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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성선수 | ||
박지성의 할아버지이자 박성종 씨의 아버지인 박동래 씨가 유명을 달리했다. 상복을 입은 박 씨는 조문객을 맞으면서도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한이 많은 아버지, 여생을 편히 보내시지 못한 아버지를 떠나 보낸 박 씨는 자신도 아버지란 사실에 새삼 마음이 저며 올 뿐이었다.
3월 17일 새벽,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오후에 나가셔선 소식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기운을 떨치고 줄곧 전화를 기다리며 아침을 맞았다. 지성이가 운동장으로 ‘출근’한 뒤 가볍게 조깅을 하러 나가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혹시나 했는데, 설마 했는데….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눈물이 쏟아졌고 난 지성이 엄마를 찾았다. “여보,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나 어떡해!”
한국으로 가는 10시간의 비행이 10년은 더 되는 듯했다. 비행기 안에서 잠 한숨 못 자고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삶이 너무나 불쌍하고 기구해서, 그래서 자꾸 자꾸 눈물이 났다. 그동안 어디 아프시기라도 했다면 마음의 준비도 했으련만, 이렇게 훌쩍 떠나실 줄은 정말 몰랐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하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던 탓에 아버지의 인생은 참으로 많이 힘들었다. 결국 장남인 난 그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성이가 축구선수로 성장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소됐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장손인 지성이를 끔찍이 여기셨다. 지성이와 관련된 신문 기사는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스크랩하셨고 지성이가 일본에 있을 때는 가끔 현해탄을 건너가 원정 응원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우리가 넉넉한 용돈을 드려도 쓰실 줄을 몰랐다. 지성이가 힘들게 번 돈은 쓸 수 없다는 고집이셨다. 하지만 평생 돈을 써보고 살아보질 않아 돈이 있어도 쓰는 방법을 몰랐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생의 재미라고는 전혀 경험조차 못하신 분이라 이제 좀 살만 해졌을 때 누리지도 못하고 떠나신 게 두고두고 한이 될 것만 같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지성이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걸 보고 가신 점이다. 욕심 같아선 지성이 장가가는 것까지 지켜보셨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축구 선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장손의 모습에 눈을 감으시면서도 분명 흐뭇함을 느끼셨을 거라고 애써 믿어 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이전의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지성이는 부천 정명고등학교로 입학이 예정돼 있었다. 정명고는 축구 명문으로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학교다. 학교 측이나 지성이나 정명고 진학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가 틀어버렸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상상조차 못했던 수원공고로 방향을 정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지성이도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며 항의했지만 난 흔들리지 않았다.
수원공고는 그때까지 우승과는 거리가 아주 먼 학교였다. 반면에 정명은 국가대표 선수들이 여러 명 배출돼 지성이도 잘만 뛰면 태극마크를 노려 볼 수도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하고 정명과 비교조차 안 되는 수원공고를 가려 했으니 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수원공고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는 속담을 믿었기 때문이다. 정명은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아서 지성이가 들어간다고 해도 주전으로 뛰기가 너무 힘들어 보였다. 반면에 수원공고는 지성이가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다. 더욱이 울산 현대를 거쳐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국가대표팀 출신의 이학종 감독이 수원공고에서 처음으로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됐다는 부분이 묘한 끌림을 전해줬다. 이 감독과는 나이도 비슷해서 말이 잘 통했고 이 감독의 능력과 자질을 굳게 믿었던 부분도 내 결심을 굳히게 했다. 그러나 중학교 감독은 입학 동의서를 쉽게 써주지 않았다. 축구부 선수 대부분이 정명과 안양고를 택하는 상황에서 지성이만 수원공고를 간다고 하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어렵게 동의서를 받아 수원공고로 진학을 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내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무모한 선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반대를 했던 일이라 만약 지성이가 잘못되면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비가 자식 망치는 일을 하겠는가. 그런 믿음으로 수원공고에서 지성이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성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두 달도 채 안 돼 내 판단이 잘못됐음을 절감해야만 했다. 축구부의 학부형들과 이상하게 삐걱거리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고 2학년이 돼서는 지성이가 주전으로 뛰는 데 대해 나와 이 감독과의 친분을 의심하며 지성이의 실력을 평가절하했다.
너무 어이가 없었고 계속되는 분란에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결국 지성이가 고3 때 강릉에서 벌어진 축구대회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