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시련의 터널을 통과한 이운재가 골키퍼로는 처음으로 K리그 MVP를 수상했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이운재의 2007년이 암흑기였다면 2008년은 또 다른 희망을 본 시간들이었다. 지난 시즌 아시안컵 당시의 음주 파문으로 1년간 국가대표팀 자격 박탈과 3년간 대한축구협회가 주관하는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참회의 시간을 가진 이운재는 올시즌 리그 컵 대회 우승과 국가대표팀 복귀, K리그 챔피언에 이어 MVP 수상까지, 이운재의 축구인생은 가히 ‘롤러코스터’ ‘반전인생’이라고 부를 만하다.
12월 7일 FC서울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운재한테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어떤 선수보다도 드라마틱한 시즌을 보냈던 탓에 그를 만나고자 하는 언론사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더욱이 10일부터 3일간은 예비군동원훈련이라 9일 하루만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동하는 차안에서 인터뷰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이운재의 표정은 ‘맑음’ 그 자체였다. 수면 부족으로 힘들긴 하지만 얼굴과 목소리는 ‘쌩쌩’했다. 음주 파문 동안 아예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그는 주어진 시간동안 신나게 얘기해보자며 목소리 톤을 높여 갔다.
―이번 우승이 수원의 네 번째 우승이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사연 많은 우승이었을 것 같아요.
▲우승마다 사연이 있었겠죠. 98년은 창단 첫 우승이라는 의미가, 99년은 2연패를 차지했기 때문에, 2004년은 차범근 감독 부임 후 첫 우승이라…, 그렇죠. 어떤 우승보다도 이번 우승이 저한테는 가장 의미가 있는 우승이었죠. 반드시 잘해야만 했으니까요.
―음주 파문에 대해 물어봐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제가 겪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없었던 일도 아니구요. 하지만 기자들마다 계속 그 얘기를 꺼내니까 조금 싫기도 하네요.
―당시 은퇴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명예가 실추된 거나 마찬가지였잖아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제가 축구 안 하면 뭐 해먹고 살겠어요. 잠깐 생각은 해봤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더라구요.
―오늘 아침 라디오 인터뷰에서 2010년 남아공월드컵은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어요. 이 내용이 ‘은퇴’로 기사화하기도 했는데요.
▲기자분들은 제가 빨리 은퇴했으면 좋겠나봐요(웃음). 은퇴를 의미한 내용이 아니었어요. 이전처럼 주전 자리를 꿰차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보단 후배들이 더 좋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바탕이 되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즉 대표팀 고참다운 배려와 여유를 갖고 싶다는 거였죠. 물론 이런 생각 또한 ‘오버’나 마찬가지예요. 그때까지 제가 대표팀에 뽑힐 거란 보장이 없는 거잖아요. 허정무 감독님이 안 뽑아주시면 양보고 은퇴고 아무 소용없는 거니까.
―지난 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3차전 사우디아라비아전을 앞두고 16개월 만에 대표팀에 복귀했어요. 오랜 만에 들어간 대표팀이 이전과 많은 차이가 있던가요?
▲선수들 나이가 확 낮아졌어요. 이전에는 제가 선배들을 모시는 분위기였는데 최고참이 되다보니까 오히려 후배들 대하기가 어려워요. 절 너무 어려워할까봐 표정 관리도 해야 하고. 제가 그 분위기에 맞춰야 하잖아요. 저로 인해 분위기가 깨지면 안 되니까. 조금 어렵긴 어렵더라구요.
―어느새 박지성이 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어요. 한 번이라도 상상했던 부분이었나요?
▲(웃으면서) 글쎄요, 지성이가 주장으로 있는 대표팀에서 제가 뛸 거라곤 쉽게 상상이 안 됐겠죠? 지성이가 맨유 경기 일정으로 뒤늦게 대표팀에 합류하는 바람에 제가 카타르와의 평가전에선 임시 주장을 맡았어요. 그런데 제가 선수들의 리더로 팀을 끌고 나갈 위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오히려 후배 뒤에서 서포트해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믿었죠. 그래서 감독님께 말씀 드렸어요.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대표팀에선 저보단 지성이가 주장을 맡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제가 끌고 가면 선수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벽이 더 커질 수도 있잖아요.
이운재는 오랜만에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선수들과의 세대차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후배들이 어려워할까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래서 주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싶지 않았단다. 후배들과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좀 더 가까이, 따뜻한 가슴으로 다가가려 했다.
