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대형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어색해하는 ‘순수청년’ 안현수. 경기 때의 카리스마를 떠올리면 의외의 모습이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래도 훈련이 끝난 이후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벼운 내용으로 대화를 풀어가면서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 안현수(22·한체대4)는 조금씩 굳어있던 얼굴 근육을 풀고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에서 단어들을 토해내며 ‘급 썰렁’에서 ‘급 호감’으로 분위기를 변화시켜 나갔다.
요즘 ‘애들’같지 않은 더벅머리 헤어스타일에다(내년 군 입대 전까지 머리를 기를 예정이란다. 물론 4주 군사 훈련만 받지만^^.) 패션 감각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순수함 그 자체. 스물두 살 씩씩한 대한 건아와 ‘초밥 데이트’를 즐겼다.
빼앗긴 금메달
안현수가 좋아하는 몇 가지 음식들 중 초밥은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골라 먹는 재미가 만만치 않은 회전 초밥집은 쌓이는 빈 접시를 구경하는 즐거움까지 더해져 자꾸 찾게 만든다. 올림픽공원 부근에 위치한 안현수의 단골 초밥집에서 마주한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구 ‘회전’ 중인 초밥들을 집어내 식탁 위에 잔뜩 올려놓았다.
지난 중국 창춘에서 벌어진 동계아시안게임 500m에서 1위를 하고도 오심으로 금메달을 빼앗긴 아픔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후 나름 조심스럽게 아시안게임 얘기를 화제로 올렸다.
“최악의 몸 상태로 대회에 출전했어요. 감기 몸살에다 음식 먹고 체하기까지 했거든요. 발목도 부상으로 많이 안 좋았어요. 대회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특히 중국에서 치르는 대회는 편파 판정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어느 대회보다 열악한 상태에서 대회에 나갔는데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더라구요.”
▲ 금메달을 딴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1000m 경기 당시 모습. | ||
스포츠와 양보
2006토리노동계올림픽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안현수. 그러나 그 대단한 성과 뒤엔 공식화된 쇼트트랙의 병폐, 파벌 논란의 그늘이 숨어 있다. 특히 토리노올림픽에선 한국 선수들끼리의 금메달 경쟁을 놓고 ‘양보’란 단어가 돌아 다녀 안현수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올림픽이라는 큰 국제 대회에 나가서 1등하고 싶지 않은 선수는 없을 거예요. 이미 다른 레이스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해도 또 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잖아요. 후배가 군 문제로 고생하고 있으니까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아요. 레이스를 벌이면 한국 선수든 외국 선수든 모두가 경쟁자들이니까요. 그런데 누가 양보를 해서 내가 금메달을 땄다느니 내가 양보를 안 하고 욕심을 부려서 다른 선수가 군 면제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등의 비난을 받으면 정말 할 말이 없어져요. 금메달을 땄는데 왜 욕심이란 단어와 양보란 말이 나와야 하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왕따’ 아닌 ‘왕따’
안현수는 지난 올림픽 때 쇼트트랙 내의 고질병이나 다름없는 파벌 문제로 남자 대표팀에서 따로 나와 훈련을 받았다. 그때의 심경을 물었더니 ‘너무 외로웠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계주를 벌일 경우 선수들이 모여서 작전도 짜고 역할을 분담하기도 했는데 철저히 개인 플레이로 일관하다보니 ‘왕따’ 아닌 ‘왕따’가 된 심경으로 단체전에 임했다는 것.
“선수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어른들이 그어 놓은 선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서 훈련해야 하는 선수들은 사실 비난받을 이유가 없어요. 그래도 마음 아프고 씁쓸한 건 사실이에요. 올림픽을 준비하는 1년 내내 혼자 훈련했기 때문에 심리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게 보냈어요. 파벌 문제로 한창 시끄러울 때는 운동을 포기하고 유학 갈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 3관왕을 달성했지만 막상 모든 대회가 끝났을 때는 허탈감에 빠져 헤어나기 힘들더라구요. 진이 다 빠져서 그런지 의욕도 안 생기고 성적도 엉망이고…. 올림픽 후유증이 상당했던 것 같아요.”
