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우는 평소 롤 모델이었던 이영표와 대표팀에서 경쟁이란 이름으로 함께 생활한 것에 대해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대표팀이 원정 경기를 마치고 귀국한 뒤 다시 ‘헤쳐 모였던’ 지난 17일, 오후 12시까지 대표팀 입소를 앞둔 김치우와 합정역 부근에서 만나 파주 대표팀트레이닝센터로 향하는 차에 동승하며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귀국한 날(15일) 즉시, 설사와 복통으로 병원을 들락거렸다는 김치우는 기자를 만날 때의 표정도 썩 밝지가 않았다. 처음엔 혼자만 아픈 줄 알았다가 오범석, 이정수, 설기현 등이 같은 증세로 고생했다는 걸 알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하며 곰곰이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른 원인이 없었다고.
무명에서 청소년, 올림픽 대표를 거쳐 이영표와 함께 대표팀 주전 경쟁을 겨루는 성장세를 보인 ‘치우천황’ 김치우, 직접 만나보니 ‘순수 청년’이 따로 없었다.
차 안에서 만난 김치우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진찰을 받았다는 그는 이틀간 집에서 앓아누워 있었다면서도 웃음은 잃지 않았다. 말수 적고 수줍음 많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데 조금은 어색해 하는 김치우와의 인터뷰를 가급적 그의 말투를 그대로 표현해 정리해 본다.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장염이었던 거예요?
▲병원에서 그렇다고 하네요.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속이 안 좋았거든요. 처음엔 저 혼자만 아픈 줄 알았는데 (오)범석이랑 통화하다 몇몇 선수들도 같은 증세로 고생한다고 들었어요. 환경이 바뀌고 긴장이 풀리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요르단과 투르크메니스탄 원정 경기에 대한 부담이 많았나 봐요.
▲부담요? 많았죠. 서울에서 요르단과 2 대 2로 비기는 바람에 그 부담이 배가 됐던 거구요. 원정 경기도 힘든데 꼭 이겨야 한다는 각오들이 장난 아니었어요. 현지에서도 매일 긴장 속에서 훈련과 생활을 병행했었어요. 어느 때보다 많이 준비하고 경기에 임했던 것 같아요.
―지난 14일, 투르크메니스탄전에 이영표를 대신해 선발 출장했어요. 왼쪽 윙백 자리가 김동진을 포함해 경쟁이 엄청 치열하죠?
▲제가 생각해봐도 왼쪽 자리는 오른쪽에 비해 잘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서 오히려 재미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영표 형이야 워낙 뛰어난 선수라 제가 감히 경쟁 상대가 될 수는 없지만 지난 번 투르크메니스탄전을 앞두고선 영표 형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제게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요. 기자 분들은 영표 형과의 경쟁에 대해 자주 질문하시는데 전 도전하는 입장이라 큰 부담이 없어요. 제가 영표 형보다 나은 점이라곤 나이가 젊다는 것? 저도 영표 형 나이가 됐을 때 그런 위치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경기 전날 허정무 감독님이 미리 얘기해 주셨어요. 전날부터 준비할 수 있어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기분요? 좋았죠. 영표 형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뛰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어요. 다행히 (김)두현이 형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기록도 올렸구요.
―이번에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 중인 이영표, 설기현의 부진이 눈에 띄었어요. 선수 입장에서 두 선배의 부진이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보나요?
▲소속팀에서 게임에 출전하지 못했던 부분이 가장 컸다고 봐요. 경기 감각은 정말 중요하거든요. 두 형들이 경기에 출전 못하다 대표팀에 합류하는 바람에 제 컨디션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해요.
김치우는 평소 이영표를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가까이 하기엔 먼 ‘선배’로만 여겼던 이영표와 대표팀에서 ‘경쟁’이란 단어를 안고 함께 생활한 부분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월드컵 축구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을 치르며 언론과 여론의 비판이 만만치 않았어요. 대표팀에 속한 선수 입장에서 어떤 지적들이 가장 서운했어요?