▲ 지난 9일 2008 삼성하우젠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 ||
▲그 선수들은 저보다 최고의 기량과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시기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점들이 아쉬울 따름이죠. 사실 긴장과 노력 없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순 없어요. 다들 능력이 출중한 선수들이니까 지금의 아픔을 자기 반성의 시간으로 삼고 더 열심히 노력해줬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음주파문이 불거지면서 ‘이운재가 스타 의식에 도취됐다’는 비난도 뒷따랐어요.
▲저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돌이켜보면 제 자신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잠깐 신앙적인 면에서 얘기한다면 신이 저를 채찍질 한 거죠. ‘너, 너무 잘못하고 있다’라고. 아픔도 컸고 깨달음도 많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떤 깨달음이었나요?
▲사회봉사 80시간 명령을 받고 3주 동안 일요일만 빼고 매일같이 장애인 복지시설에 가서 봉사 활동을 했었어요. 사실 처음엔 주위의 시선들로 창피한 마음이 앞섰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던 새로운 부분들, 즉 가진 것 없고 몸이 불편해도 행복함을 느끼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통해 제 자신을 깊이 반성할 수 있었어요. 만약 제가 계속 잘 나갔더라면 그런 부분들을 놓치고 살았을 거예요. 지금까진 약속 이행이었지만 앞으론 계속해서 그들과의 인연을 이어가려고 해요. 이제 시즌 마쳤으니까 다시 한번 찾아가보려구요.
―사실 올시즌을 앞두고 수원과 3년 재계약하면서 연봉 삭감을 받아들였어요. 수원과 재계약 전에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설, 팀 이적설 등 상당히 많은 소문들이 나돌았잖아요. 진실은 무엇이었나요?
▲당시엔 분명 힘든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감독님이 절 자극하지 않고 깨우지 않으셨다면 전 그냥 은퇴의 수순을 밟았을지도 몰라요.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저한테 오기가 생기게 하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흔드셨어요. 월드컵 이후부터 감독님과의 불화설이 계속 제기됐지만 그때 감독님께 말씀 드린 부분이 있어요. ‘운동장에서 다시 인정받을 수 있는 선수가 되겠다’라고.
이운재는 수원과 재계약 후,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만약 약속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도 고려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운재는 운동장에서 약속을 지켰고 결국 골키퍼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이건 좀 다른 질문인데요, 많은 팬들은 해외 진출에 도전하지 않은 데 대해 아쉬워하고 있어요. 어느 포털사이트에는 ‘만약 이운재가 빅리그에 진출했다면?’이란 내용으로 찬반양론이 벌어지기도 하더라구요.
▲전 안 가요. 지금 제 나이가 30대 초반이라고 해도 도전 안 했을 겁니다. 가서 성공하면 좋겠지만 못했을 땐 제가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인정받고 사랑받는 K리그가 좋아요(웃음).
―얼마 전 ‘백 투 스쿨’을 선언하셨어요. 2009학년도 경희대 체육대학원 스포츠학과에 입학할 예정이라면서요.
▲은퇴 후를 생각해서 고민 끝에 결정했어요. 실전 경험과 이론이 풍부한 지도자가 되고 싶거든요. 사실 운동장에서만 살던 사람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솔직히 설레기도 하고 공부할 거 생각하면 갑갑하기도 해요. 그래도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자꾸 미루기만 하면 기회조차 없어질 수 있잖아요.
―올해의 마무리는 ‘해피엔딩’이네요. 그래도 아쉬움과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아쉬운 건 없구요, 벌써부터 내년 시즌이 걱정이죠. 올 한 해 이렇게 좋은 결과를 맺었는데 내년에 다시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요. 젊은 선수들은 몸으로 때울 수 있지만 노장은 한 해 한 해가 달라요. 마음으론 운동장 20바퀴도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벌써 내년 걱정을 해요? 최근 셋째 아들을 보셨어요. 세 아이의 아빠이자 가장인데, 든든하면서도 묵직하겠어요.
▲행복하기도 하고,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면서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더 열심히 생활해야 될 것도 같고. 그동안 사연 많은 남편 때문에 톡톡히 마음고생하며 산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해요. 모든 건 제가 하기 나름이잖아요. 이제 이번 인터뷰를 끝으로 저한테 ‘음주 파문’ 운운하는 질문에는 대답 안 할 겁니다(웃음).
이운재의 환한 얼굴에서 그의 ‘현재’를 짐작해 본다. 거칠 것 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스타플레이어에서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본 그의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까지 이운재를 인터뷰했던 내용 중에서 이번 인터뷰가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그한테서 진심과 진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