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상 치료 때문에 귀국하자마자 다시 선수촌에 들어간 이배영. 그는 전국체전에 대비해 또다시 투혼을 불태우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21일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이배영은 예의 그 ‘살인미소’를 터트리며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귀국하자마자 단 하루도 편히 쉬질 못했는데도 올림픽 동안 자신을, 또는 태극전사들을 응원해준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방송과 언론 매체의 인터뷰 요청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값진 드라마를 보여주며 국민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선사했던 이배영. 너무나 인간적인 매력의 소유자인 그와의 태릉선수촌 데이트를 소개한다.
2004아테네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이배영에게 아테네 때와 베이징 올림픽 이후의 체감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물었다. 입담의 대가답게 경쾌한 설명이 곁들여진다.
“아테네 때는 메달을 따서 그런지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꼴찌를 해서인지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많네요. 메달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오히려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격려해주시는 분들 때문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상 치료차 조기 귀국했던 이배영은 가는 곳마다 자신을 반기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의 배려와 마음 씀씀이에 큰 감동을 먹었다고 한다. 메달을 못 따고도 이렇게 환대를 받는 선수는 드물지 않겠냐는 그의 말 속에는 진심과 감사가 어우러져 있었다. 말 잘하고 여운까지 안기는 이배영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옮겨 본다.
―요즘 인기가 장난 아니에요. 귀국하고 나서 더 바빴다면서요?
▲오늘 프로야구 시구 부탁까지 받았어요. 26일 잠실에서 LG 경기 때 시구를 해달라는 얘길 듣고 기분이 참 묘하더라구요. 제가 한 것에 비해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도 해요. 어떤 누리꾼이 제 기사에다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느냐’란 댓글을 달았나봐요. 순식간에 몇 백 개의 리플이 달리면서 그 분 아이디를 추적하겠다고 압박을 가했다고 들었어요. 이런 관심이 고맙기도, 부담스럽기도 하네요.
―역도 경기는 하루에 끝나잖아요. 4년을 준비했던 시간들에 비하면 너무 짧은 순간에 끝나버려 허무하기도 할 것 같아요.
▲하루 동안 기대와 꿈을 부풀리다가 하루 만에 다 털어 버릴 수 있어 좋아요. 이번에도 그랬어요. 비록 꼴찌였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없었거든요. 역도장을 나서는 순간,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미련을 버렸어요.
▲ 다리 부상에도 끝까지 바벨을 놓지 않았던 이배영의 투혼 모습. 연합뉴스 | ||
▲난 금메달을 따려고 올림픽에 갔던 건 아니에요.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 자신을 얻기 위해서 갔던 겁니다. 만약 금메달을 목표로 했다면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요. 경기력도 저하되고 불안 요소도 커지고요, 감정 조절 능력도 떨어집니다. 후회 없이, 모든 걸 다 쏟아 부어 재밌는 올림픽, 기억에 남는 올림픽이 되길 바랐어요. 결국 꼴찌를 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올림픽이 되고 말았지만요.
―금메달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건 쉽게 납득이 안 돼요. 그런 목표 없이 고된 훈련을 견뎌낸다는 건 어려운 일 아닌가요.
▲솔직히 제 마음 속에선 ‘금메달을 목표로 하자, 아니야 욕심내지 말자’가 계속 싸움을 했어요. 베이징 가기 전까지 그런 싸움이 지속되다가 출국 직전에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쥐가 난 다리를 이끌고 3차시기에 도전할 수 있었구요, 넘어졌을 때도 웃을 수 있었어요.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죠.
―인상에서 한국 신기록까지 낸 터라 용상에서의 실패가 더더욱 뼈아플 것 같아요.
▲원래 인상 종목이 약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제일 좋은 성적이 나온 거예요. 뭔가 예감이 들었어요. 용상은 무난하게 성공할 수 있었고 기록도 욕심낼 만했거든요. 그런데 운동하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거죠. 다리에 쥐가 난다는 거…,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사실 중국 가기 전에 손목 부상을 당했어요. 바벨을 들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었죠. 열심히 물리치료실을 들락거리며 출국 전에 완쾌를 했는데 손목 부상 재발도 아니고 쥐가 나서 실패를 했다는 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웃을 수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미소 짓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럼 울어요? 의도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게 스포츠인의 매너라고 생각했어요. 스포츠를 즐기러 간 거지 싸우러 간 건 아니잖아요. 언제부턴가 스포츠가 전쟁처럼 여겨졌지만 전 이번 올림픽을 즐기러 갔습니다.
―지금은 그렇다고 해도 예전에는 메달이나 순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거예요.
