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대표팀 소집 상견례에서 다리부상으로 깁스를 한 하승진. 연합뉴스 | ||
>>전임감독제 두고도 갈등
문제의 공문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오는 자체로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 인선은 아마농구를 대표하는 KBA의 고유 권한. 아마농구 지원금을 명목으로 KBL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특정 감독을 그것도 KBL 총재가 직접적으로 거론한 것 자체는 KBA 이사진의 심기를 건드리고도 남는 일이었다.
더구나 KBL과 KBA 두 단체는 대표팀 전임감독제를 두고 이미 갈등이 고조된 상황. 김남기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대구 오리온스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실상 전임감독의 월급을 지급하던 KBL은 전임감독제를 폐지하려 했다. 반면 KBA는 차기 감독 후보까지 거론하면서 전임감독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결국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올 한 해만 국제대회에서 현직 프로팀 감독이 사령탑을 맡기로 했는데 KBA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 와중에 KBL 총재의 ‘비상식적인’ 개입까지 현실로 닥치자 KBA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른 것이다.
5월 4일 방이동 KBA 회의실에서 열린 국가대표 선발 강화위원회. KBA 관계자 중 한 사람은 “스타 출신 감독이 대표팀을 맡는 것이 총재님의 뜻이라면 선수들 모두 최고 스타로 구성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허리 디스크로 시즌 내내 고생한 김승현(오리온스)과 왼무릎 내측 측부와 전후방 십자인대가 골고루 파열된 방성윤(SK)에게도 태극마크를 달게 했다. 시즌 막판 발목 부상으로 아직도 다리를 저는 김주성(동부)과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한 하승진(KCC), 무릎이 시리다는 주희정(KT&G)과 올 시즌 71경기를 뛰며 아직도 온몸이 만신창이인 추승균(KCC)까지 모조리 대표팀에 포함시켰다. 상무와 중앙대 소속으로 다른 대회에 참가하고 있어 소집이 불가능한 양희종과 오세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화위원회에 참석한 허재 대표팀 신임감독과 김동광 KBL 경기이사는 우려를 감출 수가 없었다. 시즌 중에 직접 두 눈으로 이 선수들의 상태를 확인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굳은 결심을 한 KBA 이사진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선발된 12명 중 8명 ''고장''
프로농구 관계자는 “농구인이라면 납득이 안 가는 선발이다. 일반 팬들이 인기투표를 한 것 같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22명의 예비 엔트리 중 12명의 최종 엔트리를 뽑더라도 1~2명의 선수는 만약을 대비해 교체 후보로 점 찍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허리 디스크로 2년 넘게 고생하고 있는 김승현을 선발하고 예비엔트리 포인트가드진 중 비교적 컨디션이 좋은 김태술(SK)을 탈락시킨 것은 농구 관계자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차세대 빅맨 중 최고의 재목으로 꼽히는 김진수(메릴랜드대) 역시 확실한 사유도 없이 이번 대표팀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굳이 “더 이상 엔트리 교체는 없다”고 못을 박은 것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WBC 야구대표팀의 경우 수비의 핵인 유격수 박진만(삼성)을 하와이 전지훈련 때까지 데려간 뒤 충분한 기회를 주고 결국 몸 상태가 만들어지지 않자 엔트리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결국 13일 처음으로 소집된 대표팀은 예정된 첫 훈련을 취소했다. 12명 중 8명이 러닝조차 불가능했다.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할 수 있는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번 대표팀 선발에 역할을 담당했다는 농구협회 관계자가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대표팀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전언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결국 이런 식의 선발이 국제 무대에서 참담한 패배로 이어질 것이고, 그 책임은 이름값으로 감독을 선임하라고 압력을 넣었던 KBL 총재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쉬운 말로 “어디 한번 맛 좀 보시오, 총재!”나 다름없다.
선수들의 반응에도 여전히 의문부호가 달려 있다. 대표팀 명단이 발표됐을 때 “황당할 뿐이다. 지금 이 몸으로 어떻게 경기를 뛰라는 건가. 내 상태는 농구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나”라고 강변했던 A 선수는 13일 첫 소집 때 허재 감독과 개인 면담을 갖고 백팔십도 태도가 변했다. “이왕 뽑힌 거 어쩔 도리 있나. 태극마크를 단 만큼 몸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판에 박힌 듯한 각오를 밝혔다. 첫 소집 때 제출할 병원 진단서를 준비하기까지 했던 선수가 하루 만에 이런 각오를 품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 것이다.
>>“동아시아대회 결과 뻔해”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벌써 농구계 전반에 팽배해 있다. 이번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 한국은 중국 홍콩 일본 대만 몽골 등과 함께 자웅을 겨룬다. 1, 2위 안에 들어야 8월 아시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8명의 부상병이 앞으로 남은 3주의 기간 동안 얼마나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고작 4명의 선수만이 정상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설 수 있다면 중국은커녕 일본과 대만전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농구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이른바 ‘국가대표 종합병동’이라고 불리는 이번 대표팀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전까지 수많은 의혹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 농구원로의 애절한 한마디가 귓가를 맴돈다. “KBL 총재를 혼내주려고 이런 팀을 조직했다는 말은 마지막까지 거짓말로 믿고 싶다. 그러나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총재는 짧은 재임 기간 동안 농구인들에게 얼마나 신임을 잃었는지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KBL과 KBA의 알력다툼으로 인해 ‘국가대표 종합병동’이 탄생했다는 음모론이 나오는 것 자체가 한국농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심각한 사건이다. 확실한 것 하나는 ‘높으신 분들’의 자존심 싸움에 한숨만 내쉬고 있는 허재 감독도, 코칭스태프도, 만신창이의 몸을 치료하지 못하고 일단 뛰어야 하는 선수들도 모두 희생자라는 사실이다.
허재원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