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재응이 ‘리얼토크’ 도중 시원하게 웃고 있다. 2007 시즌에도 그의 웃음이 계속되길 기대해 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올해 뉴욕 메츠에서 LA 다저스로, 그리고 WBC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참가와 시즌 중에 탬파베이로 트레이드되는 등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은 서재응(29)과 잠실 롯데호텔에서 만나 모처럼 유쾌 상쾌 통쾌한 얘기들을 나눴다.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상대방에게 ‘웃음꽃’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서재응이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아무리 답답하고 우울한 상태에서 그를 만나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시원시원하게 답하는 스타일인 데다가 가식을 모르는 솔직함이 진심을 보태 그대로 와 닿는다. 한 마디로 편하고 여유롭다. 2003년 이후부터 해마다 귀국 후 인터뷰에 ‘응한’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워낙 인터뷰를 싫어하고 기자들을 피해 다니는 바람에 ‘건방진’ 운운하는 비난도 뒤따랐지만 인터뷰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화제를 먼저 아시안게임의 야구대표팀으로 돌렸다. 서재응이 본 이번 대표팀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대만전, 일본전을 빼놓지 않고 봤다. 먼저 한국 야구의 수준을 인정해야 한다. 강팀이든 약팀이든 간에 그에 따른 빠른 분석과 대처 능력이 아쉬웠다. 물론 이번 대표팀에서도 고참부터 막내 선수들까지 모두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정신 상태가 해이해졌다’는 얘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또 다른 대표팀이 구성됐을 때 이번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면 안 된다.”
서재응은 일본의 최고 선수들로 구성된 WBC의 일본 대표팀과 이번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대표팀과는 분명 수준 차이가 있지만 팀 전력이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게 본다면 WBC에서 한국이 일본과 미국을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경기라는 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데 졌다면 ‘어떻게’ 졌느냐가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WBC 때 구성된 대표팀에 대해 물어봤다. 그때의 팀 분위기가 궁금했다.
“WBC에선 주장이었던 (이)종범이 형이 너무 잘해줬다. 해외파 국내파를 다 아우르면서 밑에 후배들을 더 살뜰하게 챙겼다. 그러다보니 미국파, 일본파, 이런 구분이 없었다. 더욱이 이치로가 내뱉은 발언이 팀 전체를 똘똘 뭉치게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가슴 뭉클한 시간들이었다.”
일본과의 8강전에서 기적같은 역전승을 거둔 후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던 일명 ‘태극기 세리머니’의 순간도 잊지 못하는 명장면이다.
“지금도 가끔씩 WBC 경기를 다시 보곤 한다. 이진영의 호수비에, 또 고비 때마다 터트린 종범이 형의 적시타에 마음이 달뜬다. 에인절스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꽂는 장면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떨림이 울려온다. 그런데 더 뭉클한 부분은 내 모습보다는 종범이 형의 2타점 적시타였다. 당시 난 외야의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었는데 종범이 형이 때린 공이 ‘딱’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대로 서 있다가는 공에 맞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공에 맞는 두려움보다는 이겼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고 그 이후론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 서재응은 “탬파베이로 트레이드됐을 때 처음엔 황당하고 씁쓸했지만 ‘기회의 땅’이 될 것이란 자신감이 들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 ||
“WBC 때 내가 등판했던 경기를 자세히 보면 직구는 주로 버리는 공이었고 변화구 위주로 피칭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몸 상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특히 대만전을 보면 직구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 선수들도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이 먹힌 것이다. 그런 상태로 LA 다저스 캠프에 합류를 했는데 그때의 느낌은 ‘아!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고 있구나’였다. 정말 암담했다.”
변화구는 올라오는데 직구에 대한 감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 수백 개, 수천 개의 피칭을 해도 이전에 뿌렸던 직구가 나오질 않았고 그 상태로 들어간 다저스의 선발 자리는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쩜 그 최악의 시나리오는 WBC의 대만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다저스 스프링캠프 동안 정말 열심히 훈련했고 하루 빨리 새로운 팀에 적응하려고 몸과 마음을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이상적인 구위가 나오지 않아 압박감이 심했다. 특히 다저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바라보는 팀이라 한 게임, 한 게임의 결과를 매우 중요시한 탓에 투수가 갖는 심적 부담은 더욱 컸다. 그래도 감독은 나에게 10게임이란 기회를 줬다. 10번을 선발로 나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가슴 아픈 건 그 10번의 선발 중 단 한 번도 베스트 컨디션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서재응은 어느 순간부터 시즌 중에 트레이드될 수도 있을 것이란 예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호텔 방에서 자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나 방문을 열어 보니 감독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감독 얼굴을 보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던 서재응은 ‘어느 팀으로 가느냐’고 물어봤다. 탬파베이라는 대답에 ‘어떻게 해서든 탬파로 가긴 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탬파베이는 LA 다저스로 이적하기 전에 가장 유력한 트레이드 대상 팀이었다.
“탬파행을 통보받고 30분은 황당했고 씁쓸했다. 그러나 그 후론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성적에 대한 부담 없이 내 구위를 되찾으며 훈련에 집중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플로리다의 캠프에서 조 매든 탬파베이 감독과 첫 대면을 했다. 그때 매든 감독이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그는 날 오랫동안 지켜봤다고 했다. 앞으로 5일 로테이션을 지켜줄 테니 최선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선수에게 그런 약속을 하는 감독을 처음 봤다. 그때부터 탬파베이가 나에게 ‘기회의 땅’이 될 것이란 자신감이 들었다.”
서재응은 귀국 전 탬파베이와 1년간 120만달러에다 15만 달러의 옵션(선발 27회 출전) 계약을 체결했다. 올시즌 3승12패의 성적으론 최고의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서재응은 많이 받아야 80~90만 달러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트레이드 이후 1승 밖에 올리지 못한 서재응에게 탬파베이는 120만 달러의 대우를 하며 서재응의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해줬다.
인터뷰 말미에 한때 ‘맞장’을 뜨며 반발을 서슴지 않았던 뉴욕 메츠의 하우 감독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지금 다시 만나면 그때처럼 그렇게 들이댈 수 있느냐고 운을 뗐더니 “다시 만나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때는 젊은 패기에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러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다보니 생각도 많아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이전에는 메이저리그를 꿈꾸게 하고 동경하게 만들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가고 싶은 영순위 팀으로 꼽았다. 지금은 변했다. 만약 또 다시 트레이드된다면 미국에서의 마지막은 뉴욕 메츠에서 마무리하고 싶다. 친정팀인 데다가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그리움을 갖게 한다. 뉴욕이란 대도시에서 서재응의 메이저리그 인생이 꽃을 피웠듯이 마지막도 거기서 시들었으면 좋겠다.”
내년이면 메이저리그 진출 10년 째를 맞는 서재응. 그 긴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사연들을 담고 쏟아내면서 그가 깨달은 한 가지는 사이영상 운운하면서 높은 목표를 세워놓고 마음 아파하기보다는 마이너리그로 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마운드에 설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캐치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야구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젓는 그도 10년 정도면 ‘조금은’ 야구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 2007년 서재응의 마운드가 기다려진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