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27일 GS챔피언스파크에서 만난 FC 서울의 세뇰 귀네슈 감독은 “요즘 축구계에 불고 있는 귀네슈 열풍을 실감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의 이름인 ‘귀네슈’의 뜻이 ‘태양’이라는 점을 빗대어 재미난 대답을 내놓았다. 실제로 태양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귀네슈 열풍’만은 엄연한 현실이고 언론마다 귀네슈 감독의 리더십에 대해 다양한 분석 기사를 쏟아내는 상황에서 귀네슈 감독의 기상도는 ‘해가 쨍쨍’한 나날의 연속이다.
지난 3월 14일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4-1 대승을 이루며 K-리그 5전 전승을 질주하고 있는 FC 서울은 마치 프리미어리그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른 경기 템포와 호흡이 척척 맞아 떨어지는 패스, 그리고 선수들의 유기적인 협력 플레이로 축구팬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선사했다. 그 역할의 중심점에는 귀네슈 감독이 있었고 결국 한국 축구는 ‘터키 명장’ 귀네슈 감독에게 ‘꽂히고’ 말았다.
수원 삼성전 이후 2박 3일간의 짧은 ‘고향 방문’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귀네슈 감독과의 매력적인 데이트를 소개한다.
“Merhaba!(메르하바)” 기자가 먼저 터키어로 인사를 건네자 귀네슈 감독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곧장 “메르하바”라고 응수하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가득하다. 성적이 좋다 보니 인터뷰하는 분위기가 편안하고 여유롭기만 하다. FC 서울이 추구하는 ‘재미있는 축구’가 감독과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통역을 담당하는 시난 오즈투르크 씨는 터키인이면서 한국 사람보다 한국어 구사가 더 능숙해 속도감 있는 인터뷰 진행이 가능했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터키에서의 반응이 어떠했나.
▲왕복 30시간의 비행 시간을 빼면 2박3일의 휴가 중 터키에 머문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중에서도 하루를 터키 매스컴과의 잇단 인터뷰로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터키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FC 서울 소식과 내 근황을 자세히 알고 있더라. 한국 프로팀 감독을 맡는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적응면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앞세우던 터키 언론이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한국에 너무 빨리 적응했다며 놀라워했다.
―줄곧 터키에서만 지도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국 프로팀을 맡는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걱정이 컸다. 적응 기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인천공항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공항에 환영 나온 서포터즈들을 보며 걱정이 싹 사라졌다. 특히 구단의 고위층부터 프런트 직원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가 한마음이 돼 움직였다. 그들을 보면 마치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가족 같다. 지난 3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귀네슈 감독은 자신과 FC 서울의 인연을 여자와 남자의 관계로 빗대어 설명했다. 즉 자신은 구단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결혼도 중요하지만 결혼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그는 마음의 문을 열고 희생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면 행복한 결혼 생활이 유지될 것이라고 풀어냈다.)
▲ 지난 21일 4 대 1로 승리했던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위쪽). 공격축구 붐을 일으킨 귀네슈 감독을 만났다. “메르하바!” 기자의 터키 인사말에 분위기도 ‘업’. | ||
▲난 한국에 온 이후로 짧은 시간에 40명의 선수들을 파악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우리 팀이 갖고 있는 재료가 어떤 재료인지, 그 재료의 상태는 어떤지를 알아내려고 밤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선수들을 분석했다. 그런 노력들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구단과 선수들, 코칭스태프의 도움 때문이다. 더욱이 가장 큰 힘은 팬들이다. 선수와 감독은 바뀔 수 있지만 팬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 않나.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주다 보면 팬들의 숫자도 늘어날 것이고 그로 인해 선수들이 힘을 얻고 더 열심히 운동장에서 뛰게 된다. 감독 혼자만 춤을 춰선 감동을 줄 수 없다. 선수와 구단, 코칭스태프 그리고 팬들까지 모두 하나가 돼 운동장에서 멋진 ‘춤’을 보여줬기 때문에 분위기가 업 될 수 있었다.
(귀네슈 감독은 훈련 많이 시키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터키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 후 주장인 이을용이 감독을 찾아가 휴식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당시 귀네슈 감독은 훈련 때문에 지친 몸은 훈련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즌이 개막되면 선수들 몸이 자연스레 풀릴 것이라면서. 귀네슈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고 지금은 단 한 명도 훈련이 ‘빡세다’고 불평하는 선수가 없다고 한다.)
