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창수는 지금 연세대 어학당에서 우리말을 공부 중이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최근 링에서 은퇴한 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홍창수(33)는 지난 10일 연세대 어학당에서 기자와 만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데 대한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아직 어눌하지만 한국 말을 듣고 쓸 수 있을 정도이고 지하철 노선도만 있으면 다니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지난 2월 16일, 이전의 북한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진짜’ 한국인이었다.
‘조총련계 재일동포 3세’ ‘북한 국적의 사상 최초 세계 챔피언’ ‘일본 사상 세 번째로 롱런한 챔피언(9차 방어 실패)’ ‘한국의 세계 챔피언 조인주로부터 챔피언 벨트를 뺏은 북한 국적의 선수’ 등등 33세의 길지 않은 인생 동안 민족 정체성 문제로 오랜 방황을 거듭했던 홍창수. 북한, 일본, 한국 등 세 나라에 ‘걸쳐있는’ 자신의 신분을 ‘한국’으로 못박고 지난 3월 27일 귀국해선 3개월 일정으로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다니는 홍창수를 만나 사연 많은 보따리를 풀어봤다.
조인주와 만남
“처음엔 안 만나려고 했어요. 미안해서였죠. 두 번이나 패배를 안겨준 사람인데 직접 얼굴 보기가 그렇더라구요.”
홍창수는 6차 방어전 상대였던 조인주(38·조인주복싱클럽 관장)와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2000년 8월 조인주로부터 챔피언 벨트를 빼앗은 뒤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리턴매치에서조차 조인주를 KO패 시킨 과거가 6년 만의 만남을 주저하게 했던 것.
지인의 소개로 어렵게 조인주를 찾아간 홍창수는 예상과는 달리 반갑게 맞아주는 조인주와 그 자리에서 의형제를 맺으며 링 밖에서의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처음 조인주 챔피언과 타이틀 매치를 벌이기로 결정했을 때는 너무 너무 긴장돼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어요. 더욱이 제가 최고의 선수라고 존경했었던 야마구치 게이지 선배를 완벽히 물리친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 ‘조인주’라는 이름은 굉장한 무게감과 두려움을 전해줬죠. 일본 언론에서도 제 도전을 ‘무모한 도전’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으니까요. 조인주 선수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10%도 안 됐어요. 그런데 그런 반응이 저에게 오기를 심어주더라구요. 정말 그 오기 덕분에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길 수 있었어요.”
조인주를 무너뜨린 홍창수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다. 특히 북한에서의 반응은 가히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국적을 가진 복싱 선수가 사상 처음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기 때문이다. 홍창수는 그 후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북한 인민체육인으로 선정됐으며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기도 했다. 2002년엔 북한의 조선우표사에서 ‘세계프로권투 왕자 홍창수’란 제목으로 우표를 발행한 스토리도 갖고 있다.
▲ 2005년 7월 홍창수가 가와시마 가쓰시게를 누르고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벨트를 1년 만에 되찾았다. 연합뉴스 | ||
홍창수는 세계챔피언 벨트를 차지한 이후 승승장구했다. 8차방어까지 성공했고 9차방어에서 가와시마 가쓰시게에 TKO패 당한 후 다음 해 그 선수를 상대로 재도전에 나서 다시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북한과 재일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권투 영웅’은 그동안 설로만 나돌던 은퇴를 지난 3월 15일 기정사실화하며 일본복싱위원회에 은퇴서를 제출했다. 통산 전적은 32승(8KO)3패1무.
“은퇴 선언 후 비로소 해방감을 맛봤어요. 그동안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언제까지 달려가야 하는지, 몇 차 방어까지 해야 ‘이젠 됐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방어전의 횟수가 쌓일수록 전 더욱 지쳐만 갔어요. 더욱이 국적 문제가 절 수렁으로 빠트렸습니다.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깊은 수렁에….”
홍창수는 서툰 한국말로 인해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걸 무척 버거워했다. 당시 자신이 느낀 갈등과 고민들, 그로 인해 번민의 나날을 보냈던 많은 시간들을 한국말로 전달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계속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 세 나라에 걸쳐 있는 사람이었어요. 국적은 북한이고 생활은 일본에서 하고 있고, 조상들 고향은 한국이고…. 계속해서 국적 문제로 고민하게 됐어요. 제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제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죠. 그러다 정상에서 내려와 공인의 무게를 벗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요. 제가 늘 마음 속에서 그리워했던 한국 사람으로 말이죠.”
국적 변경하는 데 5분
홍창수는 은퇴 전 국적 문제부터 해결했다.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있던 국적을 변경하겠다고 결심한 것. 아버지 홍병윤 씨에게 그 문제에 대해 의논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네 국적은 네가 결정해라”하는 말만 남기고 자유로운 선택을 권유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국적 변경하는 데 5분도 안 걸렸다는 사실이에요. 수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한 문제가 단 5분 안에 후다닥 처리되는 걸 보고 허탈과 어이없음을 느꼈죠. 그러면서도 홀가분했습니다. 그동안 일본 매스컴을 상대로 제 프로필에 북한 복서 운운하는 거, 제발 자제해 달라고 숱하게 부탁했었거든요. 그저 한 명의 권투 선수로 봐달라고 하면서. 이젠 그럴 필요도 없고 어디를 가서도 한국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했습니다.”
홍창수는 현역 시절 ‘조국통일’과 ‘원(one)코리아’라고 새겨진 트렁크와 가운을 입고 뛴 선수로 유명하다. 2003년 7차방어에 성공한 다음에는 “남과 북을 가르는 휴전선에 임시 링을 설치해 타이틀전을 치르는 게 꿈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조센와 히토쓰다(조선은 하나다)”라고 외치는 등 유난히 민족 동질감을 강조해 왔다.
영원한 챔프로 남고파
홍창수는 은퇴 직전인 지난해 말 프라이드FC에 진출한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특히 홍창수와 프라이드FC 챔피언 고미 다카노리의 대결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복싱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고 홍창수는 은퇴로 자신과 관련된 잡음을 마무리지었다.
“솔직히 프라이드로 진출하고 싶었어요. 특히 프라이드 쪽에서 저한테는 복싱룰을, 고미한테는 프라이드룰을 적용해 경기를 치르게 한다고 해서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복싱 쪽에서 난리가 났어요. 절 제명시킨다고 협박하질 않나, 제가 프라이드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마음 먹고.”
가라테 사범으로 활동했던 아버지 밑에서 운동을 배우다 가라테 도장 앞에 있던 복싱클럽에 눈길이 갔고 결국 어느 순간 그 안에서 글러브를 끼고 복싱을 시작하게 됐다는 홍창수. 국적을 변경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 여권을 발급받고 한국에 들어온 그는 한국어학당의 수업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받을 만큼 한국어 공부에 열심이었다.
얼굴에 그늘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유쾌, 통쾌, 상쾌하게 웃어 제치며 인터뷰를 이어간 홍창수는 자신의 좌우명을 ‘도험소보(道險笑步)’라고 소개했다. 즉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게 신념이라는 것.
“제가 태어난 일본 도쿄는 차가운 도시입니다. 제2의 고향인 오사카는 따뜻한 기운이 도는 곳이죠. 그런데 한국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더운 나라입니다. 저한테는 이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게 행복합니다. 국적을 바꿔서 행복한 게 아니라 원래 한국사람이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