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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열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 ||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5월 초 평양 인근 남포시 잠진군수공장에서 대포동 2호 미사일 2기가 출발하는 것을 위성을 통해 추적한 한·미 정보당국은 무수단기지에서의 발사징후를 포착한 뒤 감시망을 한껏 가동하고 있었다. 특히 발사버튼을 쥐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향은 촉각을 곤두세운 대목이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평양에 없었다.
발사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던 5월 30일에서 6월 6일까지 그는 함경도 지역의 군부대를 집중 방문했다. 함경남도 장진의 공군2사단 73비행연대와 함북 청진의 9군단 산하 포병여단, 나진선봉의 동해함대사령부 산하 7전대와 국경경비사령부 14여단 등 7곳의 부대를 현지지도란 명목으로 돌아봤다.
정보당국이 주시한 것은 김 위원장의 부대방문 동선에 무수단기지가 놓여있다는 점이다. 현지의 연구진이나 군부 관계자를 격려 방문할 가능성이 농후한 때문이었다. 때마침 김정일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헬기가 무수단기지에서 포착되면서 대북 정보관계자들은 긴장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현지지도 등 지방 방문시 주로 승용차를 이용한다는 점을 들어 헬기방문 가능성에 의문을 나타내는 등 평가가 엇갈렸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 탑승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다른 인물들이 헬기를 타고 움직였을 가능성도 높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도 있었다. 북한과 러시아 국경지역에 멈춰서있던 기차 한 량을 김정일 전용열차로 오인하는 바람에 김정일 러시아 방문설이 퍼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5일 새벽 북한은 대포동 2호의 시험발사를 감행했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축제분위기에 젖어있던 미국은 경악했다. 납치 일본인 문제로 격앙돼 있던 일본은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해 즉각 대북제재 방안을 논의하는 바쁘게 움직였다. 발사를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점쳤던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국민여론의 호된 질책에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김정일의 미사일 도박이 서울과 워싱턴, 도쿄를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핵개발로 벼랑 끝을 치닫던 상황이 미사일로 카드만 바뀐 채 재연된 것이다. 북한의 시험발사는 국제사회의 예상을 뒤엎은 돌발상황이었다. 중국의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북한은 오히려 중국 측에 발사계획을 사전에 알리고 예정대로 무수단기지의 대포동 2호를 쏘아 올렸다.
이런 김 위원장의 밀어붙이기식 결정 뒤에는 김정일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북한 군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게 우리 정보당국의 판단이다. 특히 최근 들어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상징후로까지 거론되는 지방 군부대 방문을 살펴봐도 그렇다. 김 위원장은 올 들어 6월 말까지 모두 41차례 군부대를 방문했다. 지난해 20여 차례의 갑절이다. 더욱이 그의 주변에는 군부인사뿐이다. 군총참모부 상무부국장인 현철해와 선전부국장인 박재경, 총참모부 작전국장인 이명수 등 이른바 ‘대장 3인방’으로 불리는 군부 핵심실세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1994년7월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에서 승승장구해온 인물들이다.
이들은 조명록 총정치국장이나 김영춘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보다 더 김정일 위원장의 측근으로 간주되고 있다. 당 간부로서는 황병서 노동당 부부장이 따라다니지만 그도 군사문제 담당이라 군부나 마찬가지다. 다른 내각의 간부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때문에 김 위원장이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 목소리의 틈바구니에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수행인원의 면면으로 볼때 그가 군부 강경파의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북한군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이른바 항일 빨치산으로 분류돼 ‘혁명전사’로서의 이미지가 있는 아버지에 비해 자신의 경력은 내세울게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도 안갔다 왔는데 무슨 장군이냐”는 비아냥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인 2·16이나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에 군 장성에 대한 무더기 인사를 단행했다. 또 해외에서 집단 구매해 화제가 됐던 벤츠 승용차를 북한 군부 핵심인사에 대한 선물로 나눠줬다는 게 우리 정보당국의 판단이다. 평양과 근교의 특각(별장)도 군 간부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정책추진이나 예산배정 등에서 군부의 입장을 최우선시 하는 이른바 선군정치의 시작인 것이다. 북한은 그 시작을 95년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북한 군부는 대남·대외정책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토해내며 반발한다. 바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건설 문제 때문이다. 98년 6월 소떼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넘는 문제가 현대와 북한 아태평화위 사이에 본격 논의됐다. 군부는 반대했다. “우리가 미제와 맞서 어떻게 지킨 분계선이고 판문점인데 거길 남조선의 돈 많은 노인이 그것도 소떼를 끌고 넘나들게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아태평화위원장이던 김용순 노동당 대남비서는 김정일 집무실의 문고리를 열고 들어갔다. 정 회장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일 금강산 관광 등 사업을 기대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박했다. 김정일은 김용순의 손을 들어주었고 군부는 판정패했다. 98년 11월 금강산 관광 시작 때도 군부는 반대했다. 군사 요새지역인 금강산을 개방하면 큰일이라는 게 군부 측 주장이었다. 개성공단의 경우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렇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군부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남·대외정책에서 군부의 입김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북한 군부는 지난 5월 25일 하기로 남북한이 합의한 철도 시험운행을 행사 이틀을 남겨두고 급작스레 일방 취소했다.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통과문제를 자신들의 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이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서도 ‘철도를 이용하겠다는 건 정략적’이라며 비난했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에 의해 이뤄지는 사안까지 깨버렸다.
지난해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나온 직후 미국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 있던 북한 계좌자금 2400만 달러를 동결했다. 그러자 북한은 추가적인 6자회담 개최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면서 회담에 나온 외무성 관계자들은 “우리 기관에서 그 돈을 찾지 못하면 회담을 갖지 못할 것”이란 입장을 피력했다. 군부의 강경한 입김이 대미외교에서도 작용하고 있음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문제는 김정일 위원장의 도박 레이스가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대포동 2호 미사일의 시험발사가 사실상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노동과 스커드 미사일을 함께 마구 쏘아댄 것도 장거리 미사일 발사가 실패할 경우의 부담을 피하려는 것이란 분석이다.
대포동 1호 발사 후 8년 만에 심혈을 기울여 2호를 내놓았지만 또 다시 실패함으로써 김 위원장은 스타일을 완전히 구겼다. 대포동 2호는 미국 본토 도달은커녕 40초 정도 날아가다 바다로 곤두박질 쳐버렸다. 제대로 기술도 과시하지 못하고 대북압박의 명분만 준 꼴이 됐다. 수억 달러에 이를 개발비용도 날려버렸다.
주목되는 움직임은 실패에 따른 숙청설이다. 실패가 명백한 만큼 책임자에 대한 문책이 이뤄질 것으로 우리 정보당국은 보고 있다. 그러나 발사실패가 김정일의 무리수에 의한 것이란 측면이 부각될 경우 김 위원장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군부원로를 중심으로 한 강경세력이나 합리성을 강조하는 신세대 엘리트 관료들이 김 위원장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당국은 김 위원장의 통치장악력이 아직 확고하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미사일 발사 같은 지나치게 무리한 대외정책으로 화를 자초했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 북핵문제에 위폐, 인권문제로 체제 핵심부에서 동요가 시작될 경우 파장은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미사일 발사 후폭풍이 무수단리에서 평양으로 몰아 닥치고 있다.
김성진 북한문제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