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프리드리히스하펜 | ||
독일에서 한번 머리카락을 잘랐다가 완전 이상한 스타일이 됐어요. 한국 들어갈 때까지 참아야겠다 싶어 길렀더니 어제 그런 머리가 돼 있었던 거죠. 어떤 사람은 아예 묶고 다니라고 하더라고요.^^”
어제는 인천공항, 오늘은 김해공항에 나타난 문성민은 출국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와 짧은 포옹을 했는데 경상도 사람이라 그런지 부자지간의 애정 표현이 그리 살갑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에게 짐을 맡겨 놓고 라운지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차가 극복이 안돼 너무 피곤하다”고 하소연한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문성민이 살고 있던 프리드리히스하펜이란 도시에 대해 묻자, “아, 우리 동네요?”하고 말하다가 폭소를 터트린다. “8개월 살았다고 ‘우리 동네’란 말이 나오네요”하면서. 프리드리히스하펜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 인접해 있는 독일의 남부 지역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다. 그래서 젊은 사람보다는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국 교포들도 10여 명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로움을 곱씹었던 문성민한테는 그곳 교포들의 응원과 보살핌이 큰 의지가 되었다고 한다.
용병들 많아 영어로 훈련
“한 교포 분이 자전거를 빌려주셨어요. 제가 면허가 없어서 아예 차가 없었거든요. 체육관이나 시내를 모두 걸어서 다니다가 그 자전거 덕분에 한층 편하게 생활했어요. 시내까지 가려면 한 30분 정도 걸었으니까요.”
독일 선수보다는 브라질, 슬로바키아 등 각국에서 모여든 용병들이 주축을 이루는 프리드리히스하펜 팀에서 문성민은 유일한 아시아 용병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더욱이 지난해 입단할 당시 월드리그대회 예선에서 득점 1위에 오른 탓에 독일 현지 언론들의 관심도 지대했다. 오죽했으면 프리드리히스하펜 팀이 개막전 포스터에 문성민 얼굴을 단독으로 실었을까.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식 배구에 익숙한 저로선 유럽식 배구 스타일이 맞지 않았어요. 처음엔 라이트로 뛰었는데 세터의 토스가 반 박자 빠르더라고요. 아니 제가 반 박자 늦었겠죠. 한국에선 서너 발자국 뛴 후 점프해 내려 꽂잖아요. 그런데 거긴 그 자리에서 점프해 때리는 스타일이라 그 타이밍을 맞추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동안 공백기가 있었죠.”
워낙 용병들이 많다 보니까 따로 통역이 없었다. 용병들 때문에 팀 훈련은 영어로 진행되었지만 영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갔던 문성민으로선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따름이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 힘들 거라곤 예상했었거든요. 그런데 현실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다보니 처음 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기 어렵거든요. 그럴 때 선수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제가 영어 못한다는 걸 알고 최대한 배려해서 가르쳐 주려 했고요. 그런데 욕을 먼저 알려주더라고요^^.”
지난해 10월 3일, VCO 베를린과 후반기 개막전을 통해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른 문성민은 당시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한마디로 어리버리한 상태였다”고 회상한다.
“그때 아마 7득점을 했을 거예요. 공격성공률이 30~40%밖에 안 됐어요. 경기 끝나고 어디로 도망 가서 숨고만 싶더라고요. 그런데 구단 관계자들이 다가와선 ‘정말 잘했다’며 끌어안는 거예요. 데뷔전치고는 잘했다는 표현이었지만 제 자신한테 많이 실망스런 경기였어요.”
팀의 훈련 스타일과 시스템에 적응하기도 어려웠지만 ‘하숙생’이 아닌 ‘자취생’으로 지내기엔 더더욱 힘들었던 모양이다. 독일에서 지낸 8개월여의 시간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기’였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 생활이 녹록지만은 않았던 것.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집안 일”
“훈련이나 시합이 끝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오늘 뭐 해 먹지?’였어요. 먹을거리가 있는지 없는지, 시장을 봐야 하는지, 빨래는 제때 했는지, 집이 어지럽혀 있지 않은지, 주부들처럼 신경을 써야 했죠. 운동 끝나고 쉬고 싶은데 밥해서 먹어야 하고 내일 운동하려면 또 식사준비를 해야 하고, 정말 ‘집안 일과의 전쟁’이라고 할 만큼 혼자서 그걸 감당하기가 무척 버거웠어요.”
