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야구대표팀이 드라마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다. 결승전에서 쿠바를 물리친 후 그라운드에 몰려나온 선수들, 이 순간 그들은 최고의 배우들이었다. 연합뉴스 | ||
# 선수 선발부터 발휘된 뚝심
베이징올림픽 야구 대표팀에는 올시즌 국내 프로야구에서 홈런과 타점 1위를 달리고 있는 김태균(한화)이 없다. 그리고 올림픽 직전 극도의 타격 슬럼프로 신음했던 이대호(롯데)가 중심 타자를 맡고 있다.
김경문 야구대표팀 감독의 말은 걱정스러웠다. 김 감독은 “예선 때부터 함께한 이대호를 놓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의리 운운할 때인가”라는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이대호는 이번 올림픽에서 홈런 1위(3개) 타점 2위(10개) 타격 4위(0.429) 장타율 2위(0.905)에 올랐다. 볼넷을 무려 7개나 얻어내며 상대팀 투수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지명타자 3루수 1루수를 번갈아 보면서 실책 한 개 없는 깔끔한 수비도 과시했다.
# 이승엽에 대한 믿음과 보답
이승엽은 수치 상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 어이없는 헛스윙이 이어졌고, 득점 찬스에서 병살타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이승엽을 4번 타자로 변함없이 기용했다. 그리고 언론 인터뷰에 대고 말했다. “(이)승엽이는 중요할 때 한 번만 터져주면 된다. 그가 타순에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 팀에는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승엽은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2-2로 팽팽히 맞선 8회말 일본 응원단 심장부에 비수 같은 홈런을 꽂으며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이승엽은 극심했던 맘 고생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이승엽은 쿠바와의 결승전 1회초 첫 타석에서 선제 2점포를 터뜨리며 포효했다.
# 번트 거부한 믿음의 야구
2-2로 팽팽하게 맞서던 일본과의 준결승 8회말. 선두타자 이용규가 좌전안타로 출루해 무사 1루의 찬스가 왔다. 다음 타자는 김현수. 그러나 김현수는 번트 모션을 취하지 않았다. 단 1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키. 김경문 감독의 강공 지시를 받은 김현수는 길게 배트를 잡았다. 그리고 김현수는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다음 타자 이승엽의 홈런으로 김현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8-8로 맞서고 있던 대만전 7회 무사 1ㆍ2루에서도 역시 강민호에게 강공을 지시했다. 강민호는 유격수 옆을 꿰뚫는 결승타로 김 감독의 뚝심에 화답했다.
▲ 이승엽이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극적인 역전홈런을 친 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
# 어떤 순간에도 변하지 않은 믿음
관중도, 취재진도, 협회 관계자도 모두가 불안했다. 김경문 감독의 오만하기까지 한 끈질긴 뚝심에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번 올림픽 일본과의 맞대결 두 차례에서 김 감독은 줄기차게 김광현(SK)을 내보냈다. ‘일본킬러’라는 별명을 얻은 김광현이지만, 이제 갓 스무살이 된 김광현이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일본의 간판 타자들을 상대로 어떤 투구를 보여줄 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김광현은 찬란한 활약을 선보였다. 일본전 두 차례 선발 등판에서 단 2점만을 내주며 일본의 내로라하는 타자들을 꽁꽁 묶었다. 더구나 메달 색깔을 결정지은 준결승전에서는 8회까지 일본 타선을 2점으로 봉쇄하며 대 역전승의 발판을 놨다.
김 감독은 일본이 무려 6명의 투수를 바꾸는 계투 작전을 쓰는 동안 꾸준히 김광현 하나로 밀어 붙였다. 김광현은 이 1대6의 싸움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 정상급 투수 6명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김경문 감독의 놀라운 뚝심은 결승전에서도 그대로 발휘됐다. 김 감독은 선발 등판한 류현진(한화)을 9회 1사까지 끌고 갔다. 모두가 불안해했다. 그러나 “지금 류현진보다 구위가 좋은 선수는 없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경기 막판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류현진은 쿠바 타선을 2점으로 막고 결국 결승전 승리투수가 됐다.
#대표팀 막차 탄 윤석민
윤석민(KIA)은 22일 일본과의 준결승에 마무리로 등판했다. 8회말 이승엽이 터뜨린 극적인 역전 결승 홈런의 흥분이 사라지기도 전에, 윤석민은 9회초 일본의 마지막 공격을 막기 위한 소방수로 등장했다. 그리고 윤석민은 일본의 마지막 세 타자를 우익수 플라이, 삼진, 우익수 플라이로 깔끔하게 잡아냈다.
▲ 시상대에 오른 선수들이 두 팔을 치켜들고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윤석민은 하마터면 이 자리에 없을 뻔했다. 야구대표팀 최종엔트리에서 임태훈(두산)에게 밀려 탈락했었기 때문이다. 윤석민은 최종엔트리에서 자신이 빠진 것을 확인한 날, 원정지였던 부산에서 술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혼신의 역투로 자신을 제외시킨 김경문 감독을 향해 무력 시위를 했다. 며칠 후, 김경문 감독은 임태훈을 윤석민으로 교체하기로 최종 결정을 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미래를 책임질 에이스로 꼽히는 윤석민에게 병역의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윤석민은 앞으로 2시즌의 공백에 대한 걱정 없이,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쳐 나갈 것이다.
#퇴장으로 한몫한 강민호
이번 올림픽에서 국가대표팀 주전포수로 처음 나선 강민호는 끓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계속 쿠바 타자와 구심이 스페인어로 쑥덕쑥덕 하더니 9회말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아니나 다를까 심판의 어처구니없는 오심이 계속됐다.
강민호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심판에게 정식으로 항의를 했고, 심판은 이런 강민호를 가차없이 퇴장시켰다. 그러나 한국야구위원회(KBO) 하일성 사무총장은 “강민호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강민호는 심판에게 “볼이 낮았냐?”(low ball)고 물어본 죄(?)로 곧바로 퇴장을 당했다. 분을 참지 못한 강민호는 헬멧과 미트를 차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후 부상 중인 진갑용이 안방을 지키고, 류현진 역시 정대현에게 마운드를 넘겨줬다.
하 사무총장은 “강민호의 퇴장은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온 것”이라며 “강민호가 퇴장당하며 벌어준 몇 분 때문에 쿠바로 기울던 흐름이 다시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강민호는 “내가 좀 강하게 나가줘야 우리 팀이 더 똘똘 뭉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베이징=허재원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