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프라이드 데뷔 경기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이태현(왼쪽). 무술격투기전문지 <무진> | ||
이태현의 프라이드 진출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시작했다. 이태현은 지난 7월 소속팀이었던 현대삼호중공업에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는 이유로 퇴단을 요구했고 ‘다른 팀으로 이적하지 않는다’라는 조건 하에 재계약 포기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태현이 훨씬 오래 전부터 프라이드 진출을 준비했다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지난 5월부터 그의 격투기 대비 훈련을 도와주던 선수들이나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언론 관계자들의 이야기, 7월 1일 프라이드 대회가 열렸던 시기에 경기 전날 도쿄 시내의 격투기용품점에서 우연히 이태현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 등이 부정할 수 없는 근거들이다.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그의 소속팀이었던 현대삼호중공업은 계약 파기를 위해 고의로 팀을 속였다며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태현이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예상치 않은 프라이드 진출 보도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8월 7일 예정이었던 이태현의 씨름 은퇴식까지는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려 했지만 현대삼호중공업과의 계약이 만료되기 전에 국내 언론을 통해 이태현의 프라이드 진출설이 보도된 것. 그로 인해 이태현과 그가 소속되어있는 팀이지스는 현대삼호중공업과의 법정 싸움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데뷔전을 서두른 데 대해 “여차하면 80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할 상황에 처한 이태현 측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프라이드 계약금 이외에 추가로 파이트머니를 받는 것 아니었겠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데서 이태현의 빠른 데뷔전의 이유를 찾는 의견도 있다. 이태현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에이전트 폴 리(Paul Lee)의 입지 확보를 위한 무리수였다는 것.
일반적으로 일본 격투기 단체들은 세계 각지의 유명 선수들을 섭외하기 위해 각 나라 또는 단체 별로 속칭 ‘부커’라고 불리는 에이전트를 두고 있으며 이 경우 한 번 정해진 부커와의 관계는 특별한 트러블이 생기지 않는 한 돈독히 유지하는 것이 관례다. 한 나라 안에 여러 명의 부커를 두는 경우에도 서로의 영역은 분명히 지켜준다.
한국에서 타 종목의 선수를 프라이드에 진출시키는 작업은 CMA라는 단체에서 주로 해오고 있었다. CMA는 최무배를 비롯해 데니스 강의 프라이드 입성에도 힘을 썼고 이태현 이전에는 윤동식을 제외한 한국인 프라이드 파이터 대부분을 진출시킨 바 있다. 한때 ‘CMA를 통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프라이드 진출은 없다’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그 입지가 탄탄했다.
반면 폴 리는 프라이드의 유명 파이터인 요시다 히데히코가 소속된 J-ROCK이라는 일본의 대형 매니지먼트 회사와 손을 잡고 프라이드에 한국 선수를 보내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프라이드에 선수를 진출시키는 가시적인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CMA는 어원진, 김대원의 프라이드 진출을 비롯해 많은 선수들을 일본 대회에 진출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폴 리로서는 프라이드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CMA를 넘어설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폴 리가 CMA를 견제하고 있음은 이태현 데뷔전을 앞두고 마련된 기자단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의 측근인 타이라 박이라는 인물이 “앞으로 한국에서 프라이드에 선수를 내보낼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라고 못 박는 발언을 한 데서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CMA 한국사무국장인 천창욱 씨는 이에 대해 “그런 얘기는 들은 바 없다. 프라이드와 CMA의 관계는 아무 변화가 없다. 지금도 2명 정도 한국 선수들을 프라이드에 진출시키려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라며 일축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지에 놓여있던 폴 리에게 확실하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빅카드가 이태현이었다. 특히 이태현은 경쟁 단체인 K-1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최홍만에 대한 대항마가 필요했던 프라이드 측에서도 반길 만한 카드였다. 이는 프라이드 측이 이태현을 최홍만과의 상대 전적을 유난히 강조하며 ‘한국 씨름의 진정한 강자’라는 표현을 썼던 데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홍만 이상의 씨름 스타를 원하는 프라이드 입장에서도 이태현은 최홍만이 처음 K-1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당히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와 경기할 가능성이 컸다. 실상 히카르두 모라에스는 일부에서 20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고작 세 번의 경기를 가진 67년생의 퇴물이었다. 누가 봐도 이태현의 먹잇감으로 선택되었음이 분명했다. 때문에 서둘러 첫 경기를 치르는 데 대한 부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태현은 종합격투기 경기를 치르기에 너무나 부적합한 상태였다는 것을 눈치 채질 못했다. 이것은 포스트 최홍만 효과를 노렸던 프라이드도 마찬가지. 퇴물 히카르두와 함께 부둥켜안고 지쳐 허덕이는 이태현을 위해 닥터체크를 핑계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기까지 했지만 이태현의 표정은 경기를 멈춰주길 원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결국 세컨에서 수건을 던지고 말았다. 현지 취재진의 말에 따르면 이때 일본인 기자들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최무배가 그립다는 말을 했으며, 3층 스탠드에서 경기를 촬영하던 미국인 사진 기자들은 도대체 왜 경기가 중단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했다는 후문이다.
이에 대해 천창욱 씨는 “이태현의 출전이 성급한 감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씨름 천하장사로서의 가능성도 보였다고 생각한다”면서 “에이전트라면 선수가 좋은 조건으로 뛸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선수가 계속해서 대회 주최측으로부터 ‘콜’을 받을 수 있도록 관리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겠다고 말한 이태현이 다음 경기에서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지 사뭇 기대가 된다.
김기태 무술격투기전문지 武Zine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