▲경기 내용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분명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는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선수들의 정신 상태나 책임감, 집중력 등에 대해 가열차게 비난하신 분들의 글을 보면서 약간은 서운하더라구요. 24명 중 선발로 나가는 11명의 선수들이라면 책임감만큼은 누구 못지 않을 거예요. 그라운드에서 대충 뛰다가 들어오려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죠. 정신력이 해이해졌다는 지적도 참 마음 아프게 하는 소리예요.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해 넘어서야 하는 중요한 관문들을 앞에 놓고 ‘정신 놓고’ 게임 뛰는 선수는 정말 없어요. 대표팀에 대해 비난과 응원을 비슷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서울에서 치른 요르단전 이후 선수들 사이에 많은 대화들이 오고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형들이 나서서 후배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했어요. 평소 말수 적은 영표 형과 기현이 형도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셨구요. 누구보다 남일이 형이 후배들을 잘 이끌어 주셨어요. ‘한번 잘 해보자’는 말도 하셨구.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안)정환이 형이었어요. 이번에 대표팀에서 처음 뵈었을 때 포스가 대단하시더라구요. 쉽게 말도 못 붙일 것 같았는데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서시는 거예요. 훈련도 어린 선수들 보다 더 열심히 하셨어요. 말보다는 몸으로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너무나 잘생긴 분이 몸을 아끼지 않는 희생 정신을 보이니까 완전 멋있더라구요(웃음).
김치우는 2004년 인천유나이티드FC에 입단했다가 그 해 겨울 한국 선수 최초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1부리그 파트리잔 베오그라드에 6개월 동안 임대됐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질문으로 화제를 바꿨다.
▲ 밑의 사진은 2007 스포츠토토 한국축구대상 시상식에서 베스트11에 꼽힌 전남 김치우(오른쪽에서 두번째). | ||
▲먼저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할 게요. 왜 세르비아였냐? 저도 몰라요. 구단에서 거기로 보냈으니까, 선수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잖아요. 가라니까 가기 싫어도 가야 됐던 거죠. 실제 세르비아에 가서도 참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 상황들이 너무 싫었고 축구를 포기하고 도망칠 생각도 여러 번 했어요. 인천 팀에 세르비아 출신의 용병들이 있어 아주 낯설진 않았는데 설마 제가 그 나라에서 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더욱이 월급도 안 나오고 통역도 없는데다 먹는 것도 부실한 바람에 궁핍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처음 가서 한 달 동안 울기만 했던 것 같아요. 너무 서러웠고 너무 서운했고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팠거든요. 그때는 지옥같았던 생활도 지금 돌이켜 보면 경험면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나이가 어렸던 게 다행이었죠.
―얼마 전에도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가 또 기사화됐더라구요. 절 포함해 기자들 입장에선 남다른 가정사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거든요.
▲(이혼으로 혼자서 아들을 키웠던 어머니는 김치우가 중3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요. 기자 분들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저한테는 아픈 내용이에요. 만약 어머니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제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하셨을 거예요. 중3 때까지만 해도 전 별 볼 일 없는 축구선수였어요. 단 한 번도 제대로 뛰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가끔 할머니가 어머니 얘길 꺼내요. 태극마크 달고 대표팀에서 뛰는 걸 보고 돌아가셨더라면 한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라면서요.
―아버지는 만나나요?
▲(부모 이혼 후 김치우는 단 한 번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한다. 어머니 임종을 앞두고 아버지를 만나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에 와 줄 것을 간청했는데 아버지는 바쁘다며 거절했단다) 연락 안 해요. 잘 살고 계시는데 굳이 제가 만날 필요도 없구요. 저 혼자 지내는 거 괜찮아요.
―미안해요. 이런 질문을 해서. 분위기를 바꿀게요. 신문이 나갈 때는 22일 북한전도 끝난 후인데, 글쎄요, 김치우란 선수한테 ‘월드컵’은 어떤 의미일까요.
▲2002년 월드컵 당시 전 청소년대표팀에 속해 있었어요. 파주NFC에 월드컵 대표팀 때문에 입소도 못하고 금촌 어느 모텔에서 숙식하며 훈련장으로 출퇴근했었죠. 그때 월드컵 대표팀이랑 연습 경기를 치렀는데 일방적인 게임이었어요. 우리가 하프라인을 거의 넘어가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차두리, 최성용 선배를 전담했는데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엄청 주눅들었어요. 하여튼 어린 나이에 본 월드컵 대표팀은 너무 대단했고 멋있었고 부러웠죠.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월드컵은 축구선수들의 로망이에요. 앞으로 최종예선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본선 진출을 이룰 수 있도록, 그래서 드디어 김치우가 월드컵 대표팀 멤버로 뛸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할게요.
김치우에게 축구는 전부였다. 축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복잡하고 사연 많은 가정환경에서 제대로 숨 쉬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축구는 자신한테 ‘학교’나 마찬가지라는 ‘느낌표’를 전한다. 배움, 깨달음, 인간관계, 그리고 삶의 목표를 갖게 해준 인생의 ‘은인’이나 다름없다는 설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