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을 한 달여 남겨놓고 대표팀에 복귀한 유남규 감독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이 땅을 떠날 생각도 했었다고 고백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진통 끝에 올림픽탁구대표팀에 복귀한 유남규(40) 현정화(39) 감독은 김해전지훈련지에서 만난 기자에게 시간의 부족함을 호소했다. 천영석 전 회장의 독선적이고 투명하지 못한 협회 운영에 불만을 품고 남녀대표팀 사령탑에서 동반 사퇴 했던 두 사람은 7개월가량 장외 투쟁을 벌이며 천 전 회장의 퇴진을 요구한 바 있다. 결국 지리한 싸움 끝에 천 회장이 물러났고 거물급의 대기업 총수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새로 추대되면서 탁구협회의 내분은 어느 정도 진정 상태로 접어들었다.
조양호 회장이 탁구협회 수장 자리를 맡게 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날 현정화-유남규 감독은 한결 밝고 차분한 모습으로 기자와의 인터뷰에 나설 수 있었다.
▶▶▶ 모텔과 탁구대표팀
경남 김해시의 한 모텔촌. 대표팀 버스가 아닌 한 실업팀 버스를 빌려 이용 중인 탁구 대표팀 선수들이 오전 훈련을 마치고 부산 해운대로 나들이를 갔다가 저녁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모텔 옆의 주차장 입구로 선수들이 들어가는 가운데 뒤늦게 버스에서 내린 유남규, 현정화 감독이 나란히 모텔로 향하는 모습에선 실로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모텔에 최소한 ‘올림픽탁구대표팀을 환영합니다’란 플래카드라도 걸렸다면 두 사람의 등장이 의심받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 우연히 두 사람만 봤다면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법한 분위기였던 것.
“이게 탁구대표팀의 현실입니다. 적어도 올림픽대표팀인데 호텔도 아닌 모텔에서, 식당도 없는 이런 곳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비극 아닙니까? 야구나 축구대표팀 선수들한테 이런 환경이 주어졌다면 아마 난리 났을 겁니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주장을 확실히 펼치기로 유명한 현정화 감독이 대표팀의 모텔 생활에 대해 강한 논조로 비난을 퍼부었다.
▶▶▶ 유남규-현정화의 인연
부산 출신으로 고향까지 같은 두 사람은 초등학교 4, 5학년 때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 청소년-성인국가대표를 거쳐 1988년 서울올림픽 단식(유남규)과 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역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30여 년 동안 마치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니다보니 일반 팬들은 두 사람이 부부인 줄 착각하는 일이 생길 정도.
지난해 12월 노총각 딱지를 뗀 유남규 감독은 이런 에피소드를 곁들인다.
“제가 결혼을 발표한 인터뷰 기사에 어떤 분이 ‘언제 현정화랑 이혼했냐?’면서 능력도 좋다고 댓글을 달아놓으셨더라고요. 그런 오해 자주 받아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오빠, 동생 사이로 함께 지냈으니까요. 현정화 선생이 다른 건 몰라도 의리는 끝내줘요. 협회 내분으로 길거리 투쟁을 벌였을 때도 남자들보다 더 씩씩하고 강경했어요. 아내가 인생의 동반자라면, 현 선생과는 탁구의 동반자라고나 할까? 존재 자체가 든든하죠.”
▲ 감독 복귀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도망 가고 싶었다는 현정화 감독은 선수들의 전화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 ||
“정말 배신감 느꼈어요. 15년간 모셨던 스승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제자를 내친 셈이었으니까요. 제가 잘못이라도 해서 잘린 거라면 수긍이라도 가죠. 이건 완전히 거짓말로 모함을 해서 내친 거니까 정말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아내가 반대하더라고요. 나갈 땐 나가더라도 명예회복을 하고 나가자면서. 지금은 다 용서했습니다. 아니 무덤덤합니다. 그분은 평생 다리 뻗고 못 주무실 겁니다.”
▶▶▶ 백의종군의 심정
대표팀에서 동반 사퇴했던 두 사람이 다시 대표팀으로 들어오기까지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사연들이 숨어 있다. 그런 가운데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상황에서 다시 대표팀으로 복귀한 이유가 뭘까.
현정화 감독은 “올림픽이 아니었다면 절대 복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우리들이 기름을 끼얹고 불구덩이로 뛰어든 셈이에요. 잘하면 본전이지만 못하면 피박에 독박인 거잖아요. 처음엔 대표팀 복귀 제의를 받고 도망 가고 싶었어요. 한 달 남겨놓고 대표팀을 맡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선수들이 전화를 하더라고요. ‘언제 들어오시냐’면서. 들어가도, 안 들어가도 욕 먹을 거라면 들어가서 욕 먹자고 생각했고, 어차피 메달 못 따면 또 욕 먹을 거, 한 번 해보고 욕 먹자고 결심했습니다.”
유남규 감독은 대표팀 복귀를 결정한 다음 날 김해에서 훈련 중인 선수들을 만나러 내려오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었다고 고백했다.
“너무 오랜만에 선수들 얼굴을 보는 터라 무척 긴장되더라고요. 선수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걱정도 됐고요. 첫 날은 약간 서먹하다가 다음날 연습부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어요. 8년 가까이 대표팀 선수들과 호흡을 맞췄기 때문에 선수들 장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선수들도 많이 편안해 하더라고요.”
올림픽에 출전하는 남자대표팀은 유승민(삼성생명) 오상은(KT&G) 윤재영(상무)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이어 또 다시 금메달 획득을 노리는 유승민은 세계 최강 중국의 벽을 넘어야 올림픽 2연패를 꿈꿀 수 있다. 이에 대해 유남규 감독은 “훈련이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한다면 승산이 없는 게임은 아니다”라면서 “중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집중력과 정신력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남자에 비해 여자대표팀은 조금 더 갑갑한 상태.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김경아, 중국에서 귀화한 당예서(이상 대한항공)와 박미영(삼성생명)이 출전하는 올림픽에서 최소한 동메달 이상을 목표로 하지만 현정화 감독은 “솔직히 지금 상태론 동메달 따기도 힘든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동안 선수들이 훈련을 잘해 왔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은 남은 시간 동안 수정 보완해 나갈 것”이라며 희망의 애드벌룬을 띄웠다.
“올림픽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외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어요. 메달 획득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경기에 임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노출됐을 때 몸이 ‘먹통’돼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에다 상대 선수의 강한 반격 등이 정신적 공황 상태를 만들기도 하거든요. 정말로 훌훌 마음을 털고 져도 괜찮다는 자세로 들어가야 해요. 남은 시간 동안 선수들과 그런 교감을 나눌 계획입니다.”
현정화 감독의 각오에 유남규 감독도 이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안 될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우리가 장외 투쟁을 벌이며 했던 행동들이 헛되지 않도록 올림픽에서 반드시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리도록 노력할 겁니다.”
현재 대표팀에는 서상길 남자팀 감독과 윤길중 여자팀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지만 유남규-현정화 감독이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선수단을 운영 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름 뒤에 붙는 타이틀이 ‘코치’가 아닌 ‘감독’인 것. 부디 베이징에서 아테네의 기적이 또 다시 재현되길 소원할 따름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