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판의 황태자’이태현이 격투기 전향을 선언했다. 하루 12시간씩 훈련하며 몸을 만들고 있는 그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는 듯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전날인 8일, 숱한 갈등과 고심 끝에 프라이드 진출을 선언한 뒤 곧장 대구로 내려와 훈련에 돌입한 이태현(30·팀이지스)은 공식 기자회견 내용으론 성이 안 찬다는 기자에게 자세하고 솔직한 심정을 꺼내 보였다. 여전히 뭔가를 말한다는 게 어렵고 두렵기도 한 현실이지만 프라이드 진출 배경과 과정에 대해 의혹이 들끓는 상황에서 한 번 정도는 ‘마침표’를 찍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최근에 오픈한 대구의 MMA(종합격투기) 전용 체육관에서 이태현을 만났다.
93년 데뷔 후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18회 등 모두 스물한 차례 꽃가마에 오르며 ‘모래판의 황태자’로 군림했던 이태현이다. 그래서인지 이태현의 프라이드 진출설이 나돌 때부터 씨름계에선 최홍만 이상 가는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 있다. 최홍만 때도 그랬지만 이태현 또한 씨름인들의 반응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은 씨름을 배신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씨름계에선 그가 신의를 저버렸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인 것. 이태현의 심경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Q&A로 인터뷰를 정리한다.
―어제(8일) 기자회견에서 프라이드에 진출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지만 좀 더 솔직한 입장을 듣고 싶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태현이 ‘정말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까?’라고 묻고는)이대로 꺼져가는 불빛이 되기 싫었어요. 은퇴를 결정하고 학교 강단에 서는 일을 추진하면서 좀 힘들었어요. 천하장사 이태현은 대우를 받았지만 은퇴한 이태현은 그저 그런 선수 출신이 되더라구요. 이만기 선배처럼 교수가 돼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꿈이었는데 그 단계까지 오르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과 경험들이 필요한 거예요. 화려한 시절이 간다라고 생각하니까 왠지 소외감, 허전함 등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런 즈음에 프라이드에서 강하게 접촉을 해왔고 그들의 제의가 꺼져가는 제 마음의 불씨를 확 지폈습니다.
―제대로 한 번 짚어보자. 은퇴를 결정한 시기와 프라이드에서 접촉해 온 시기가 어떻게 되나.
▲은퇴를 결심한 건 5월 말에서 6월 초예요. 5월 말 쯤에 김칠규 감독님께 먼저 상의를 드렸죠. 그 말씀을 드리기까지 많이 고민했어요. 더 이상 씨름판 생활이 재밌지 않았거든요. 경기에 나가면 전부 모르는 선수들이에요. 프로랑 아마추어랑 싸우는 일이 늘어난 데다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은 모두 은퇴한 상황이라 ‘나 혼자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회의가 들더라구요. 제가 계속 선수 생활을 한다고 해서 씨름이 발전되는 게 아니었어요. 더 이상 할 것도 이룰 것도 없었죠. 그래서 은퇴를 하고 지도자 생활과 강단에 서는 일을 병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소속팀에 은퇴 의사를 밝힐 때만 해도 프라이드 진출은 생각지 않았어요. 순수한 동기로 은퇴를 요청한 거니까요. 그런데 은퇴 의사를 밝히자마자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수십 군데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격투기 관련 종사자들이 있는 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 ‘팀이지스’에 소속돼 이태현과 함께 훈련 중인 선수들. 이들도 조만간 프라이드에 진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 ||
―그렇다면 프라이드 진출을 위해 은퇴를 한 게 아니라는 말인데 은퇴와 프라이드 진출 결정까지 시간이 너무 짧은 거 아닌가.
▲그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고 있어 마음이 아파요. 결정이 어려웠지 그후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거든요. 8일 기자회견을 하기 전날 프라이드 측 관계자들을 만나 최종안을 제시받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어요. 격투기 쪽에서 콜이 들어온 건 2년 전부터였어요. (최)홍만이가 K-1에 진출할 때 저한테도 제의가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을 해왔었죠.
