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군에 머무르며 진로를 고민 중인 안경현과 만났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2년 전 FA 미선언으로 여전히 ‘자유의 몸’인 안경현은 얼마전 김경문 감독이 “선수로 계속 뛰고 싶다면 트레이드 등을 통해서라도 가급적 다른 팀으로 보내주고 싶다”고 밝힌 바 있어 안경현은 곧 두산과의 17년 인연을 정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구단과 협상 테이블에 앉질 않아 진로는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이별’ 쪽에 가깝다. 팀의 마무리훈련과는 별도로 혼자 헬스클럽을 다니며 체력 훈련을 하고 있는 안경현과 지난 13일 강남 역삼동에서 만나 ‘취중토크’를 벌였다. 아직도 두산 팬들한테는 ‘두산베어스의 혼, 클러치히터, 가을의 사나이’ 등으로 인식되며 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안샘’과의 취중 인터뷰에는 야구 인생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었다.
―대부분 운동선수는 시즌이 끝나기만을 기다리지만 언제부턴가 겨울이 싫어졌을 것 같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오래 전부터 이런 겨울이 오리라 예상했거든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선배들이 한두 명씩 은퇴하는 걸 보면서, 또 선수들 모였는데 선배들 얼굴이 안 보일 때, 아!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었어요. 야구장 나가면 감독, 코치 빼놓고 내가 인사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이제 내 차례구나 하는 기분이 들더라구요.
―올시즌의 대부분은 2군에서 머물렀어요. 5월 1일에 잠깐 1군에 복귀했다가 올림픽 브레이크를 일주일 앞둔 7월 25일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잖아요.
▲전지훈련에서 제외되면서 올시즌이 어려울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그래도 1군에 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2군에서 시작할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겨울 내내 운동장에 나가지 못하고 실내에서만 훈련했거든요. 실내만 있다보니까 조금 불안해지더라구요. 하지만 곧 시즌이 시작되면 내 진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곤 했어요. 그런데 막상 시즌 들어가니까 김경문 감독님이 날 안 쓸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솔직히 그때부터 손 놓고 있었어요. 정말 무슨 목표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연습을 위한 연습이었어요. 이전처럼 따로 개인 훈련을 하거나 타격 훈련을 하는 등의 행동은 하지도 않았죠.
―92년 OB베어스 입단 후 지금까지 2군보단 1군에서 보낸 시간들이 훨씬 많았죠?
▲그렇죠. 신인 때는 많이 헤맸지만 2000년 이후부턴 좀 활약을 했었죠. 그런데 젊어서 2군에 있는 것과 나이 먹어서 2군에 있는 건 완전 달라요. 좀 쪽팔리죠. 운동은 해야 하는데 기다림의 여유는 없고.
―5월에 1군 복귀했을 때 미리 통보를 받고 준비를 한 상태에서 올라간 건가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2군으로 내려가서 연습다운 연습을 하지 못했어요. 마음이 움직이질 않았던 탓이죠. 그러다 갑자기 코칭스태프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감독님 찾아뵈라구요. 다음날 야구장 갔더니 5월 1일 올라간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제대로 훈련도 안 된 상태에서 3일 남겨놓고 속성으로, 마치 벼락치기 시험공부하는 것처럼 훈련을 했었죠. 처음엔 그럭저럭 성적이 괜찮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연습 안 한 게 티가 나더라구요. 대타로 나서기도 하고 3일에 한 타석 나가기도 하고…. 내가 뭐하고 있나 싶었어요. 너무나 한심했죠.
▲ 2005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안경현. 2001, 2003년에도 같은 상을 받았다. | ||
▲집중을 못하겠더라구요. 안정도 안 되고. 연습하다가도 힘들면 그만뒀어요. 예전엔 악착같이 했거든요.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 나만 겉도는 듯한 기분이 견디기 힘들었어요. 대전에서 연패를 하고 집에 돌아갔는데 다시 구단으로부터 전화가 왔더라구요. 2군으로 내려가라고. 그때 딱 마음 접었어요. 아, 이제 더 이상 이렇게 구차하게 하지 말자. 그래서 잠시 접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돈 문제를 떠나 그냥 이렇게 그만두는 게 너무 허무하더라구요. 주위의 환경에 의해 밀려나듯이 그만두는 건 싫었습니다.
―좋은 모양새로 마무리하고 싶은 건가요? 베테랑 선수들의 공통점이 어떻게 시작하느냐보다 어떤 모습으로 은퇴하느냐를 더 중요시하잖아요.
▲전 그렇진 않아요. 물론 더 좋은 모습이 된다면 정말 멋지게 마무리하고 끝내겠죠. 그런데 잘하고 있는데 끝내기란 쉽지 않거든요. 전 정말 한 점 후회없이 연습을 했는데 팀이나 선수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으면 시즌 중간이라도 그만둘 겁니다.
―김경문 감독이 원하는 선수 스타일이 분명 있어요. 그 점에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나요?
▲감독님은 발 빠른 야구를 추구하세요. 제가 거기에 부합되지 못하는 건 사실입니다. 감독님 스타일에 부합하려고 노력해봤어요. 하지만 30년 넘게 한 제 스타일이 있는데 그걸 바꾸기가 쉽지 않구요. 그래서 발이 안 되면 타격 쪽에서 더 잘해보려고 노력했어요. 힘이 있으니까 가능할 거라 생각했죠.
