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속 150㎞의 돌직구로 세계를 놀라게 한 정현욱. 시즌 개막 이후 마무리로 기용되며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그중에서 국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준 서른두 살의 삼성라이온즈 투수 정현욱은 남다른 야구 인생으로 인해 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다. 시즌 개막 이후 특급 마무리 오승환을 대신해 마무리로 기용되기도 했던 정현욱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주변의 관심 속에서도 여전히 1군 잔류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계속된다고 하소연했다.
WBC 대회가 분명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불안해요. 잠깐 반짝하고 주저 앉는 게 아닌가 싶어서죠.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해온 선수들은 지금의 인기나 실력에 만족하지 못해요. 항상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에 맘 편히 잘 수가 없죠. 저도 지금 그렇거든요.
아무리 국제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해도 시즌 들어가면 어떻게 달라질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기자가 정현욱을 만난 날, 이미 그는 LG와의 개막 2연전에 연거푸 등판, 호쾌한 탈삼진 쇼를 펼치며 타자들의 방망이를 솜방망이로 전락시켜 버렸다. 마무리 오승환이 버티고 있었지만 선동열 감독은 정현욱에게 마무리를 맡기며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상황. 그래도 정현욱은 안심을 하지 못했다.
“나이가 있다 보니까 한 해 한 해가 마지막 같아요. 지금도 지난해 성적이 좋아서 남아 있는 거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2군으로 쫓겨나거나 영원히 야구를 못하게 될 수도 있었어요. 젊은 선수들은 기회라는 게 있지만 나이 먹은 선수들은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그걸 절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2005년 병역비리에 연루되면서 선수 생명이 끝날 뻔했던 정현욱은 실형을 살고 나와 경산시청에 26개월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3년간을 마운드에서 벗어나 야구장 밖 인생을 산 것이다.
“그때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저랑 비슷했거나 저보다 못했던 선수들이 1군에서 자리를 잡는 걸 보니까 자꾸 비참해지는 거예요. 그 선수들은 연봉이 벌써 억대로 진입했는데 전 군복무 중이고…. 상실감이 점점 커져만 갔죠. 무엇보다 조급했던 게 과연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을까? 예전처럼 공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호였습니다. 공도 제대로 던져보지 못했는데 이전처럼 공을 뿌릴 수 있을 자신이 없었던 거죠.”
2007년 복귀한 정현욱은 한 마디로 패전처리용 투수였다. 14.2이닝에 평균 자책 5.52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2008년 시즌 이후에도 다소 불안한 출발을 보였지만 지난해 4월 중순 김태한 코치를 우연히 목욕탕에서 만났던 게 야구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김 코치님이 탕 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맞아도 되니까 마음을 편히 갖고 가운데로 던지라고요. 감독님도 볼은 좋은데 자신감 있게 공을 못 던지니까 답답해 하신다고요. 평범한 말씀 같았지만 전 김 코치님의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을 던졌어요. 사직원정 경기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그 게임에 선발로 나가 큰 점수 차로 이겼거든요. 그 경기 이후 자신감을 회복하게 됐죠. 작년에 김태한 코치님을 목욕탕에서 못 만났더라면 WBC의 정현욱도 없었을 거예요.”
정현욱은 후배 오승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붙박이’와 ‘오락가락’의 차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즉 오승환은 컨디션이 안 좋아 잠시 공이 안 좋아도 1군에 머물며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자신은 그 즉시 2군으로 내려갈 처지라는 것.
“1, 2군을 오락가락하다보면 눈치를 보게 돼요. 못 던져도 1군에 있을 거란 자신이 있으면 경기 결과에 대해 별다른 부담이 없는데 확실한 1군을 보장받지 못한 상황이라면 실투 하나에 2군으로 떨어지게 되거든요. (오)승환이는 대한민국 최고의 마무리 투수잖아요. 못 던지면 다음에 잘 던지면 되지 할 수 있지만 전 그럴 처지가 아니니까요.”
