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술을 해봤다는 이천수. 그는 그라운드의 야생마로 돌아가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재활훈련에 몰두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가출, 폭력 등으로 거리에 내몰린 청소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다시 학교와 가정으로 돌아가게끔 정신적인 치유를 담당하는 바나나하우스에서의 이천수는 축구선수보단 그들의 ‘형’ ‘선배’로 존재했다.
최근 페예노르트 방출설과 K-리그 U턴설 등으로 심경이 복잡한 이천수는 수술과 재활로 보내는 일상 속에서 바나나하우스 학생들과의 만남을 새로운 인연으로 마음에 담았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수원의 한 피자 집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이천수를 알아보는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들을 느끼며 허기진 배를 피자로 채워갔다.
여전히 축구선수 이천수는 당돌하고 싸가지 없으며 거친 언행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동안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준 행동들을 보면 ‘아니다’라고만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런 부분들이 이천수의 전부로 대변되는 건 안타까운 현실이다.
청소년 쉼터 ‘바나나하우스’를 방문한 이천수는 ‘손님’보다는 그 구성원들과 함께 어울리려 했다.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인생의 목표와 꿈이 있어야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물론 사진도 찍고 사인회도 갖는 등 일반적인 행사도 겸했지만 그 안의 이천수한테선 축구선수의 모습보단 자연인에 더 가까웠다.
“저도 어렸을 때 그들과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거든요.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웃음). 그래서 바나나하우스를 향하는 동안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라고요. 제 자신도 잘 추스르지 못하는데 무슨 자격으로 그들 앞에 나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막상 만나보니까 애들 표정이 밝았어요. 이전 제가 사춘기 때 보였던, 불만 가득하고 반항아적인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 청소년기의 경험을 들려주며 마음을 열어갔어요.”
어떤 내용의 얘기 보따리를 풀었느냐고 물었다. 바나나하우스 학생들과 이천수가 담소를 나누는 공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 궁금했다.
“청소년기 때 갑자기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어머니는 버스 닦는 일을 하시고 형은 대학도 못 가고 배를 탔어요. 마음 붙일 곳이 없었죠. 그때 제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잡아준 게 ‘축구’였어요. 그 얘기를 꺼내자 굉장히 집중해서 듣더라고요. 전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진 거잖아요. 제 인생의 첫 걸음이자 선택이 축구였다면 그 친구들은 아직 첫 걸음을 안 했다는 차이가 있는 거죠. 시련과 아픔이 있어도 마지막에 웃으려면 더 이상의 방황은 접고 가정으로, 학교로 돌아가자는 얘기도 덧붙였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 친구들보다 제가 더 두려워요. 제 인생을 책임져야 하니까.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생각만 해도 너무 머리가 아프고 복잡해요.”
▲ 지난 4월 페예노르트 이천수의 경기 장면. | ||
“그중 한 명은 연예인 매니지먼트 사장이 됐고 다른 한 명은 여러 개의 주점을 운영해요. 그런 걸 보면 끈기 있고 욕심 있고 열정 있는 사람은 뭘 해도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축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한테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인생 자체가 쉽게 풀리는 것과는 인연이 없나 봐요. 꼬였다 풀렸다를 반복하니까.”
이천수에게 2010월드컵 최종예선전에 출전하는 대표팀의 조 편성에 대해 물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천수도 여러 차례 상대해봤던 국가다.
“저도 대표팀에 있을 때 원정 경기를 치러봐서 알지만 다른 곳보다 중동지역 원정은 특히 힘들어요. 심리적인 면도 그렇고 음식, 주변 환경, 심지어 공항 출입할 때부터 짜증이 엄습해 오거든요. 만만치 않은 조편성이에요. 긴장들하고 선수들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야 해요. 자칫 잘못하면 최악의 사태가 올 수도 있으니까.”
이천수의 바람은 최종예선전에서 뛰는 것이다. 3차예선전까지는 ‘옵저버’의 입장으로 TV를 통해 경기를 지켜봤다면 최종예선전부터는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축구선수 이천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땀을 흘리며 재활훈련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말로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요. 직접 뛰면서 몸으로 보여줘야지. 지금 대표팀에서는 2002년 때의 절박함, 협동심, 끈끈한 정, 이런 것들이 부족한 것 같아요. 경기를 뛰든 안 뛰든, 모든 선수들이 한마음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잘 안 보여요. 얼마전 대표팀에 계시는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 분도 같은 말씀을 하셨거든요. 홍명보, 황선홍 감독처럼 중심을 잡아줄 만한 선배의 역할도 필요하고요. 2002년 때는 선배들이 워낙 짱짱해서 주전 자리다툼이 굉장히 치열했어요. 하고자 하는 목표와 욕심도 컸고요. 지금 선수들은 좋은 대우를 받고 운동을 해서 그런지 목표가 작아지는 듯해요.”
8월 말쯤 되면 재활이 끝나 그라운드에 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이천수는 허정무 감독이 불러만 준다면 최종예선전 원정 경기서부턴 대표팀 일원으로 뛰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생애 처음으로 수술을 해봤다는 이천수. 수술 전에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해 공포심까지 느꼈지만 지금은 수술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 6월 29일 수원 청소년 쉼터를 방문해 사인볼을 나눠주고 있는 모습. | ||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다리 아픈 게 힘드냐? 아니면 마음 아픈 게 더 힘드냐?’라고.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느낌을 에둘러 물어본 것이었다.
“글쎄요. 아무래도 마음 아픈 게 더 힘든 것 같아요. 믿음을 배신당한 느낌은 겪어보지 않고선 헤아리기 힘들어요. 수술이야 제가 선택한 거지만 마음 아픈 건 제가 원해서 아픈 게 아니잖아요. 이젠 많이 잊혔어요. 더 빨리 잊힐 수 있는 건 뒤따르는 소문과 얘기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이천수는 잦은 사생활 노출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남녀의 만남과 교제가 공인의 신분이다보니 알려지기 마련이고 그 상대가 연예인일 경우엔 더더욱 세인들의 ‘안줏감’으로 회자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죠 뭐. 제가 누굴 사귄다고 광고한 것도 아니고, 어찌어찌하다 알려졌는데 그 와중에 만남을 지속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진 것이고, 그 상대가 연예인이라 관심도, 욕도 더 많이 받는 것이고요. 축구선수는 축구로 인정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데도 이천수라는 사람은 사회면과 연예면에 더 자주 언급이 되네요. 앞으론 축구선수로서만 회자됐음 좋겠어요.”
이천수는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보단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고 챙겨주는, 그런 여자를. 그래서 지금까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올인’해보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기자가 이천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페예노르트 방출설이 터지기 직전이라 이천수는 “하루 빨리 그라운드에 복귀해서 소속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이후 자신의 거취를 둘러싼 복잡한 상황들이 연출되었지만 이천수는 당분간 귀를 닫고 재활에만 몰두하고 싶다고 말한다. “제 거취를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에이전트나 소속팀에서 하는 일이지. 분명한 건 전 다시 일어설 것이고 다시 그라운드를 뛰어다닐 겁니다. 그곳이 어디가 됐든 말이죠.”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