부산에 계신 어머니가 독일로 들어오시겠다고 했지만 문성민은 아들을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 어머니를 ‘감옥살이’시키긴 싫어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문성민은 구단에서 마련해준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 2주가량 팀 동료인 벤디니와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 브라질 출신인 벤디니와 말이 통하지 않아 내심 걱정을 했었는데 어디서 알았는지 벤디니가 컴퓨터에 번역기를 깔아 놓고 문성민을 맞이했던 것. 즉 문성민이 한글로 대화를 쳐 포르투갈 번역기를 돌리면 벤디니가 그걸 읽고 다시 한글 번역기로 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나중엔 좀 지치더라고요. 간단한 영어 단어로 의사 소통을 하다가 나중엔 아예 각자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라 거기서 지내는 동안 불편하지 않았어요.”
세터와의 호흡이 맞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문성민의 출장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가 나중엔 아예 벤치로 물러나 있기도 했었다. 그런데 시즌 막판에 레프트로 뛰던 선수가 부진하자 감독이 문성민을 라이트에서 레프트로 옳겼고 원래의 포지션을 찾게 된 문성민의 공격 본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레프트에선 세터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도움닫기를 통해 스파이크를 내려 꽂을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제 자리를 찾게 되니까 이전의 실력이 발휘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선수들도 비로소 제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였고요. 전 라이트보단 레프트가 맞거든요. 대학에서도 대표팀에서도 레프트로 뛰었으니까요. 더욱이 팀이 우승을 거둔 마지막 경기에서 가장 좋은 플레이를 선보여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행운아나 마찬가지죠. 첫 해외진출 팀에서 우승의 기쁨을 맛봤으니까요.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그랬어요. 파이팅 넘치는 제 플레이가 입단할 당시의 문성민 같지 않았다고요.”
개인 성적이 부진했을 때 한국의 매스컴에선 이런 저런 의혹들을 제기하며 문성민의 마음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중 가장 황당했던 내용이 ‘왕따설’.
“제가 팀에 적응을 못하고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라고 기사가 나온 거예요. 물론 동기인 황동일과 전화 통화하면서 농담 삼아 ‘말도 안 통하고 친구도 없어 외롭다’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순전 장난식 대화였거든요. 가뜩이나 포지션 문제로 힘들었는데 한국에서 그런 기사가 나온 걸 보니까 정말 속상하더라고요.”
더욱이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출전을 해도 득점을 올리지 못할 경우, ‘문성민 몇 경기째 무득점’ 운운하며 자신의 경기력에 유감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글을 보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됐다고 한다.
“저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적응보단 바로 성적을 내길 바라는 언론이 원망스러웠어요. 그 후론 한국에서 오는 전화는 무조건 받지 않았어요. 기사도 보지 않았어요. 진짜 외로웠습니다. 세상에 저 혼자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한국에서 KEPCO45로의 복귀설이 나돌 때는 진짜 심각하게 (복귀를)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현재 문성민 앞에는 세 가지의 길이 열려 있다. 첫 번째 길은 프리드리히스하펜과의 재계약, 두 번째 길은 터키나 그리스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로의 이적, 그리고 세 번째는 KEPCO45로의 복귀다. 문성민은 귀국시 공항 인터뷰에서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생각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결혼할 ‘여친’ 이젠 없어요”
“지난해 독일로 진출할 때 너무 급하게 나간 것 같아요. 자신감 하나만 믿었다가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국내 복귀도 고려 중이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외국으로 나가기 힘들 거예요. 잘 아시다시피 독일에 진출하기까지 굉장히 힘든 과정을 거쳤잖아요. 부모님과 상의를 할 텐데 결정은 제 몫이에요. 곧 진로 문제를 매듭지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KEPCO45는 문성민을 데려오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문성민이 귀국할 때 인천공항에 팀 마스코트인 빛돌이는 물론 팀 고위 관계자들까지 대거 마중 나가 문성민을 환영했다.
비록 8개월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난해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문성민과 지금의 그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전한다. 배구 실력도 실력이지만 밥하고 살림하며 쌓은 내공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인터뷰 말미에 갑자기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다. 지난해 기자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자랑했던 ‘그녀’. 그래서 “혼자 지내기 힘들면 여자친구랑 빨리 결혼하면 되잖아요?”라고 아무 생각없이 물었더니 문성민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저, 그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독일 가기 전에요. 그래서 결혼을 하고 싶어도 여자가 없네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