―얼마전 전남의 허정무 감독이 모 스포츠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귀네슈 감독은 잘 차려 놓은 상을 받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지금 FC 서울의 멤버로 이 정도의 성적을 내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한테 큰 의미가 있는 부분이 아니다. 잘 나가다보면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다. 오랜 지도자 생활을 한 덕분에 그 정도의 견제는 쉽게 웃어 넘길 수 있다. 선수들에게 강조한 말이 있다. 주위에서 뭐라 하든 우린 우리가 정한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가자고 말이다. 지금까지 다섯 경기에서 전승을 했다. 그러나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축구는 과거가 없다. 오늘과 내일만 있을 뿐이다.
―FC 서울 선수들의 경기에 당신은 몇 점을 주겠나.
▲당연히 100% 만족하지 않는다. 난 경기 결과보다 경기 내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긴 게임이라도 경기 내용이 좋지 않을 땐 반드시 지적한다. 지난 수원 경기에서 4-1로 이겼지만 우리 선수들 페이스가 최고의 상태는 아니었다.
▲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을 꺾고 터키를 3위에 올려놓은 세뇰 귀네슈 감독. 그는 현재 한국의 축구 수준이라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 ||
▲터키에 있을 때 누군가 얘길 해줘서 들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내 이름이 그런 주장에 거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표팀 감독이 잘 하고 있는데 그를 비난하기보단 더 응원하고 도와줘야 한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만약 대표팀 감독이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나. 개인적으로 베어벡 감독과 친분이 있다. 이런 말이 자꾸 나오면 우리 사이가 어색하고 불편해질 수도 있다. 더 이상 내 이름을 꺼내지 말아 달라.
―FC서울과 3년 계약을 맺었다. 좀 성급한 질문이지만 3년 이후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 같나.
▲사실 처음 FC 서울과 계약을 맺을 때는 1년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구단에선 줄곧 3년을 요구했다. 내가 마음을 바꿔 2년만 하자고 해도 말이다. 막상 한국에서 생활해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만족스럽다. 워낙 시스템이 잘 돼 있어서 부족하고 어려운 게 없다. 터키에선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받는 게 많았다. 축구팀들이 많다 보니 뭐 하나만 잘못해도 난리가 아니었다. 3년 이후 내가 어디 있을지는 정해져 있다. 난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다. 지도자로 계속 남을 수도 있고 비즈니스와 관련해서 일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의 아름다운 지역을 여행하면서 편안하게 생활할 수도 있다.
(귀네슈 감독은 한국의 뜨거운 축구 문화와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클럽팀의 경제력 그리고 무엇보다 언론의 호의적인 분위기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했다. 7월 초에 큰딸 결혼식을 마치면 아내도 한국으로 들어와 같이 살 것이라고 한다.)
―터키 트라브존스포르에서 감독과 선수로 만났던 이을용 선수와 지금은 FC 서울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을용 선수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다고 들었다.
▲이을용은 정말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자기 일에 완벽하다. 터키에 있을 때 그 선수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이을용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구단 관계자들이 많이 힘들어 했다. 얼마전 터키 친구들이 FC 서울 경기를 보고선 트라브존스포르가 이을용을 놓치고 큰 후회를 한다고 하더라. 사실 내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이을용이 FC 서울에 있다는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을용처럼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들이 많다면 도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 생각은 맞아 떨어졌고 난 지금 이을용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터키 언론에선 당신에게 ‘명장’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명장’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난 언론의 칭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칭찬은 한순간이다. 영원하지 않다는 소리다. 그래서 난 심플하게 세뇰 귀네슈로만 남고 싶다. ‘명장’이 아닌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 지도자로서 행복을 느끼는 귀네슈 말이다.
귀네슈 감독은 축구 인프라가 너무나 잘 돼 있는 한국의 축구 수준이 왜 최고가 못 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싱싱한 ‘재료’들로 재미있고 맛깔스런 ‘요리’를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이전보다 더 알차고 박진감 넘치는 ‘쇼’를 준비하기 위해 인터뷰를 마친 후 선수들이 기다리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다음 경기에서 그가 또 선수들이 어떤 ‘매직 쇼’를 펼칠지 기대된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