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많은 선수들이 큰 품을 안고 프로 데뷔 무대에 오른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전성기 때는 잊고 살지만, 은퇴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게 되는 날카로운 ‘첫 경기’의 추억. 누구에게나 있었던 ‘처음’의 순간들을 되짚어봤다.
# 정근우도 데뷔전은 떨렸다
1군 데뷔전을 치른 선수들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마운드에 올라가는 순간, 혹은 첫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아무 것도 안 보였다”는 것이다. 경기 전, 혹은 경기 하루 전에는 긴장을 하는 선수도 있고 아닌 선수도 있다.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그라운드 한가운데로 달려 나가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온몸에 ‘내가 진짜 1군 경기에 나왔다’는 긴장감이 감돈다. 그 긴장이 약이 되느냐, 독이 되느냐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는 것이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2005년 막 프로에 발을 들여 놓았던 SK 정근우(현 한화)는 그해 현대와의 수원 개막전에 1번 타자 3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유격수 김민재, 2루수 정경배라는 쟁쟁한 키스톤 콤비와 함께였다. 첫 타석부터 안타도 쳤다. 그러나 1루에서 바로 견제 아웃 당했다. 그는 “프로라는 글자가 앞에 붙으니 모든 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며 “안타 2개를 쳤는데도 너무 많이 긴장해서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도루라면 자신감이 있었지만 2루가 한참 멀어 보이고 몸이 안 움직였던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
SK시절의 정근우. 사진 출처 :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KIA 안치홍은 입단 첫해인 2009년 곧바로 개막 엔트리에 포함됐다. 심지어 그해 4월 4일 시즌 개막전에서 8회 볼넷으로 출루한 팀 선배 이재주의 대주자로 처음 프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된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던 고졸 신인. 첫 경기에 대해 막연한 기대도 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갑자기 대주자로 나가라는 지시가 떨어져서 1루를 밟았는데, 베이스에 서 있으면서도 다리가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고교 때 전국무대 결승전도 치러봤고, 청소년대표로 세계무대에도 서봤지만, 야구를 한 뒤 그렇게 떨린 적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 데뷔전에 벌어진 갖가지 해프닝
현대 김수경은 1998년 4월 17일 쌍방울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6.1이닝 3실점으로 호투도 했다. 눈앞이 캄캄하던 신인 투수에게 힘을 실어준 건 심판의 판정 하나였다. 1회 프로 데뷔 첫 타자를 상대로 풀카운트에서 공을 던졌고, 그 공은 김수경의 눈에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심판은 그 공에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삼진. 김수경은 훗날 “그 덕분에 이후 두 번째 타자, 세 번째 타자까지 삼진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너무 떨어서 잘못 본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때 심판이 너무 고마웠다”며 웃었다.
삼성 정인욱은 2010년 5월 4일 롯데전에서 입단 2년 만에 처음 1군 마운드를 밟았다. 0 대 3으로 뒤진 2회초 2사 만루에서 등판 지시가 떨어졌다. 첫 타자는 당시 롯데 소속으로 타점 1위를 달리고 있던 베테랑 홍성흔(현 두산). 그런데 홈인 대구구장 전광판에 정인욱이 아닌 다른 이름이 떴다. 전광판 관리자가 처음 보는 정인욱의 이름 대신 당시 삼성 소속이었던 베테랑 불펜 투수 정현욱의 이름을 기재한 것. 다행히 곧 정정됐고, 이 해프닝은 전화위복이 됐다. 피식 웃다가 긴장이 풀린 정인욱은 홍성흔을 파울 플라이로 잡아냈다.
한화 시절의 박찬호.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이보다 더 특별한 데뷔전의 기억도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 최다승(124승)을 올린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를 거쳐 2012년 고향팀 한화에 입단했다. 그리고 4월 12일 청주구장에서 39세의 나이로 역사적인 한국 프로야구 데뷔전을 치렀다. 거짓말을 좀 보태면, 대한민국 야구계 전체의 시선이 청주구장으로 집중됐다. 백전노장 박찬호는 두산을 상대로 6.1이닝 2실점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했다.