정현욱은 시즌 초 오승환이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해서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승환이는 100세이브를 넘게 한 최고 투수예요. 어떤 상황에서라도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죠. 자꾸 언론에서 안 좋다고 하면 선수도 의식하게 마련이거든요. 저 또한 WBC 대회를 앞두고 언론에 ‘밸런스가 안 맞는다느니 폭투를 던졌다느니’ 하는 기사가 실렸을 때 위축이 됐어요. 실제론 안 그런 것 같은데 ‘진짜 내가 밸런스가 안 맞나?’ 싶더라니까요.”
“대표팀은 단기전이잖아요. 못하면 거기서 그냥 끝인 거잖아요. 못했다고 두고두고 씹힐 일도 없고 연봉이 깎이거나 2군으로 내려갈 걱정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두려울 게 없었죠. 잘릴 염려가 없으니까. 솔직히 저보다 잘 던지는 선수가 얼마나 많았어요? 아무도 저에 대해 기대를 안 하니까 더욱 마음이 편했죠. 엔트리 탈락 위기에 있었던 선수가 던지면 얼마나 던지겠어요?”
‘칠 테면 쳐 봐라, 맞으면 내려가면 된다, 내 뒤에 좋은 투수 많으니까 걱정할 거 아무 것도 없다.’ WBC 때 보여준 정현욱의 묵직한 돌직구의 비결은 바로 이런 ‘무심투’에 있었던 것이다.
정현욱은 류현진 김광현 봉중근 등 자신과 ‘레벨’이 다른 선수들과 똑같은 태극마크를 달고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병역비리 사건 이후 모든 일은 순리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깨달았어요. 안 되는 걸 억지로 뒤집었다가는 큰 탈이 난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그래서 대표팀에서 탈락 위기라는 사실을 알고도 별로 실망하지 않았죠. 와이프한테 곧 한국으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얘기도 했었고요. 오히려 대표팀에선 마음이 편했어요. 그런데 소속팀으로 돌아오니까 조금 조바심이 나네요. 왜냐고요? 여긴 직장이잖아요. 가족들 밥줄이 걸린 직장이요.”
투수들은 대부분 선발에 대해 욕심을 낸다. 선발이 안 될 경우 차라리 마무리를 택한다. 중간계투는 사실상 투수들의 선호 보직이 아니다. 그런데 정현욱은 색다른 논리로 중간계투의 매력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2003년인가? 노장진 선수가 컨디션 난조에 빠졌을 때 잠깐 마무리를 맡았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운 보직이더라고요. 중간계투는 뒤에 빵빵한 투수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부담없이 던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마무리는 믿을 구석이 없잖아요.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막아야 하는 거니까. 이번에 LG전에도 계속 더그아웃을 쳐다봤어요. 승환이랑 교체할 시점이 됐는데 안 바꿔주니까 이상하더라고요. 마무리가 있으면 자꾸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정현욱에게 자신을 대기만성형 선수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역시 겸손한 대답이 흘러나온다. 그는 자신이 아직 미완의 선수라고 정리했다. 자신은 아직 갈 길이 먼데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이제 그 정도면 됐다’라고 생각한다는 것. 해놓은 것도 별로 없고 커리어도 밋밋하다며 한없이 자신을 낮추었다.
그러면서 애써 들뜨지 않으려고 자신을 진정시킨다는 말도 덧붙였다.
“류현진, 김광현을 보면 같은 투수로서 정말 부러워요. 그 친구들은 어느 순간에 집중해야 되는지를 아는 것 같아요. 겁이 없어요. 뭐든지 자신감이 넘치고. 가볍고 경쾌하죠. 저처럼 안 된다고 머리 싸매고 있질 않아요. 툭툭 털어버리기도 잘하고. 정말 탐나는, 좋은 선수들이에요.”
마운드에서 좀처럼 얼굴 표정이 없는 탓에 긴장,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정현욱은 그거야말로 완벽한 ‘쇼’라고 말했다.
“제가 속으로 얼마나 떨고 있는데요, 제 얘기 들으셨으니까 아실 거예요. 제 성격을. 어휴, 지금도 타자들한테 얻어 맞을까봐 노심초사해요. 그게 표정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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