최고라는 ‘부담’
안현수 정도의 레벨이라면 대회 출전 때마다 1등을 하거나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 ‘본전’이다. 만약 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그 자체가 이슈가 되고 신문의 큰 제목감이 될 정도로 쇼트트랙에서 차지하는 안현수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당연히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컨디션이란 게 좋고 나쁠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스포츠에선 인정 사정 봐 주질 않아요. 이전에는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정상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절박하게 몸부림쳐요. 유명해지니까 좋긴 해요. 모두가 다 인정을 해주시니까. 그런데 가끔은 저도 흔들릴 때가 많거든요. 그럴 때 감독님이나 선배들이 야단도 쳐 주시고 간섭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혼자서 잘 해왔다고 그냥 내버려 두실 때가 많아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대우를 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전 아직도 배우고 쌓아가야할 게 많은 선수거든요.”
체력과 나이
스물두 살의 대학생이 벌써부터 후배들에게 밀리는 위기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안현수는 어느새 대표팀에서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 체력적인 면에서 고전할 때도 있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안현수와 김동성
안현수에게 얼마 전 이규혁과 인터뷰했을 당시 이규혁이 주장한 스피드스케이트의 우월성에 대한 얘기를 전했다. 내심 반발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안현수는 이규혁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였다.
“스피드스케이트는 멋있어요. 경기 자체가 깨끗하고 신사답게 펼쳐지잖아요. 말 그대로 실력이 전부죠. 그러나 쇼트트랙은 팀 플레이다 보니 변수가 많아요. 변칙 플레이가 벌어지는 바람에 매너와는 거리가 좀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선수를 추월할 때의 스릴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 못할 거예요. 특히 관중들의 뜨거운 반응과 응원은 선수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줘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자주 눈에 띄는 질문이 있다. 바로 ‘김동성과 안현수 중 누가 더 뛰어난 선수예요?’하는 내용들이다. 이 질문을 그대로 안현수에게 던지자 모범 답안이 나왔다.
“(김)동성이 형은 체격이 좋잖아요. 그 체격에서 나오는 파워를 무시할 수가 없죠. 전 그런 부분에서 뒤떨어지는 편이구요. 그러나 전 동성이 형보다 기술이 뛰어나다고 봐요. 그 기술 때문에 이 자리에까지 올라온 거예요. 욕심 같아선 저랑 동성이 형이 적당히 섞여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정말 환상적이겠죠?”
내사랑 ‘단비’
안현수에게는 사랑하는 여친(여자친구)이 존재한다. 지난 토리노올림픽 이전부터 여친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안현수의 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존재가 됐지만 그러기까지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고 한다.
“제가 보기엔 운동 선수 여친이 제일 힘들게 사는 것 같아요. 구설수에 휘말리는 건 흔한 일이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욕도 많이 먹거든요. 단지 유명한 운동 선수를 남친으로 뒀다는 사실 때문에. 참 많이 힘들었어요. 싸운 적도 많고 헤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그 숱한 어려움들을 넘기고 나니까 지금은 많이 편하고 여유가 있어졌어요.”
서로의 미니홈피에 당당히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공개적으로 사용하는 관계이다 보니 지금은 안티보다는 두 사람 사이를 더 좋아해주고 격려해주는 팬들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신)단비랑 결혼할 거냐고 물어보시는데 아직은 잘 모르는 거잖아요. 결혼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지금은 사랑하는 여자친구로만 만나고 싶어요.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도 서로 여전히 사랑하고 옆에 존재하고 있다면 당연히 결혼하겠죠.”
안현수는 의외로 욕심이 많았다. 현역 시절 때보다 은퇴 이후의 삶이 더욱 거창했다.
“은퇴해서 곧바로 지도자로 서고 싶진 않아요.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면서 내실을 다지고 싶어요. 그래서 유학을 생각하고 있어요. 학교 강단에도 서보고 싶고 꿈나무들을 가르치는 것도 너무 하고 싶은 일이에요. 그 다음에는 IOC 위원으로 한국을 대표해서 국제적인 일에 뭔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0년 밴쿠버올림픽 이후 현역 은퇴를 계획하고 있다는 안현수. 욕심 같아선 몸 관리를 더욱 체계적으로 해서 2014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음 하는 바람이다. 그런 ‘덕담’을 건넸더니 안현수의 표정이 급 썰렁으로 다시 회귀하고 말았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