게다가 두산의 첫 타자였던 이종욱(현 NC)과 훈훈한 장면도 연출했다. 1회 1번 타자로 나선 이종욱은 박찬호가 첫 공을 던지기 직전에 타석에서 헬멧을 벗고 인사했다. 한국에서는 ‘신인’이었지만, 그전에 이미 많은 야구 선수들의 롤 모델이었던 박찬호다. 한국에서 정식으로 상대하게 된 첫 타자로서 선배에게 예우를 갖췄다. 박찬호도 모자를 벗어 이종욱에게 답례했다. 이후 두고두고 이종욱의 행동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 데뷔전도 명불허전이었던 류현진
떡잎부터 남달랐던 케이스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한화는 2006년 4월 12일 잠실 LG전 선발 투수로 19세 고졸신인 류현진(현 LA 다저스)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가 초구를 던진 순간 잠실구장 공기가 달라졌다. 류현진은 LG 1번 타자 안재만과 풀카운트 접전 끝에 7구째 시속 151km짜리 직구를 던져 데뷔 첫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냈다. 이후 삼진 아홉 개를 더 잡아내 역대 데뷔전 최다 탈삼진 기록을 다시 썼다. 최종 결과는 7.1이닝 무실점 승리 투수. 한국 야구의 지형을 뒤흔든 ‘괴물’의 탄생을 알린 경기였다.
한화 시절의 류현진. 일요신문 DB
류현진의 팀 선배이자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한 200승 투수인 빙그레 송진우도 그랬다. 대졸 신인 송진우는 1989년 4월 12일 대전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9이닝 동안 4피안타 7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해태 김용남, 롯데 천창호, OB 장호연(이상 1982년), 롯데 박동수(1985년) 이후 4년 만이자 역대 다섯 번째 데뷔전 완봉승 기록이었다. 송진우 이후로 데뷔 첫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둔 투수는 지금까지 27년째 나오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다. 삼성 이승엽은 1995년 4월 15일 잠실 LG전에서 9회 류중일 현 삼성 감독의 대타로 프로 데뷔 첫 타석에 나섰다가 LG의 특급 마무리 투수 김용수를 상대로 중전 안타를 때려냈다. 삼성 양준혁도 1993년 4월 10일 대구 쌍방울전에서 6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하면서 출발부터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 레전드들도 첫 경기는 고전했다
그래도 여전히 데뷔 첫 경기에서는 고전한 선수가 더 많다. 류현진의 뒤를 이을 ‘괴물 신인’으로 주목 받았던 SK 김광현은 2007년 4월 10일 문학 삼성전에서 프로 무대 첫발을 내디뎠지만, 날씨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 공을 던져야 했다. 김광현은 결국 0-0으로 맞선 4회 양준혁에게 비거리 125m짜리 대형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 안산공고 시절 3년 동안 단 하나의 홈런도 맞지 않았기에 더 충격이 컸을 터다. 김광현은 결국 4이닝 8피안타 3실점을 기록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프로야구 역사를 빛낸 레전드 스타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최고 투수였던 해태 선동열은 1985년 7월 2일 대구 삼성전에서 삼성 재일교포 김일융과 선발 맞대결을 펼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7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맞섰다. 그러나 8회에만 5안타 2볼넷을 내주며 5실점 했다. 프로 생활 내내 고작 40번만 패전투수가 됐던 선동열의 첫 1패가 데뷔전에서 나온 것이다.
사진 제공 : KIA 타이거즈
롯데 최동원도 1983년 4월 3일 구덕 삼미전에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가 2.1이닝 5피안타(1피홈런) 2실점으로 부진했다. 삼성 김시진 역시 그해 5월 3일 대구 삼미전에서 0-2로 뒤진 8회 1사 후 처음으로 프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볼넷과 2루타, 안타, 희생플라이를 연이어 허용하며 1.2이닝 3안타 3실점(2자책점)으로 돌아섰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오른손 최다승(161승) 투수인 빙그레 정민철도 데뷔전에서 호되게 당했다. 1992년 LG와의 대전 개막 2연전 두 번째 경기. 팀은 4점 리드 중이었고 주자는 만루였다. 스프링캠프도 못 갔던 고졸 신인 투수가 갑자기 출전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야심 찬 투구는 얼마 못 갔다.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김동재에게 동점 만루홈런을 얻어맞았다. 다음 타자에게도 또 안타를 내줬다. 그대로 강판됐다. 정민철은 “그때 담장 밖으로 날아가던 타구를 바라보며 멍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했다.
역대 최고 유격수 가운데 한 명이던 MBC 김재박은 프로 원년이던 1982년 아마 선수 자격으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뒤 그해 9월 말 뒤늦게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나이 28세. 10월 2일 대구 삼성전이 ‘개구리 번트’ 스타의 프로 데뷔전이었다. 그러나 삼성 선발 이선희에게 꼼짝없이 당했다. 삼진 2개를 포함해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김재박의 무안타 행진은 이듬해 4월 3일 OB와의 잠실 개막 2연전 두 번째 경기에서 19타석 만에 깨졌다.