―혹시 후배인 최홍만이 K-1에 진출해 성공가도를 달리는 부분이 프라이드 진출에 영향을 미쳤나.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 사실 홍만이가 K-1 진출을 발표하기 전에 전화를 해왔어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며칠 지나서야 K-1이라는 걸 알았죠. 당시만 해도 안 될 것 같았어요. 홍만이가 영화나 방송 쪽이라면 몰라도 격투기는 어렵다고 느껴졌죠. 그런데 잘 해가더라구요. 이번에 저도 같은 입장이 되면서 홍만이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하구요. 제 상황이 조금 정리되면 홍만이랑 통화 좀 해보려구요.
―이태현 하면 한국 씨름의 대표 선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선수가 일본 격투기에서 활동한다는 게 정서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 점이 가장 힘들었어요. 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도 됐구요. 그러나 일본 격투기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비결과 시스템을 직접 들어가서 배우고 싶었습니다. 한국 씨름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알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 해결책이 없어요. 문제만 나열할 뿐 그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를 않아요. 전 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려구요. 프라이드의 시스템을 직접 체험하면서 세계적인 선수들이 뛸 수 있는 무대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요. 우리 씨름도 프라이드나 K-1처럼 인기 종목으로 자리잡는 게 제 소원이거든요.
▲ 연합뉴스 | ||
▲선수라면, 씨름 선수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면 제 결정을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요. 홍만이가 K-1에 진출했을 때도 전 심정적으로 이해했고 꼭 성공하길 바랐어요. 씨름에서 이뤄줄 수 있는 게 적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결정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어요.
―‘돈’ 때문에 프라이드에 진출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돈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어요. 물론 제 자존심을 세워줄 만한 계약금은 받게 됐지만 그것 때문에 프라이드를 선택한 건 아닙니다. 씨름할 때 연봉이 2억 원 가까이 오른 적도 있어요. 실업팀이 8팀 정도 됐을 때의 일이지만요. 그래도 연봉과 우승 상금 등을 합치면 적은 액수는 아니에요. 먹고 살 만한 정도는 됐죠.
(이태현이 올 초 현대삼호중공업과 재계약을 맺으면서 받은 계약금이 4천만 원이다. 그것도 7년 계약에 말이다. 연봉은 8천만 원. 억대의 연봉자들이 수두룩한 스포츠계에서 ‘모래판의 황태자’가 받은 대우는 씨름계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새로운 도전을 꿈꾸면서 K-1 진출은 염두에 두지 않았나. 씨름 선수들이 모두 K-1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프라이드보다는 K-1 쪽에 더 관심이 갔을 것 같다.
▲프라이드나 K-1 모두 힘들죠. 그런데 제가 갖고 있는 장점이 K-1보다는 프라이드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움직임이나 균형 잡는 부분 등은 물론 그라운드 기술을 구사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가장 걱정되는 게 뭔가.
▲맞는 거요. 홍만이도 그랬겠지만 저 또한 맞고 산 적이 없거든요. 감히 누가 절 때리겠어요. 그런데 때리고 맞아야 하는 직업이다보니 맞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되잖아요. 연습을 통해서 극복해야 되겠죠.
이태현의 꿈은 스포츠 매니지먼트였다. 그래서 은퇴 전부터 친구이자 소속사 대표인 이재철 사장과 함께 회사 설립을 계획했고 실제 ‘팀이지스’라는 스포츠 매니지먼트사를 차렸다. 프로 선수들과는 달리 비인기 종목의 설움과 한계를 몸소 느꼈던 그는 씨름, 양궁, 유도 등 비인기 종목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위한 매니지먼트 사업을 꿈꿔왔고 실제 조금씩 단계를 밟아가는 중이다.
그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2층에는 종합격투기 훈련장이 마련돼 있다. <일요신문>에 처음 공개한다는 체육관에는 종합격투기로의 전환을 꿈꾸는 레슬링, 태권도 출신의 선수들이 뜨거운 여름철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태현은 숙소를 체육관 바로 위층에 마련해 놓고 하루 12시간씩 맹훈련을 통해 프라이드 이태현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