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저로 올라가진 못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성공했다고 자평한 ‘풍운아’ 최향남. 마이너리그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팀에서 또다른 도전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고 한다.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었던 쿠엘류 감독이 자신과 비슷한 시간에 같은 출구로 나올 예정이었던 것.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는 그. ‘고독한 도전자’ 최향남(35)이 돌아왔다.
지난해 11월 클리블랜드와 연봉과 사이닝 보너스 포함 총액 10만 달러에 트리플 A 계약을 맺은 최향남은 올해 34경기(선발 11경기)에 등판해 8승5패, 103탈삼진, 방어율 2.37의 빼어난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빅리그 진입에 성공하지 못하고 경험만 잔뜩 안은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시차 적응 중이라는 최향남을 집 근처인 서울 잠실 부근에서 만났다.
▶▶‘나이’의 벽 앞에 울다
정확히 8월 15일 이후론 귀국할 날짜만 세고 있었다고 한다. 제대를 기다리는 병장 심정이었나 보다. 더블 A에서 6년째 생활하고 있는 이승학(27·필라델피아 산하 트리플 A 스크랜턴 레드 바론즈)은 아예 달력을 그려놓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표를 하며 지낸다고 귀띔했다. 그만큼 마이너리그 생활이 힘들단 소리다.
최향남이 귀국을 기다리게 된 사연은 또 있다. 오매불망 소원이라고 마음 속으로 빌었던 메이저리그 진입이 어렵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가 빅리그를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처음엔 가슴을 부풀렸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에게 빅리그 진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왜? 나이 때문이다.
“다른 건 노력으로 어떻게 해 보겠는데 나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가 없잖아요. 감독 입장에선 팀의 미래를 위해 나이 많은 선수보다는 어린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했어요. 처음엔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됐고 서운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해가 됐죠. 아마 내가 젊은 나이에 그런 ‘황당한’ 일을 당했다면 객기를 부려서라도 어떻게 해 봤을 거예요.”
최향남의 실력은 자신보다도 동료 선수들이 더 인정해 줬다. 자신이 빅리그에 올라갈 순서인데도 더블 A에서 올라온 유망주가 반짝 피칭으로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기회를 잡을 땐 울화통이 치밀어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감독은 최향남을 선발보다는 중간계투로 세우는 걸 즐겨했다.
“중간계투도 중간 나름이죠. 팀이 이기고 있을 때 나가는 것과 지고 있을 때 등판하는 건 천양지차이거든요. 그런데 감독은 이상하게 지고 있을 때 절 내보내는 거예요. 다른 선수를 아끼려는 생각에서죠. 재미있는 건 제가 올라가면 팀이 역전을 하는 거예요. 무실점 호투가 다반사고, 타자들의 방망이도 잘 돌아가더라구요. 만약 정상적인 로테이션이었다면 방어율을 1점대로 내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마이너리그의 후배들
인터내셔널 리그에서 뛰다 보니 최희섭(보스턴 트리플 A)과 이승학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다 마이너리그로 내려온 최희섭도 힘들어 보였지만 6년째 더블 A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승학의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희섭이나 승학이 모두 어려운 처지예요. 분명 메이저리그에서도 잘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거든요. 운이 닿질 않았을 뿐이죠. 희섭이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한국 복귀를 입에 올리지 않지만 승학이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해요. 그러나 KBO 규정 때문에 망설이고 있어요. 한국에서 프로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미국에 진출하면 2년간 국내에서 뛸 수가 없잖아요.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오죽하면 언더셔츠에 달력을 그려놓고 하루 하루를 지우며 살아가겠어요. 꿈을 좇고 꿈을 키우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어렵게 보낸 거죠.”
남 걱정할 때가 아닌 데도 마이너리그 후배들의 실상을 대할 땐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자신이야 산전수전 다 겪고 해볼 것, 안 해볼 것 두루두루 경험한 사람이지만 오로지 메이저리그 진출만을 위해 젊은 청춘을 ‘올인’하고 있는 후배들의 현실은 또 다른 감상을 갖게 했던 것이다.
