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K3리그는 최근 도박사가 끼어든 승부조작 파문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 와중에 프로야구에서도 사인 거래 가능성이 언급된 것이다. KBO가 진상조사를 벌일 계획이라는 설도 나왔다. 하지만 소문의 발원지라고 여겨졌던 김재박 감독은 이 같은 보도가 나오자 “그런 식으로 보도되는 건 당황스럽다. 흘러가는 얘기였을 뿐이고 심판 얘기도 하지 않았다”면서 일단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심각한 수준의 사인 거래가 프로야구에 횡행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프로야구 존립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만한 일은 아니다.
# 루머는 루머일 뿐
실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사인 거래와 관련된 루머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몇 년 전에는 3~4개 구단의 고참선수 몇 명이 정규시즌 때 각자 팀의 사인체계 정보를 주고받는 ‘담합’을 통해 타율을 끌어올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주로 수비 때 같은 팀 투포수의 구질 사인을 노출시켜 서로 득을 본다는 얘기였다. A 구단의 고참 B 선수는 이 같은 사인 거래 문제가 동료들에게 들통이 나면서 해당팀 감독에게 완전히 찍혀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중요한 건 이 같은 루머들은 대부분 추측일 뿐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프로야구는 축구와 다르다. 축구에서의 승부조작은 대규모로 이뤄지기 때문에 적발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실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야구에서는 사인 거래가 실제 이뤄지고 있다 해도 이건 특정 선수 개인 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현장에서 적발한다면 모를까, 훗날 ‘이러저러한 소문이 있었다’는 얘기를 근거로 조사를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김재박 감독이 진짜 사인 거래 문제를 언급했다고 해도 그 역시 전해들은 소문을 옮겼을 뿐인 것으로 파악된다. 진짜 심각한 수준의 사인 거래가 있다면, 그리고 이를 파악하고 있다면 취재진에게 대놓고 얘기할 리가 만무하다.
# 있는 것도 없는 것도…
프로야구에 사인 거래가 100%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약간씩 이뤄지고 있는 건 맞다. 그런데 중요한 타이밍에 악의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모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인 거래? 그거 실제 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효과 보긴 힘들 것이다. 생각해보라. 훈련 때 홈런 치라고 던져주는 배팅볼도 진짜 홈런으로 연결시키기 굉장히 어려운 게 야구다. 경기 중에 140㎞ 넘는 공들이 왔다갔다 하는데 구질과 구위를 알려준들 무조건 안타를 친다는 보장이 없다.”
야구라는 종목 자체가 사인 거래가 실효를 발휘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설명인 셈이다.
상대 타자 B가 타석에 섰을 때 포수 A가 사인을 가르쳐준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요즘은 선수들이 워낙 똘똘하다. 투수 C 입장에선 포수가 요구하는 공이 상황에 맞지 않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평소 포수 A와 타자 B가 친하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직구 사인이 나왔음에도 포크볼을 던져버렸다. 직구인 줄 알고 마음껏 휘둘렀던 타자는 헛스윙. 투수 C 역시 프로선수다. 기록이 곧 돈으로 연결되기에 조금만 이상한 눈치가 보이면 포수 사인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이런 사례가 있었다는 게 선수들의 증언이다. 중요한 건 이 같은 사례에서 보여지듯, 사인 거래란 게 마음 먹은 대로 되기도 힘들다는 사실이다.
# 과거의 사례들
다소 ‘동네 야구’ 같았던 시절인 80년대까지만 해도 사인 거래가 다소 있었다는 건 정설이다. 물론 7-0 정도로 점수 차가 크게 기울어 승부가 결정 난 경기 후반 8, 9회에 주로 사인 거래가 이뤄지곤 했다. 일단 안타를 맞아주고, 안타 친 타자는 1루에서 견제구에 걸려 일부러 아웃되는 방식이 있었다. 타자는 타율이 올라가고, 투수 입장에선 어차피 점수를 내줄 일이 없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투수 A가 명성을 날리던 시절이었다. 상대팀의 절친한 선배 타자가 경기 전 부탁을 해왔다고 한다. 경기가 기울어지면 직구를 한가운데 넣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직구를 던지기 전에 A가 유니폼 상의를 오른손으로 잡고 흔드는 게 약속된 신호였다.
웃기는 건 그 다음이었다. 경기 후반부에 실제 이런 찬스가 왔다. A는 유니폼을 흔들어 직구를 던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깨끗한 직구를 던졌는데 결과는 헛스윙. A는 평소 직구 구속이 150㎞를 넘나들던 투수였다. 그런데 치기 좋게 넣어준다는 생각에 속도를 슬며시 낮춰 140㎞짜리로 던졌다. 선배 타자는 평소 스피드에 맞춰 스윙을 했으니 타이밍이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약속하고도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 역이용 사례들
거꾸로 된 사례도 있었다. 역시 80년대 시절, ‘역정보’를 주면서 타자를 골려먹은 포수가 여기저기서 미움을 받았다는 사연이다.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 포수가 타자에게 넌지시 “자, 이번에 한가운데 커브 들어옵니다”라고 말해준다. 타자 입장에서야 잔뜩 기대하고 커브 타이밍에 맞춰 스윙을 준비한다. 그런데 실제 날아오는 건 빠른 직구. 이렇게 되면 꼼짝 못하고 당하게 된다. 이런 방법을 많이 써먹었던 포수는 욕도 많이 먹을 수밖에.
이와는 조금 다르게 ‘사인 훔치기’는 어느 팀이나 모두 하고 있는 합법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TV 중계화면을 녹화해뒀다가 반복해서 보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구질을 선택하고, 어떤 작전이 펼쳐지는지를 조사하는 방법이 그중 하나다.
사인 거래란 근본적으로 있어선 안 된다. 한국프로야구는 ‘100% 청정구역’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사인 거래를 안 하는 선수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에 놓인 적은 한차례도 없다. 간혹 선수 몇 명간에 약간의 ‘담합’이 이뤄졌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갈등이 불거질 만큼 문제시된 적은 없다는 얘기다.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함은 물론이다.
장진구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