OB 조범현은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인 1982년 3월 28일 동대문 MBC전에 8번 타자 겸 포수로 선발 출장했다, 에이스 박철순과 배터리로 호흡을 맞춰 팀 승리를 이끌었지만, 타석에서는 첫 타석 삼진을 시작으로 4타수 무안타로 물러났다. 같은 팀 동료였던 김경문은 사흘 후인 3월 31일 구덕구장에서 열린 롯데전에서 8회 선발 포수 조범현 대신 마스크를 썼다. 타석에는 들어서지 못하고 포수로서만 1이닝을 소화했다. 그때 서로 임무를 교대하던 두 포수는 지금 나란히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명장들로 꼽힌다. 당시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던, 대단한 인연이자 역사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투타 맹활약’ 오타니 계보 이을까 일본 ‘이도류’ 신인 히라누마 시선집중 일본은 투타를 겸업하는 선수를 ‘이도류(二刀流)’라 부른다. 한국보다 훨씬 오래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도 드문 존재다. 한 우물만 깊게 파도 최고가 되기 어려운 곳이 프로의 세계다.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 당연히 한 마리도 손에 넣기 어렵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선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다. 주인공이 ‘역대급’ 천재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한국이 지난해 프리미어12에서 제대로 당했던 니혼햄의 오타니 쇼헤이(22)가 대표적이다. 오타니는 2013년 니혼햄에 입단하면서 등번호 11번을 받았다. 메이저리그로 떠난 전 에이스 다르빗슈 유가 남기고 간 번호다. 시속 160km 직구와 150km 포크볼을 던지는 신인 투수에 대한 니혼햄의 기대치가 반영됐다. 과연 ‘괴물’이었다. 데뷔 직후부터 꾸준히 화제를 뿌렸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52년 만에 투수와 야수로 모두 올스타에 선정되는 진기록도 썼다. 2013년 퍼시픽리그 외야수 부문 올스타에 뽑힌 데 이어 2015년 투수 부문 올스타로 이름을 올렸다. 긴테쓰의 세키네 준조가 1953년 투수, 1963년 외야수로 각각 선정된 이후 처음 벌어진 ‘사건’이다. 세키네의 경우엔 두 번의 올스타전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차가 났다. 오타니는 2년 만에 모두 해치웠다. 이뿐만 아니다. 2014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에 두 자릿수 승리와 홈런을 동시 달성했다. 올 시즌에도 두 번째 10승-10홈런에 도전할 기세다. 올해는 승리보다 홈런 페이스가 더 빠르다. 전례가 없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한동안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듯했다. 히라누마 쇼타. (사진 출처 : 니혼햄 파이터스) 그런데 예상보다 더 빨리 후계자 후보가 나타났다. 신인 드래프트 4순위로 니혼햄에 지명돼 올해 입단한 히라누마 쇼타(19)다. 히라누마는 고교 2학년이던 2014년부터 쓰루가케히고교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고교 야구 무대를 평정했다. 2014년 여름과 2015년 봄, 여름에 세 차례나 고시엔 전국고교야구대회에 나가 12경기에 선발 등판했다. 고시엔 통산 승수가 무려 10승. 이 가운데 완투승이 아홉 번이다. 하지만 니혼햄은 히라누마를 내야수로 지명했다. 히라누마가 팀에서 4번 타자 겸 유격수로 활약하면서 고시엔 통산 타율 0.375(40타수 15안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교 시절 홈런 21개를 터트렸고, 50m 달리기를 5.8초에 끊는 빠른 발까지 갖췄다. 이미 오타니의 성공 사례를 본 니혼햄이 또 한 번 ‘이도류’로 욕심을 낼 만한 선수다. 실제로 니혼햄은 고교 시절 많은 공을 던진 히라누마의 어깨를 일단 쉬게 한 뒤 유격수로 프로 무대에 안착하면 다시 투수 훈련을 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히라누마 스스로도 팀의 결정에 기뻐하고 있다. 역사에 남을 만한 투타 겸업 선수가 바로 곁에 있으니 이만한 행운이 없다. 니혼햄은 기대주 히라누마의 잠재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오타니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를 대비해 차세대 스타를 키우고 있다. 열심히 프로 수준으로 기량을 끌어 올리고 있는 히라누마의 미래에 일본 프로야구 전체의 시선도 집중돼 있다. 류현진 이후 10년 넘게 리그 전체를 뒤흔들 새 얼굴을 찾지 못한 한국 프로야구가 충분히 부러워할 만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