▲역도선수 이배영은 항상 ‘2인자’ ‘2등’ ‘은메달’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어요. 그래서 아테네 은메달 획득 이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욕심을 냈습니다. 꼭 1위를 차지하겠다면서요. 그런데 더 꼬이더라구요. 1위는커녕 순위에도 못 올랐으니까요. 그 후로 1년 넘게 운동을 쉬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1등은 나와 관계없는 자리인 것 같았고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니까 목표 의식도 흐려진 터라 1년을 백수처럼 무작정 놀기만 했습니다.
―가정을 꾸린 사람이 아무 할 일 없이 놀기만 했다구요? 미래가 걱정되지 않았나요.
▲선수들은 휴식도 훈련의 일부거든요. 소속팀에서도 이해를 해줬어요. 전국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되니까. 그런데 쉬다 보니까 조금씩 의욕같은 게 생기더라구요. 아테네 이후 올림픽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3회 연속 올림픽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죠. 올림픽에 세 번 연속 나간 선배가 전병관, 김태현 두 분뿐이거든요. 제가 그 뒤를 잇는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잖아요.
▲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다 실패한 후 웃음을 보이는 이배영. 당시 은메달을 땄다. | ||
▲매일 매일이 힘들었습니다. 항상 괴로웠었죠. 그런데 그 괴로움을 말로 표현해 내라면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에요. 선수들은 말이죠, 인내심 없인 먹고 살기 힘들어요.
―이번에 이배영 선수 대신 사재혁과 장미란 선수가 금메달을 땄어요. 좀 부럽진 않았나요.
▲부러운 마음보다 내가 못한 걸 후배가 이뤄냈다는 부분에서 기쁨이 두세 배는 더 컸어요. 만약 금메달이 없었다면 감독님 입장이 애매해지시잖아요. 그런데 재혁이가 그걸 이뤄주니까 얼마나 고맙고 이뻤겠습니까. (장)미란이는 정말 대단한 선수예요. 그 심한 부담감을 안고도 6번 다 성공시켰어요. 단순히 금메달뿐만 아니라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는 걸 보고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제가 미란이한테 배울 게 많아요.
이배영과 인터뷰 중에 문대성 교수가 IOC 선수위원에 1등으로 당선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처음 그 내용을 접한 이배영은 정말 뛸 듯이 기뻐했다. 경기를 일찍 마치고 남은 시간동안 문대성 위원의 선거 활동을 돕기로 약속해 놓고 부상으로 조기 귀국했던 이배영은 문대성 위원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문)대성이 형이 선수촌 그 뙤약볕 아래서 하루 15시간씩 서 있었어요.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든요. 형을 신기하게 보는 것도 모자라 이상한 놈 취급하는 선수들도 있었어요. 진짜 이번 선거는 대성이 형 혼자 이뤄낸 거나 마찬가지예요. 몸으로 때운 거죠. 대단해요. 정말. 대성이 형을 통해 느끼는 게 많습니다. 제가 닮고 싶은 롤 모델이에요.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어요. 하지만 많은 팬들은 2010년 아시안게임까지 뛰어주길 바라는데요.
▲저도 너무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 이제부턴 제 진로를 준비해야 하거든요.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전국체전에만 참가하면서 은퇴 후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죠. 길은 여러 가지예요. 지도자도 있을 수 있겠고, 공부를 더 해서 대학 강단에 서고 싶기도 하구요, 아니면 아예 운동과 관련 없는 사업을 할 수도 있겠구요. 하지만 은퇴한 선배들의 삶을 보면서 결코 그 생활이 만만하지도, 여유롭지도 않다는 걸 잘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요즘 걱정이 많아요.
―올림픽 끝나고 아빠의 귀환을 기다리는 아들 민혁이나 아내에게 많이 미안할 것 같아요. 여전히 숙식을 선수촌에서 하고 계시는데 선수촌 생활이 지겹지도 않아요?
▲뭐 부상 치료 때문인데 서로 이해하고 참아내야죠. 선수촌 생활은 지겨우면서도 가장 편하기도 해요. 빨리 회복해서 전국체전을 대비해 훈련에 들어가야 해요. 올림픽은 끝났지만 선수들의 스케줄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말아주세요.
이배영은 2008베이징 올림픽은 자신한테 아픈 기억이자 따뜻한 추억으로 자리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픈 기억보단 아름다운 기억만 남는다며 예의 그 환한 미소를 보여준다. 만나는 사람에게 푸근한 정감과 에너지를 듬뿍 선사하는 이배영, 그의 올림픽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