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재활 프로그램을 잘 소화하고 있는 류제국은 내년 시즌에 대한 기대감과 자신감을 내비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류제국이 운동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포츠센터 인근의 한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뒤늦은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류제국을 만난 날 탬파베이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기사를 작성할 즈음에 탬파베이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승리를 거두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탬파베이 유니폼을 입고 있다가 부상으로 수술을 받은 후 재활군에 머물렀던 그는 소속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지켜보며 묘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팀이 1위라는 사실을 7월 말에 알았어요. 당시 플로리다 재활 캠프에 있었거든요. 당연히 꼴찌인 줄 알았죠. 그러다 우연히 TV를 보다가 우리 팀 소식을 들은 거예요. TV를 보기 전 라커에서 재활 선수들이 1위가 어쩌고저쩌고 하길래 난 양키스 얘기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와~ 정말 잘하더라구요. 거의 지는 걸 모르구요. 내가 올해 수술만 하지 않았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죠. 그렇다면 팀의 우승 행진에 저도 합류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류제국은 내년 시즌에는 팀의 우승에 자신도 한몫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 하긴 창단 이후 매년 하위권을 맴돌던 탬파베이가 지구 우승은 물론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했으니 류제국의 속이 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류제국은 올시즌 세 번째 마이너리그 옵션을 모두 사용했다. 때문에 내년 시즌 그를 25인 로스터에 등록시키지 않으면 타구단에 트레이드를 하거나 웨이버로 공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의 완벽 재활 여부가 내년 시즌의 ‘키’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른 팔꿈치 부상은 오래 전부터 통증을 느꼈던 부위였다고 한다. 그 아픔을 참아가면서 운동을 했던 게 올 시즌 덜컥 문제를 일으키고 만 것. 류제국은 구단 측에 자신의 부상을 호소하며 정밀 검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구단 측에선 류제국의 마이너리그 옵션 소진으로 인해 검사보단 재활을 통해 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한 달 이상 MRI도 안 찍어줬어요. 팀에 강력히 얘기를 하니까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사를 받게 하더라구요. 검사 결과 인대는 괜찮은데 뼛조각이 돌아다녀 인대 부위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나왔어요. 수술을 하느냐, 재활로 견디느냐 하는 기로에 놓였어요. 팀에선 또 다시 재활을 요구했고 난 오랜 통증으로 인해 더 이상 재활로 몸을 만드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베이징올림픽도 있고 팀 사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더 큰 미래를 보기 위해 과감히 수술을 결정했죠.”
중학교 때 어깨수술을 받은 후 몸에 칼을 댄 건 두 번째라고 한다. 수술을 받으면서 서재응이 뉴욕 메츠 시절 어깨 수술을 받고 2년여 동안 슬럼프에 빠졌다는 얘기가 떠올라 불안감이 고조됐지만 자신의 선택을 믿고 수술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단다.
올 시즌 한국 프로야구에 ‘데뷔’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서재응, 김선우의 좌충우돌 적응기를 지켜본 류제국은 한국 야구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베이징올림픽 1차 예선에서 생애 첫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한 바 있는 그는 “한국 야구는 무척 섬세하다. 웬만해선 공에 손을 대지 않아 투수가 지치고 만다”는 말로 대표팀 때 경험해 본 한국 타자들의 성향을 얘기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이 들어올 때까지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아요. 계속 파울을 내며 투수와 기 싸움에 들어가는데 미국에서 야구를 했던 형들 입장에선 처음에 그런 부분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무엇보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을 겁니다. 운동장 환경, 훈련 프로그램, 선수들 분위기, 상대 선수 분석 등등 모든 게 새롭고 처음 겪는 부분들이니까. 그런데요, 팀을 옮기자마자 잘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에요. 첫 해부터 10승 이상 거두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죠. 재응 형이나 선우 형이 내년에는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특히 재응 형은 같은 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형 성격을 잘 알거든요. 자존심 상해서라도 ‘서재응’이란 이름을 기아 팬들에게 반드시 각인시키고 말 겁니다.”
류제국은 귀국 후 TV를 통해 올 시즌 완벽 재기를 선보인 LG 봉중근의 투구도 유심히 지켜봤다고 한다. 투구 내용은 큰 차이가 없지만 작년에 비해 마운드에서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변화했다는 생각이다. 지난해엔 마운드에 선 봉중근이 왜소해 보였다면 올 시즌에는 운동장이 꽉 차 보일 만큼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플로리다 재활 캠프에서 베이징올림픽을 지켜본 류제국은 ‘솔직한 심정’이란 단서를 달고 한국대표팀의 드라마틱한 명승부들이 기쁨 반, 아픔 반으로 다가왔다고 토로했다.
“예선전에 합류했었기 때문에 몸 상태만 괜찮았다면 본선에 대한 기대를 부풀릴 수 있었을 겁니다. 수술 때문에 아예 대상에서 빠지고 나니까 기분이 정말 묘하더라구요. 나 또한 병역 문제가 걸려 있는 탓에 올림픽 본선 진출을 매우 기대했거든요. 그래도 승엽이 형이 일본전에서 투런 홈런을 날릴 때는 정말 눈물이 나더라구요. 너무 대단했고 너무 가슴이 벅찼어요. 개인적인 문제로 마음은 쓰렸지만 대표팀의 우승은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류제국은 미국에서 야구 선수로 뛰며 군대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절호의 기회였던 베이징올림픽까지 비켜가게 되니까 자신과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추)신수 형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래서 신수 형 하는 대로 하려구요(웃음). 병역 문제에 연연해했다간 야구 안 돼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게임해야죠. 그러다보면 어떤 방법이 보이지 않겠어요? 안달하거나 연연해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류제국은 현재 체중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수술 후 110㎏까지 나갔던 몸무게가 지금은 97㎏까지 뺐다. 아직은 수술한 부위가 뻐근한 느낌이지만 한국에서 재활 프로그램을 잘 소화하고 있어 미국 들어가기 전까지 90%의 몸 상태로 회복시킬 계획이다.
“체중이 줄다보니까 몸이 훨씬 가볍고 컨디션이 좋아졌어요. 일부러 지인들과의 약속도 피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과식하거나 술을 마시게 되니까요. 내년 시즌이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해예요. 팀에 성실하고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구요. 그래서 나도 신수 형처럼 운동장에 일찍 나갈 생각입니다. 신수 형은 야구장 문 열기 전에 도착한다고 하잖아요(웃음).”
류제국이 재활로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것은 여자친구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테니스 선수로 활약했던 여자친구와 좋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았고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고 한다.
“요즘 여자들 같지 않게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그 친구한테 항상 힘든 모습만 보여줬는데 내년에는 류제국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시켜주고 싶어요. 결혼요? 하하…. 언젠간 하게 되겠죠(웃음)?”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