자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간혹 손자 재롱에 넋이 빠져 있는 모습도 보인다. 손자가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인식이의 상실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보단 가족들을 위해 희생을 다했지만 집에선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의 노력과 과정을 잘 몰라주는 것 같아 인식이보단 내가 더 섭섭하다.
그래도 인식이는 밖에선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구에 더 집중할 수 있다며 위안을 삼는다. 두산에서 한화 감독으로 가기 전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다. 집에서 며칠 보내는 동안 무척 힘들어했다.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이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의 ‘쉼표’조차 괴로웠던 것이다. 인식이한테는 집보다는 야구장이 ‘직장’이자 ‘쉼터’이기도 했다.
가끔 게임 끝나고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생맥주 한 잔 앞에 놓고 허허실실하고 있는 인식이를 볼 때마다 연민의 정이 물컹거린다.
2년 전 인식이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진짜 가슴 아팠다. 온전치 않은 의식을 한 채 병실에 누워 있는 인식이를 보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렇게 야구 인생이 끝나 버리면 너무 한이 될 것 같아 내가 더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인식이는 의사들도 포기한 자신의 몸을 피눈물 나는 재활을 통해 제대로 설 수 있고 걸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건 의사가 한 일이 아니었다. 인식이가 이룬 기적이었다.
미국에서 인식이 인기가 장난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녀석 나이 먹어서 출세한다 싶다. 그런데 지금의 스포트라이트가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는 점을 꼭 말해 주고 싶다. 배문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차곡차곡 준비했던 리더십이 만개한 것이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인식이가 조금은 재미 없어졌지만 이번에 귀국하면 발그스레한 뺨에 뽀뽀나 실컷 해줘야겠다. 16일 일본전을 보면서 내가 인식이 친구라는 사실이 ‘가문의 영광’처럼 느껴졌다. 정말 장하다 친구야!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