―2001, 2003, 2005년에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잘나가던 선수가 나이 먹고 뒷방으로 물러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상실감이 참으로 컸을 것 같아요.
▲그럴 때 야구장에 나와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후배들 눈치 보여요. 쟤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싶기도 하고. 타격이라도 마음 먹은대로 되면 그나마 얼굴은 들고 다니죠. 그것도 못 치고 들어오면 내 자신한테 욕 나와요.
안경현은 지난 시즌 전부터 이런저런 ‘소문’들에 휘말렸었다. 소문이 증폭된 부분에는 김경문 감독이 안경현을 전지훈련에서 제외시키면서 ‘운동 외적인 이유가 있다’라고 말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그 ‘소문’들 중 몇 가지를 직접 안경현에게 물어봤다.
―팀 사인을 다른 팀에 유출시켰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들어봤죠?
▲네. 알고 있어요. 제가 다른 팀 선수들이랑 친하게 지내요. 원정 가면 버스에서 옷 갈아 입기가 싫어서 홈팀 라커에 가서 옷도 갈아 입고 밥도 먹고 그래요. 그렇게 지내면 우리 팀 사인을 상대팀 선수에게 알려주는 건가요? 이런 소문들을 듣고 시즌 초에 직접 김경문 감독님을 찾아가서 여쭤본 적이 있어요. 내 문제가 뭔지 직접 감독님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거든요. 제가 너무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고 하시더라구요. 설렁설렁 운동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뺀 거라구요.
―장원진 선수와의 불화설은 무슨 얘기예요? 두 사람이 안 친한가요?
▲서로 전화통화하고 밥 먹는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동료로 지낼 뿐이에요. 모든 선수들이랑 다 친해야 하나요? 서로 생활 패턴이나 스타일이 다르면 안 친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팀 분위기를 흐렸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떤 부분에서 분위기를 흐렸다는 건지…. 장난은 많이 치는 편이었죠. 스트레칭할 때도 장난 친 적이 있었고. 그게 유난히 감독님이나 코칭스태프 눈에 거슬렸다면 제 잘못인 거죠.
▲스테로이드 얘기도 있었어요? 운동 안된다고 이런저런 소문은 다 갖다 붙였네요. 만약 제가 그런 걸 복용했다면 이러고 있었겠어요? 몸이 더 커져야 하는 거잖아요. 홍성흔이랑 김동주가 맨날 내 다리 가늘어졌다고 놀리는데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다리가 가늘어질 수 있냐구요.
―아, 참! LG 봉중근 선수랑 빈볼 시비가 벌어져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어요. 인터넷에 당시의 장면만 캡처한 동영상들이 돌아다니더라구요.
▲만약 실투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거예요. 그런데 이건 다분히 의도적으로 절 맞추기 위해 던진 공으로 보였어요. 그날 상황이 우리가 번트를 많이 댔어요. 그로 인해 점수도 많이 얻었고. 충분히 예민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렇다고 빈볼을 던지는 건 아니잖아요.
안경현은 어느 투수든 빈볼은 던질 수 있지만 감정이 섞인 빈볼은 동업자 정신에 위배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일로 인해 두 선수는 500만 원(봉중근)과 300만 원(안경현)의 벌금을 내야 했다. 물론 봉중근은 나중에 안경현을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했다고 한다.
―아주 매너있게 투구를 하는 선수는 누구예요? 공은 치기 어려워도 왠지 못 쳐도 기분 좋은 그런 선수.
▲롯데 손민한이 이쁘게 잘 던져요. 물론 전 그 선수 공 잘 못쳤어요. 한화 정민철 공도 치기 어려워요. 전 그 친구 볼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 같아요(웃음). 아, 그리고 최향남 공도 스피드건에 찍히는 것과 실제 보는 것하곤 굉장히 달라요. 각도가 워낙 좋아서 쉽게 칠 수가 없죠.
―앞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어요. 두산과 협상을 벌일 텐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할 계획인가요?
▲그림은 간단해요. 제가 뭐 17년 동안 자원봉사한 것도 아니고 대가 받고 운동한 거잖아요. 프로 선수인데 상품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되면 계약 안 하겠죠. 저도 두산에선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코치를 할 수 있겠어요? 지금?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전 1년이라도 더 뛰고 싶어요. 구단에선 은퇴를 종용하겠지만 제가 다른 팀에서라도 더 뛸 수 있도록 풀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구단에 정중히 부탁드려 볼 겁니다.
―만약 다른 팀에서라도 안 받아 줄 경우 마해영 선수가 지난해 롯데에 테스트를 받았던 것처럼 그렇게 할 각오도 돼 있어요?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어요. 큰일났네. 그 부분도 생각해야 하는구나.
안경현의 ‘그림’은 말 그대로 심플했지만 과연 두산에서 그의 간절함을 이해하고 받아줄진 모를 일이다. 두산 팬들은 여전히 프랜차이즈 스타 ‘안샘’을 원하고 기다리며 두산에 머물러 있길 바라지만 안경현의 현실은 냉정했다. 소주, 폭탄주에다 와인까지 걸친 ‘안샘’과의 ‘취중토크’는 녹음기 없었으면 단 몇 줄도 쓰지 못할 뻔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