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12일 동교동계 모임을 계기로 정치권 주변에선 노무현-김대중 진영 간의 협력설이 돌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6월 6·15 남북정상회담 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악수하는 노 대통령과 DJ. | ||
인사권을 둘러싼 당청 갈등이 채 봉합되기도 전에 터진 청와대 인사 청탁 논란으로 노 대통령은 그야말로 ‘레임덕’에 직면해 있다. DJ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방북이 무산되는 등 자신의 최대 치적인 햇볕정책이 점차 퇴색되는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어려운 처지에 몰려 있는 형국이다. 위기를 돌파할 해법 찾기도 쉽지 않다. DJ가 최대 주주였던 민주당은 군소 정당으로 몰락해 DJ의 숙원을 해결하기는커녕 지원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한편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두 사람 모두 역사 속에 그대로 매몰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참여정부 출범이후 노 대통령과 DJ가 애증관계로 얽혀 상호 앙금을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지금이라도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위기감과 맞물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노무현-DJ 대권 협력설’이 여권을 중심으로 정치권 주변에서 나돌아 정계개편과 관련 주목되고 있다. 협력설의 내막을 추적한다.
노 대통령과 DJ는 현재의 민주당에 뿌리를 둔 전·현직 대통령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지난 2002년 대선 과정에서 DJ가 노 대통령을 막후 지원했을 것이란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노 대통령이 불리한 여건을 딛고 대권을 거머쥐게 된 배경에는 DJ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DJ의 최대 치적인 햇볕정책에 먹구름을 드리운 이른바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 사이에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당시 특검 수사 과정에서 DJ정권 당시 경제팀을 이끌었던 이근영·이기호 씨 등이 전격 구속됐고, 핵심 측근인 한광옥·임동원 씨, 박지원 전 실장의 비서 등이 특검팀에 소환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결국 2004년 1월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면서 민주당은 두 동강 났고, DJ와 노 대통령의 앙금의 벽도 높아져 갔다. 여기에 참여정부의 개혁 칼바람에 구주류 세력 및 DJ의 주변인물들이 대거 사법처리됐다는 점도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들은 총선이나 재보선 등 선거철만 되면 DJ에 대한 애정공세를 펼쳐온 것도 사실이다. 호남권 및 과거 민주세력에 대한 DJ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해 DJ의 방북이 무산되긴 했지만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 관계자들이 DJ의 방북을 물밑 지원한 배경에도 호남 민심을 겨냥한 ‘DJ 끌어안기’ 포석이 내포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노 대통령과 DJ의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가 최근 몇 가지 여권의 움직임과 얽히면서 자연스럽게 ‘노무현-DJ 협력설’로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이 우선 주목하는 것은 청와대가 이번 8·15 광복절 특사와 관련해 DJ의 핵심 측근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박지원 전 실장을 특사 대상자에 포함시킨 사실이다. 박 전 실장은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막판에 사면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일단 DJ로서 보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열리우리당과 민주당에 각각 속해 있던 동교동계 인사들이 지난 12일 분당 이후 처음으로 모임을 가진 것도 정치권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재료다.
김영삼 전 대통령 계보인 상도동계와 양대산맥을 이뤄온 DJ 계보인 동교동계의 파워가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지만 동교동계는 여전히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핵심 요직에 두루 포진하면서 막강 파워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이끌고 있는 비상대책위원 15명 중 5명이 동교동계다. 이중 문희상 전 의장, 정동채 배기선 이강래 의원 등은 DJ 비서 출신으로 당내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또 김한길 원내대표는 DJ의 당선자시절에 비서실장을 지냈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맡기도 했다.
민주당 내 동교동계는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한화갑 대표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처럼 여야 정치권에서 여전히 막강 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동교동계가 모임을 가진 명목은 DJ 도쿄 피랍 생환 33돌 축하. 모임에는 열린우리당 배기선 이석현 염동연 정동채 전병헌 의원과 민주당 한화갑 대표, 배기운 사무총장, 김옥두 정균환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 30여 명이 대거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모임에 쏠린 정치권 안팎의 시선을 고려해 통합론과 정계개편 등 민감한 현안 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자제하는 분위기였지만 묘한 여운을 남기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열린우리당 내 대표적 통합론자인 염동연 의원은 “개혁정권의 지속적 승리를 위해 힘을 모으자”며 통합 논의 가능성을 시사했고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모임이) 공감대가 이뤄지는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이고 지혜롭게 논의하면 생산적이 될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배기선 의원은 “옛 동교동 비서진들 사이에서는 공감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며 의미있는 발언을 했고 전병헌 의원은 “동교동계는 같은 방향에서 같은 길을 걸어왔기에 의미가 있다”며 동질감을 표현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여당의 한 중진의원은 기자에게 “범민주세력 및 호남권 재통합이 선행되지 않고는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한 만큼 범여권 통합에 동교동계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중진의원은 또 노 대통령이나 DJ와의 교감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두 분 모두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동서화합과 범민주개혁세력 결집이라는 대의명분에 부합되는 역할을 동교동계가 맡는다면 반대할 명분이 없지 않겠느냐”며 “시대적 소명과 국민적 공감 속에 대통합을 이끌어 낸다면 두 분도 지지할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는 동교동계가 앞장서서 양당 통합을 추진할 경우 통합론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또 통합론 성사 여부를 떠나 동교동계가 다시 힘을 합칠 경우 노 대통령과 DJ의 불편한 관계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연말을 전후해 본격화될 정계개편과 대선정국에서 동교동계가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노무현-DJ 대권 협력설’도 이 같은 동교동계의 향후 역할 및 정치 행보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협력설은 두 사람 모두 정치 9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로 정치 수읽기에 능숙한 만큼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오면 손을 맞잡을 것이란 게 골자다. 특히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특정 대선주자를 지원할 경우 그 시너지 효과 또한 엄청날 것이란 분석도 여기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정치 역정을 함께했던 범민주개혁세력들을 다시 결집시킬 수 있고 영남(노 대통령)-호남(DJ) 대화합이라는 대의명분도 충족시킬 수 있다. 여기에 두 사람의 결합은 차기 대선정국을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 대결구도로 몰고가 2002년 대선 승리를 재현할 기폭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 협력설의 근거다.
물론 두 사람의 대권협력설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황은 아직 포착되지 않고 있다. 정치 호사가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대권 시나리오 중 하나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정치는 생물’이라는 DJ의 말처럼 누가 누구와 손잡고 또 어떤 정치세력이 서로 등을 돌릴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노무현-DJ 협력설’도 현 시점에서는 다소 무리라는 지적도 없지 않지만 최근의 여러 움직임들이 얽히고 설키면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시각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