▲ 최향남은 국적 변경으로 논란을 빚은 백차승의 상황이 야구선수로서 이해가 간다고. | ||
최향남이 미국에 진출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주위에선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심하게 표현한 사람은 ‘미친 짓’이라고까지 했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누구 하나 최향남에게 ‘가서 성공하고 돌아오라’며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기자들까지 ‘과연 될까’하는 의문 부호를 쏟아내며 그를 독특한 선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보낸 6개월 보름 정도의 야구 생활을 자평한다면 그는 ‘성공’이라고 감히 말한다.
“소속팀 코칭스태프는 물론 동료 선수들한테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빅리그에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과연 될까’하는 마이너리그 생활에 전 최선을 다했어요. 다시 하라고 해도 그만큼 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만 은퇴하라고 타일러요.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면서요. 그러나 은퇴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하는 것이고 제가 하고 싶을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할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메이저리그 마운드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단다. 그러나 미국에서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마운드가 그렇게 부럽지 않았다.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빅리그나 마이너리그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군대 가기 전에는 군대 갔다오면 야구를 더 이상 못할 줄 알았어요. 그러나 군대 갔다오고나서도 야구를 할 수 있더라구요. 서른 살 넘으면 알아서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서른 살을 넘기고서도 정열적으로 야구를 하게 되더라구요. 야구 인생의 데드라인은 미리 정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하는 데까지 해보고 ‘이젠 됐다’ 싶으면 그만두는 것이죠. 나이 먹어서 좋은 건 딱 한 가지예요. 깨달음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 가볼까
최향남이 귀국할 때 들고 들어온 가방은 2개뿐이다. 혹시 미국에 두고 온 짐이 있느냐고 물었다. 클리블랜드 마이너리그와 재계약을 할 경우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을 미리 예상한 건지를 물은 거였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버팔로(트리플 A)가 아닌 클리블랜드로 가야죠. 버팔로와는 다시 계약하고 싶지 않아요. 시즌 마치고 감독에게 귀국 인사를 하니까 내년 스프링캠프에서 보자고 하더라구요. 속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다’라고 말했어요. 빅리그가 아니라면 같은 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새로운 팀에서 다시 또 시작을 해야죠. 일본도 매력 있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제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그래서 또 불안해지지만 이젠 두렵지 않아요. 재미있잖아요.”
▶▶백차승의 국적 변경
몇 차례 인터뷰를 통해 친분을 쌓은 최향남과의 인터뷰는 종종 ‘엇길’로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백차승 얘기가 나올 때도 그랬다. 국적 변경으로 구설수에 오른 백차승 스토리에 대해 최향남은 기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야구 선수라면 (백)차승이의 입장과 선택이 이해가 돼요. 이미 지난 일이지만 저도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프로팀과 계약을 맺으면 오랫동안 외국 진출을 꿈도 꿀 수 없잖아요. 그때 일본이나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을 해서 이 나라를 뜨는 상상을… 하하 물론 결혼 전의 일이에요.”
최향남을 상징했던 장발이 짧게 자른 머리로 변화한 과정이 궁금했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뉴욕 출신의 슬로콤이란 선수가 팀의 ‘깎사(이발사)’였다고 한다. 선수들이 머리를 자를 때 그 선수에게 10달러씩 냈는데 최향남은 ‘형님’이란 이유로 돈을 내지 않고 머리를 잘랐다. 그러다 귀국 전 ‘마지막 이발’을 할 때 슬로콤에게 처음으로 팁처럼 돈을 지불했단다.
평생 정이 들지 않을 것 같던 선수들과 헤어지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려 힘들었다는 최향남. 입단 초기 ‘괴짜’에서 계약기간이 끝날 때는 ‘야구 잘하는 초이’로 인정받는 과정이 지면을 통해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최향남은 6개월 반 전에 비해 분명 진화해 있었다. 영어 문장이 아닌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미국 생활을 불편함 없이 해낸 최향남의 도전은 여기서 ‘스톱’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