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그리고 그 중심에 두산베어스 김경문 감독(50)이 있었다. 과감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만의 야구를 펼쳤다는 평가를 들으면서 국민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그이지만 사실 본인도 9연승 금메달은 꿈도 꾼 적이 없다고 했다. 금년 시즌에서도 두산을 2위에 올려놓은 김 감독을 잠실야구장 두산 감독실에서 만나 그의 어린 시절과 야구 선수로 크면서 유난히 힘겨웠던 많은 순간들,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소신과 야구 철학을 들어봤다.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 달라, 어떻게 야구를 시작했나.
▲일단은 아버님(김시학 씨)이 야구와 스포츠를 좋아하셨다. 모두 8형제였는데 내가 막내였다. 형들도 그렇고 모두 한 가지씩은 운동을 했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 인천이었다. 인천에서 야구가 인기가 있었고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형들과 야구를 했다. 그러다가 아버님 사업 때문에 대구로 이사를 갔다가 반 대항 야구를 하던 중 학교 팀에 스카우트됐다. 옥산초등학교라고 야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렇지 않아도 야구를 하고 싶었는데 학교 야구부에 뽑히는 바람에 본격적으로 야구 선수로 생활하게 됐다.
―고등학교는 공주고를 나오지 않았나.
▲역마살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버님이 사업 때문에 이곳저곳 움직이신 덕분에 경상중학교 야구 선수로 입학을 했다가 집은 부산으로 이사를 해 친구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런데 많이 힘들더라. 하루는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아버님께 힘들어서 더 이상 야구를 못하겠다고 했더니 이왕 시작한 것 계속 해보라며 부산 동성중으로 전학을 시켜주셨다. 그러다가 공주고에 스카우트됐다. 그런데 또 다시 대학을 서울로 갔으니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인천, 대구, 부산, 공주, 서울을 돌며 운동을 했다(웃음).
―운동선수치고 큰 체구가 아닌데 어떻게 포수를 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때 시합을 나갔다가 포수가 갑자기 팔이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내야수를 보고 있던 내가 포수 마스크를 썼다. 포수를 하기엔 굉장히 작은 편이었다. 포수를 한 번 하고나니 감독님이 포수를 계속해도 되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난 사실 유격수가 되고 싶었다.
―선수시절 참으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것으로 안다.
▲운동선수로서 좋지 않은 것은 다 경험했다. 고교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3루로 뛰다가 팔이 부러졌고, 3학년 때는 머리에 중상을 입어 5일간 혼수 상태였던 적도 있었다. 대학 때는 동계 훈련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서 운동을 오래하면 안 된다, 하반신 마비가 온다는 진단을 받았다. 야구밖에 모르는 내겐 정말 황당할 뿐이었다. 뭐 좀 할 만하면 계속 다치고. 발목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고려대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이었다. 의사의 진단이 믿어지지 않아서 나 혼자 5군데 병원을 찾아다니며 진료를 받았다. 디스크다보니까 네 군데 병원에서는 똑같이 다리 마비가 온다며 수술을 권유했다. 하지만 병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 오른발 쪽이 마비 증상이 있었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그냥 운동을 했다. 한 병원에서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해보다가 정말 힘들어지면 그 때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어떻게 야구 선수, 특히 포수를 계속할 수 있었나.
▲사실 고교시절이나 아마 때 배팅을 참 잘했다. 거포는 아니지만 타율은 아주 좋았다. 그런데 프로로 올라가 보니까 훈련도 힘들고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는 타격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허리 수술을 했는데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타격은 포기하고 투수 리드는 자신이 있으니까 수비형 포수가 되자고 집중적으로 노력을 했다.
―그런 몸 상태로 프로 생활을 꽤 오래했다.
▲성적은 나빴지만 스스로 진통제도 많이 먹고 뛰었다. 몸 관리 못지않게 정신력도 프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컨디션이 좋고 몸이 좋을 때만 성적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보잘것없는 선수 생활을 했지만 내가 내 몸을 봤을 때 성적은 초라해도 10년간 버텼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위로를 많이 했다. 10년은 꼭 채우고 싶었다. 나름대로 어려운 과정에서 10년을 뛰었다는 것은 나를 아는 주위의 분들에게도 그렇고 인정을 받았다. 2~3년 안에 그만둘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쿠바를 3-2로 누르고 우승하며 기뻐하는 모습과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김경문 감독(오른쪽). 연합뉴스 | ||
▲독종은 아니었다. 그런데 프로는 뭔가 강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선수 때는 선수대로, 코치 때는 코치대로, 또 감독은 감독대로 독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현수나 (고)영민이나 (이)종욱이나 모두 잘하지만 잘할 때 더 독하게 잡아야 단명하지 않고 오래 좋은 선수로 뛸 수 있다.
―원래 지도자가 꿈이었나.
▲어린 시절부터 기록하고 메모하는 습관을 좋아했다. 상대팀 타자와 투수는 물론이고 우리 팀 선수들에 대해서도 기록을 많이 했다. 언제 어느 팀으로 갈지 알 수 없는 것이 프로니까. 그리고 나중에 혹시 지도자가 되면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퇴하고 곧바로 코치를 시작하지 않았다.
