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콜’이라 불리며 마운드를 호령했던 임창용. 그가 혹독한 재활훈련을 끝내고 부활을 다짐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마운드에서의 모습뿐만이 아니다. 삼성 프런트 관계자들은 기자에게 “창용이가 변했다”면서 이전과는 달라진 임창용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고 실제 인터뷰를 위해 기자 앞에 나타난 임창용은 어느 때보다 여유와 안정감을 보여줬다. 스스로 평가하길 ‘이젠 좀 철이 든 것 같다’고 말할 만큼 ‘질풍노도의 시간’들을 뒤로하고 한층 ‘어른’이 돼 성숙한 이미지를 풍기는 임창용과의 인상적이었던 인터뷰를 정리해 본다.
“창용이가 5선발 안에만이라도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지난 20일 대구에서 롯데와의 시범경기를 마친 뒤 삼성의 선동열 감독은 임창용이 개막전 선발을 희망한다는 기자들의 전언에 이런 반응을 나타냈다. 언론 플레이의 고수인 선 감독의 멘트라 그 말의 배경을 떠올려야한다. 선 감독은 임창용에 대한 기대감을 5선발 운운하는 걸로 자극을 주면서 임창용이 오기를 갖고 덤벼들기를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임창용은 선 감독의 이런 반응이 ‘자극용’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20일 시범 경기 후 ‘퇴근할'' 복장으로 기자 앞에 나타난 임창용은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좋은 컨디션이고 준비를 많이 해둔 상태라면 감독님이 그냥 놔두시진 않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임창용은 종종 ‘마운드의 풍운아’란 타이틀이 붙을 만큼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창용불패’ ‘애니콜’ 등의 별명으로 마운드를 지배해 오면서도 해태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을 뿐 아니라 해외 진출 시도, FA 계약, 그리고 사생활 등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내려야 했다.
여간해선 인터뷰를 통해 속마음을 풀어 놓지 않는 임창용에게 그동안 다양한 루머들에 대한 소문들을 직접 물어봤다.
임창용은 지난 2004년을 끝으로 FA 자격을 얻었다. 소원했던 해외 진출을 위해 일본과 미국 메이저리그를 노크했지만 소문만 무성했고 결국 빈손으로 끝나고 말았다. 자존심을 구기고 삼성에 잔류하면서 2년간 최대 총액 18억 원에 계약했는데 여기에는 마이너스 옵션 2억 원이 포함됐다. FA전 삼성에서 임창용 측에 70억 원을 제시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당시 임창용 측에서 삼성 구단을 향해 이승엽에게 제시했던 FA 계약 조건을 적용해달라고 요구했다는 말까지 나돈 상황이라 임창용이 2년간 총액 18억 원(마이너스 옵션을 포함하면서까지)을 수용했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당시 임창용 가족들은 임창용의 계약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계약 무효 파동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그때가 제일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요미우리 진출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어요. 구체적인 계약 내용까지 나왔기 때문에 확신이 있었는데 에이전트 이중 계약 파문이 불거지면서 무산되고 말았죠. 일본의 라쿠텐 이글스의 제안을 뿌리친 부분도 아쉬움으로 남아요. 전 일본의 중심에 서고 싶었어요. 변두리는 관심이 없었죠. 그때만 해도 제가 잘나가던 때였으니까 선택의 폭이 컸어요. 미국 애틀란타에서는 5년에 1300만 달러를 제안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다 옵션이라 안타깝죠(웃음). 해외진출은 제 의지로 되는 게 아닌가봐요. 이런 저런 방법들이 다 틀어지고 무산되니까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더라구요. 그런 심정으로 삼성과 계약 협상을 했으니 정신이 온전했겠어요?”
임창용은 자신이 구단을 향해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알아서 결정해 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 더 이상의 멘트조차 달지 않았다. 임창용의 얘기를 듣다가 답답한 나머지 ‘마이너스 옵션은 너무 심했다’라며 기자가 한마디 하자 임창용은 “그때 일은 묻지 말아주세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요 뭘. 모든 게 제 탓이니까, 제가 어리석었던 탓이니까 그냥 묻어둘래요”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98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삼성은 팀 간판 타자인 양준혁에다 곽채진과 황두성을 끼워 넣고 억대의 현금까지 보태서 해태의 임창용과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혹자는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큰 대형 트레이드에다 가장 황당하고 충격적인 트레이드라고 평가한다. 다른 선수도 아닌 양준혁을, 그것도 두 선수를 보태고 현금까지 얹혀서 임창용과 맞바꿨다는 게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임창용의 당시 반응이 궁금했다.
