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 이후 고소한 선수 외에 다른 선수도 이미 당한 적이 있다는 소문이 농구계에 쫙 퍼져 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정말 끔찍한 노릇이다. 여자농구 국가대표 사령탑 출신인 박명수 전 우리은행 감독(45)의 성추행 피소 사건이 그렇다. 지난 5월 23일 박 전 감독이 소속선수 A로부터 미국 전지훈련 도중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하자 농구계는 물론이고 스포츠계 안팎이 들끓고 있다. 박 전 감독의 성추행 여부의 진실에 대해서는 법원이 최종 판단할 일이지만 A 선수가 선수생명을 걸고 법원에 고소를 했고, 또 박 감독이 고소 한 달 전 농구계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돌연 사표를 던졌다는 점에서 의혹은 거세게 확산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전말과 함께 여자 운동선수들의 숨겨진 고충을 취재했다.
필자의 경험이다. 이번 사건이 터지자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1년 한 여자 프로농구팀의 숙소로 취재를 나갔고, 친분이 있던 감독의 권유로 숙소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그런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남자인 감독과 코치 그리고 필자까지 식사시간 내내 한 번도 ‘잡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자리에 앉자마자 수저와 시원한 물이 배달됐고 심지어 고기도 다 익으면 집어먹으면 됐다. 밥을 먹다 말고 달려온 두 명의 선수가 고기를 불판으로 나르는 것은 물론 고기가 먹기 좋게 잘 익혀지도록 쉴 새 없이 젓가락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색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시 감독과 코치의 태도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이번 사건에서 A 선수는 언론 인터뷰와 고소장을 통해 “박 감독의 호텔방을 청소하고 나오는데 감독이 자신을 방으로 불러 성추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성추행에 앞서 “왜 여자선수가 감독 방을 청소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호텔이라면 하우스키퍼가 따로 있을 것이고, 또 없다고 해도 남자 감독 방을 여자선수가 치우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단체종목의 여자선수들은 외부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감독의 권위에 눌려 있고 심한 경우 인권을 유린당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나돌고 있다. 여자선수들은 중·고교 시절부터 합숙생활을 하면서 남자 지도자는 하느님보다 더 무섭게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는 게 보통이라는 것이다.
성추행은 아니지만 수년 전 한 여자프로농구단의 감독이 소속선수를 끔찍할 정도로 폭행해 해임된 바 있다. 감독이 경기출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선수의 장래를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기에 벌어졌던 일이다. 이런 일방적인 관계에서 약자가 강자의 요구에 불합리하다며 항거하기는 쉽지 않다. 약자가 10대 후반이나 20세 전후의 여성이고 성적인 일이라면 더욱 문제를 공론화하기조차 어렵다. 이는 단체종목뿐 아니라 개인종목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지난해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육상 대표팀 코치가 전지훈련 도중 외국인들 앞에서 여자 대표선수를 구타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번에도 A 선수는 고소장을 통해 ‘첫 성추행을 당하고 20분 뒤 감독의 명령 때문에 다시 방으로 가 성추행을 당했다. 선수생활을 계속하려면 감독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팀 내에서는 ‘신’과 같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감독 앞에서 팀의 신인급 선수가 반복해서 성추행을 당하는 비참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박명수 전 감독 파문에 앞서 몇 년 전 B 여자농구단의 C 감독도 ‘선수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합의가 이루어져 법정공방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는 농구계의 공공연한 비밀로 해당 감독은 아직 농구계에 컴백하지 못하고 있다.
박명수 전 감독도 이번 고소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도 다른 소속선수 두 명과 ‘미묘한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익명의 요구한 농구인 K 씨는 “둘이 감독을 놓고 질투와 시기 등 미묘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박 전 감독은 국가대표 사령탑을 지내고 우리은행을 국내 최강팀으로 이끈 현역 최고의 여자농구 지도자였다. 프로스포츠에서 일반화된 계약직이 아닌 우리은행 부장급 정직원이었다. 이런 박 전 감독이 지난 4월 초 미국 전지훈련 도중 급히 귀국해 바로 사표를 냈고, 또 언론에는 이를 알리지도 않아 의혹이 꼬리를 물었었다.
박 전 감독과 친분이 두터운 D 감독은 “(박)명수가 이번에 큰 실수를 했다. 전지훈련 도중 호텔에서 A 선수에게 실수를 했고 이 모습이 동료선수에게 발각됐다. 선수단 전체가 이를 알게 됐고 한 고참선수가 한국에 있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스포츠계에 밝은 이 부모는 다른 부모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고 이를 우리은행 최고위층에 알려 잘나가던 박 감독이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박 감독은 미국에서 사의를 밝혔고 귀국 후 바로 사표를 제출했다”고 설명했다.
당초 A 선수는 선수생활과 개인의 미래를 위해 이 사건을 덮어두려고 했으나 박 전 감독과의 합의과정에서 인간적인 분노를 느껴 법에 호소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A 선수 측은 박 전 감독의 친필이라는 사과문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A 선수의 고소로 사건의 내막이 알려지면서 박명수 전 감독은 물론이고 사건을 덮어두려 했던 우리은행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고 있다. 우리은행 측은 스타지도자인 박 감독을 해임하면서도 언론에 이를 알리지 않았다. 우리은행농구단의 김정현 홍보실장은 “박 감독이 새롭게 바뀐 우리은행 고위층과 마찰이 있었다. 전지훈련을 가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 맘대로 강행하다 미운 털이 박힌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박명수 전 감독은 현재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개인적인 공부를 위해 감독에서 물러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처는 덮어둘수록 곪는 법이다. 여자선수들의 인권유린은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문제가 돼왔다. 실업 여자배구팀의 감독을 지냈던 한 배구인은 “여자 배구계 일각에서도 뒷말이 나돈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비록 ‘사후약방문’격이지만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이 선수의 고충을 받아줄 상담전화를 개통한다고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하루빨리 국내 여자선수들의 인권에 대한 실태조사와 대책마련이 이뤄져야 한다.
여자 프로농구 감독 중 최연소인 신세계 여자농구단의 정인교 감독은 “마치 조폐공사 직원이 돈을 돈으로 인식하지 않듯 여자팀 지도자는 소속선수를 여자로 봐서는 절대로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유병철 스포츠 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