▲11세 때 시작해서 34세에 은퇴했다. 오로지 야구만 하면서 달려왔었다. 그래서 다른 시각을 좀 갖고 또 보고 싶었다. 일본이나 미국 야구를 보고 싶었는데 일본 야구는 선수 때 많이 접했었다. 그래서 은퇴와 동시에 미국으로 갔다. 애틀랜타에 선우대영 선배가 있었는데 그 분이 정말 많이 도와주었다. 1991년 말이었을 것이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그 때 젊은 투수진과 선수들로 월드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었다. 팀도 매력이 있었고 물가도 다른 곳보다 싸고 여러 가지가 좋았다. 그곳에서 1년 반 넘게 있었다.
―그곳에서 미국 야구를 본건가.
▲일단은 ABC라도 좀 배우겠다는 생각이었다. 영어를 배우려고 랭귀지 스쿨을 다녔는데 영어 정말 어렵더라(웃음). 그러다가 시애틀의 이재우 감독님이 인스트럭션 리그를 소개해줘서 그곳에 가서 야구를 보고, 또 조지아텍 대학에 가서도 배우고, 또 소개를 받아 그린빌의 더블A 팀에서 가서도 배우고 이곳저곳을 혼자 다니면서 배웠다. 가족들은 애틀랜타에 있고 나 혼자 라면 한 박스 싣고 김치통 하나 사가지고 돌아다니며 야구를 보고 배웠다. 한 번은 김치통이 더위에 터져서 차가 엉망이 된 적도 있었다. 그 시간들이 힘들었지만 새로운 팀, 시애틀의 교육 리그, 애틀랜타의 스프링캠프 등은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팀 마다 추구하는 것도 야구하는 모습도 다르더라. 그후 한국에서 연락이 와 돌아왔는데 처음엔 LG로 갈 뻔하다가 무산되고 삼성에서 우용득 감독 밑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94년부터 3년간 삼성에서 코치를 하다가 97년에 OB 코치로 옮겼고 2004년부턴 두산 베어스 감독을 맡았다.
―베이징올림픽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는데 가기 전에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하다.
▲대표팀 선발 과정도 좀 시끄러웠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야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WBC 4강이 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렵게 선수들이 모이고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동메달은 목에 걸고 들어와야 한다는, 착잡한 심정으로 떠났다. 사실 떠나기 며칠 전부터는 잠도 잘 안 오더라. 그러다가 한 후배랑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를 갔는데 너무 좋았다. 이상훈(LG 투수 출신)이 왜 음악을 했는지 알겠다는 심정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혼자 한두 번 더 찾아가서 음악 듣고 한성기라는 가수 분이 직접 사인한 CD도 받았다. 라이브 기타와 노래의 힘이 참 좋더라.
▲요즘 현수가 칭찬을 많이 듣지만 그 애는 어린 나이에 비해서 타격에 소질이 있는 친구다. 처음에는 정근우나 이진영이나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기용했지만 때가 되면 현수도 기용할 것으로 염두에 두고 훈련을 시켰다. 라인업 초반에 좌타자들을 배치한 것도 그렇다. 우리 타자들은 왼손 투수 공도 공략할 수 있다. 만약 아주 좋은 좌투수가 나오면 이승엽이라고 해도 삼진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근우나 진영이나 또 현수까지 대타들이 모두 잘해주면서 분위기가 확 올라갔다. 결국 타자들이 쳐주니까 감독이 돋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 많은 작전들이 안 풀렸으면 정말 많은 욕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물론 해봤다. 그러나 그거 생각하면 감독은 하고 싶은 것을 다 못한다. 어차피 성적이 안 나오면 깨끗이 유니폼을 벗어야 한다. 정작 잠 못 자고 고생하는 것은 감독들이다. 내 개인 욕심도 아니고 팀의 승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비난을 염두에 두고 소극적이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선수들도 감독이 과감하게 끌고 가니까 더 집중력을 가지고 잘해주었던 것 같다. 그냥 소신껏 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포스트 시즌이다. 작년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까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엔 어떤 심정인가.
▲2위를 두 번 해보니까 이번 올림픽 결승 때도 또 지면 혹시 영원한 2인자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사실 선수들이랑 정말 열심히 잘했어도 2등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우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나. 선수들도 나랑 같이 두 번이나 경험을 했고 이번에는 선수들과 더욱 뭉쳐서 끝까지 좋은 결과를 내보도록 하겠다.
―김경문의 야구가 완성돼 가고 있는 건가.
▲아직이다. 올림픽 한 번 이기고 오니까 갑자기 이런저런 수식어들이 붙더라. 상당히 부담스럽다. 내가 맡고 있는 동안 타 팀이 얕잡아 볼 수 없는 팀으로 강한 팀으로 키워가고 싶다.
―시즌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몸 검사도 하고 눈 수술도 하고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가서 잠도 푹 자고 싶다. 야구 잊고 여행 갔다 오고 싶다. 작년부터 대표팀까지 맡으면서 정말 거의 쉰 적이 없었다. 정신없이 지나갔다.
―WBC 감독은 고사 의사를 누차 밝혔는데.
▲아직은 우리 팀의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 팀과의 계약도 올 시즌으로 끝난다. 선결될 문제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현직에서 물러나 계신 선배들에게 기회를 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정말 쉬고 싶은 마음이다.
김경문 감독과의 인연은 참 길다. 미국에서 홀로 야구 연수를 할 때 <스포츠조선>의 특파원으로 그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짧은 만남을 이어가다가 이번에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 연수 시절의 김경문이나 두산 감독으로 인정을 받던 김경문이나 그리고 올림픽 우승으로 국민 감독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김 감독은 한결 같았다. 뚝심 있지만 겸손하며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서 앞으로도 그가 야구팬들에게 보여줄 것이 아주 많을 것이라는 큰 기대를 걸게 한다.
메이저리그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