▲ 사진제공=삼성라이온즈 | ||
임창용은 그때만 해도 요미우리로의 임대를 추진 중이었다고 한다. 주니치 드래곤즈로 임대된 선동열, 이종범의 예처럼 임창용 또한 요미우리로의 임대가 상당히 진척된 상황이라 처음엔 요미우리가 삼성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당시 해태가 모기업 부도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만약 저까지 일본으로 팔면 기아 팬들이 가만 있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부담과 압박 때문에 결국엔 삼성으로 트레이드시킨 것 같아요. 그래도 좀 아쉬움이 남아요. 그때 만약 요미우리로 갔었더라면 지금의 모습보다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겠죠. 요미우리는 저랑 인연이 아닌가봐요. 그래서 (이)승엽이가 요미우리의 4번 타자로 톱스타 대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정말 묘한 기분이 들어요.”
임창용은 여러 투수들 중에서도 투구 수가 많은 선수로 유명하다. 잦은 등판으로 체력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는 얘기도 흘러 나왔다. 그래서 인터넷에 ‘임창용’이란 이름을 치면 ‘혹사’라는 단어가 연결돼 등장한다. 이에 대한 임창용의 생각이 궁금했다.
“지난해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권오준과 오승환이 혹사당했다는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두 선수가 던진 투구 수와 이닝 수를 합한 게 저 혼자 던진 것보다 적어요. 그럼 설명이 되겠죠?”
왜 그렇게 ‘무식하게’ 많이 던졌느냐고 물었다. 종종 몸이 안 좋다고 꾀도 부리고 연기도 하면서 몸을 아끼지 못한 탓을 했더니 임창용도 쉽게 긍정을 한다.
“그때는 야구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나가서 이기는 게 재미있고 던지면 타자들이 못 치는 것도 재미있고 성적이 좋고 팬들이 좋아해주니까 아픈 줄 모르고 운동했던 것 같아요. 모두 제 욕심이었죠. 절 돌보지 못하고 욕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이런 꼴을 당한 거예요. 지금은 너무나 후회가 돼요. 몸을 조금씩 아꼈더라면 지금 훨씬 더 좋은 공을 던질 수 있었을 거예요.”
임창용은 선동열 감독이 부임 후 삼성의 투수들이 한층 체계적이고 빈틈없는 로테이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발, 중간, 마무리 투수의 보직이 확실히 정해진 상태라 규칙적인 등판이 가능하다는 것. 투수 출신의 감독을 둔 삼성 투수들의 복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지난해 (오)승환이가 받은 만큼만 저도 관리를 받았더라면 절대 아프지 않았을 거예요. 선 감독이 이닝 수를 아주 정확히 지켜주셨거든요.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시지만 잔정도 많으시고 선수를 편하게 배려해주시는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임창용은 올 시즌 활약에 대해 “작년엔 (배)영수가 내 공백을 메웠는데 올해는 내가 영수의 공백을 메워야 할 것 같다”라는 말로 ‘낮춰서’ 표현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속마음은 수술 후 완전히 재기했음을 제대로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한창 젊을 때는 무작정 던지는 게 좋았어요. 그러다 부상으로 마운드에 설 수 없게 되고, 또 수술 후 혹독한 재활 기간을 거치면서 삶에 대해, 야구에 대해 다시 보게 됐습니다. 한 마디로 철이 든 거죠. 나이도 이제 서른이 넘었으니까요.“
임창용은 재활 기간이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 얻은 게 너무나 많았던, 귀중한 시간들이었다고 회상한다.
“지금은 감독님의 바람처럼 5선발에 진입하는 게 1차 목표예요. 그 다음은 팀의 에이스로 거듭나는 겁니다. 전 은퇴를 해도 야구 지도자는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은퇴하기 전까지 아프지 말고 신나게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