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란 단어는 이젠 일반인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본래 신체적인 손상 및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뒤 나타나는 정신적 장애를 뜻한다.
사실 프로야구 선수들이 경기 중에 이 같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리는 없다. 대신 기대를 많이 받았던 선수가 특정 대회에서 말도 안 되게 부진한 뒤 그 후유증을 겪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트라우마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결정적 순간마다 구원등판했지만 거의 매번 적시타를 얻어맞았던 KIA 한기주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다.
이번 WBC와 관련, 앞으로 트라우마가 우려되는 대표적인 선수는 SK 왼손 에이스 김광현이다. 김광현은 지난 3월 7일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1라운드 첫 맞대결 때 선발 등판해 1⅓이닝 동안 8실점하는 치욕을 겪었다. 자타 공인하는 우리 대표팀의 ‘1번 투수''''로서 역할이 기대됐지만 철저하게 분석하고 나온 일본 타자들에게 뭇매를 맞은 셈이 됐다. 그 후 선발 자격을 사실상 박탈당한 뒤 중간계투로만 몇 차례 등판했다. 대표팀 내 선배들이 걱정이 많았다. 같은 팀 포수인 대표팀의 박경완은 “광현이가 일본전에서 무너진 뒤 그 후유증을 겪는 것 같아 옆에서 보기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광현은 데뷔 2년차인 지난해 16승4패, 방어율 2.39를 기록하면서 단기간에 급성장한 케이스다.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일본전에서 호투하며 에이스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데 만 21세의 어린 투수가 단기간에 최고의 스타로 부상한 뒤 이번 WBC에선 한순간에 처참한 패배를 맛봤다는 게 문제다. 베테랑 선수들처럼 훌훌 넘기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가 크게 남았을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시즌 초반 김광현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WBC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지는 선수가 또 한 명 있다. 롯데 에이스인 손민한이다. WBC 대표팀에 차출됐지만 전체 9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손민한은 단 한 차례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본인 속이 타들어간 것이야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론 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국내 야구팬들로부터 ‘전국구 에이스’란 칭호를 받던 그가, 3년 전 제1회 WBC에선 미국전 승리투수가 됐던 그가, 이번엔 아예 없는 선수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 김광현(왼쪽) / 손민환 | ||
대표팀 김인식 감독은 대체 왜 손민한을 한 차례도 기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대회 기간 내내 코칭스태프가 쉬쉬했지만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2월 중순 대표팀의 하와이 전훈캠프가 시작됐을 때 코치진은 손민한이 몸을 거의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합류한 걸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다른 투수들이 소속팀에서 대부분 70% 이상 수준까지 몸을 만들어온 것과 비교하면 손민한은 그 절반 정도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몇몇 대표팀 관계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찌됐든 베테랑 선수인 데다 주장까지 맡고 있는 손민한을 코칭스태프가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워낙 경험 많은 선수라 캠프가 진행되는 동안 구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손민한이 제 구위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회가 시작됐다. WBC는 경기 특성상 단 한 경기도 우습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손민한은 끝내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투수, 타자를 통틀어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출전 기록이 없는 선수로 남게 됐으니 명색이 소속팀 에이스인 그로선 얼굴을 들기 힘든 결과였다.
여느 해와 달리 이처럼 당황스런 과정을 겪은 뒤 맞이한 시즌이기 때문에 손민한이 국내 리그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도 상당한 관심이 모아진다. 어떻게든 잘 던져야 WBC에서 겪었던 수모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인식 감독이 대회 막판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위대한 도전’이란 표현이 알고보니 한화그룹의 올해 슬로건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걸 설명해준다. 공식석상의 그 한마디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덕분에 올해 말 재계약을 무난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화그룹으로선 돈 한푼 안 들이고 엄청난 홍보효과를 얻었다. 올해 말 한화와의 3년 계약이 마무리되는 김 감독은 당초 쉽게 재계약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됐었다. 하지만 WBC의 빛나는 성적과, 모그룹에 엄청난 무형의 부가가치를 안겨줬다는 점에서 이제는 재계약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WBC 성적만으로도 재계약은 확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김 감독은 말 한마디를 추가함으로써 3년이란 재계약 기간을 벌게 됐다.
올해 프로야구의 특징은 전력 평준화가 심화됐다는 점과 전반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사실로 요약된다. 이 같은 두 요소는 결국 순위싸움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걸 의미한다. 일부에선 SK, 두산, 롯데가 3강 구도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하지만 SK를 제외한 나머지 7개 팀은 현재로선 누가 낫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재계약을 100% 단정지을 순 없지만, 향후 입지가 공고해진 김인식 감독으로선 이처럼 치열한 4강 전쟁의 환경하에서도 비교적 여유있게 자신만의 야구를 펼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셈이다.
장진구 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