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정지를 받고 삭발을 감행했던 이천수의 머리는 어느새 왁스를 발라도 될 만큼 더벅머리 형태를 하고 있었다.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새까매진 얼굴이 조막 만해 보일 정도다. 지난 겨울에 비해 체중이 5kg이나 빠졌다고 한다. 숙소에서 세 끼 식사를 해결하고 오전 오후 훈련하고 다시 숙소에만 틀어 박혀 있다 보면 이런 상태가 된다며 멋쩍게 웃는다.
“그동안 제가 보통 힘들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런 과정을 통해 배운 거라면 이천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그라운드라는 사실이었어요. 그걸 깨달은 후 후배들한테 이기는 법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줬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이기고 싶은 욕심이 강하고 패하거나 고개 숙이는 일은 더 이상 겪지 않고 싶다고 했어요. 어린 나이의 후배들이 제 마음을 잘 헤아려준 것 같아요. 이전의 제가 그 나이 때는 축구 외적인 부분에 더 많은 신경을 썼었는데 여기 후배들은 오로지 축구만 알아요. 너무 착하고 성실하죠.”
20대 초반의 이천수는 자제와 인내보다는 달콤한 유혹에 많이 흔들렸고 또 실제 그런 유혹들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엔 축구만 하고 살기에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는 것. 그러나 전남에 와서 후배들을 보며 자신의 이전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는 고백을 덧붙인다.
이천수의 표정을 보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한번은 후배들을 모아 놓고, “형은 이제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다. 말 나오는 것도 지겹고 사람들한테 욕 먹는 건 더더욱 싫다. 무조건 이기고만 싶으니까 힘들면 형한테 의지하라”고 진심어린 부탁을 건넸다고 한다. 축구를 통해 속죄하려는 이천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새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아홉 살의 이천수. 언론에서는 최태욱, 이동국 등과 함께 ‘올드보이’로 부른다. “어휴 나이 서른도 안 됐는데 ‘올드보이’로 몰아가는 건 너무 하는 거 아니예요? 내가 ‘올드보이’면 군만두만 먹어야겠네”라며 낄낄 웃는 그는 18명의 선발 명단 선수들 중 김영철, 김승현을 제외하면 자신이 ‘넘버 3’라며 당황스러워한다.
“저도 제 나이가 믿어지지 않아요. 항상 20대 철부지일 줄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형들보다 후배들이 훨씬 많은 지금 상황이 싫지만은 않더라고요. 책임감이란 게 생겼으니까. 이젠 할 말, 안 할 말 가릴 줄도 알고 고개를 숙여야할 때, 화를 내야 할 때를 분간할 능력이 생겼어요.”
이천수는 지난 4월 26일 수원과의 복귀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복귀전을 치르기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고 쫓겨난 팀을 상대로 이천수가 어떤 활약을 펼칠 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 수원 입단 후 친정팀 울산을 상대로 처음 경기 펼칠 때였어요. 그때는 인터뷰 때마다 ‘무조건 울산을 잡겠다’며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었죠. 결과는 2 대 0패. 흥분한 만큼 제대로 된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준비했습니다. 수원이란 팀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단 14개팀 중 한 팀이라고 마인드 컨트롤했어요. 복귀전이 수원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기려고 달려들었을 거예요. 더욱이 제가 출장 정지를 받으며 페어플레이 기수를 들고 경기장에 나갔을 때 ‘문제아’ 이천수를 위해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전남 서포터스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고요. 이천수가 전남에 해가 아닌 득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죠.”
당시 이천수는 사타구니 부상으로 완벽한 몸 상태가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삭발을 감행한 코치들과 선수들, 그리고 사면초가에 몰렸었던 박항서 감독을 위해 투혼을 펼쳐 보였다. 박호진이 버티는 수원 골문을 향해 멋진 복귀골을 신고했던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골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그런데 그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었다.
“그 경기가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잖아요. 첫 골을 넣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거기가 원정이 아닌 홈팀이라고 생각하고 수원 벤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달려간 거예요. 그런데 순간 제 눈 앞에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차범근 감독이 보였어요. ‘아차’ 싶었죠. 제가 갈 곳은 수원 벤치가 아닌 박항서 감독님이 계시는 전남 벤치였는데 제가 잠시 착각을 했던 거예요. 자칫 잘못했으면 심판으로부터 경고를 받을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손가락을 들고 마구 달려가다가 갑자기 왼쪽으로 몸을 틀었고 뒤따라오던 선수들도 수원 벤치로 향하다 같이 몸을 틀었죠.(웃음)”
임의탈퇴의 신분으로 수원을 나오게 된 이천수. 전남에서의 ‘러브콜’이 아니었으면 계약이 남은 페예노르트로 돌아가 벤치만 달구고 있을 생각이었다는 그는 수원에 대해 회한이 많은 듯 했다.
“당시 많은 말들이 난무했잖아요. 하지만 전 단 한 마디도 안 하고 수용했습니다. 순간 순간 울컥하는 심정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주위에서 만류했었죠. 구단을 상대로, 지도자를 상대로 일개의 선수가 무슨 말을 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잘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전 무슨 일을 해도 욕 먹는 사람인데 만약 그런 일을 벌였다면 난리가 났었겠죠?”
어느 누구보다 비난도 많이 받았고 항상 ‘안티’들의 공격 대상에 떠올랐던 탓에 이천수는 이젠 조용히 축구만 하고 싶다고 말한다. 누굴 씹는 것도 씹힘을 당하는 것도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아마 그런 자신을 지켜본 팬도, 팬 아닌 사람들도 지겨웠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 4월 26일 수원 대 전남 경기에서 전남 이천수가 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수원에 있을 때부터 아팠던 사타구니 부상이 꽤 심각해요. 이번에 성남전 마치고 서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예정이라 대표팀에 합류해도 좋은 모습을 보이기 힘들어요. 저보단 (최)태욱이도 있고 (이)동국이 형도 잘 하고 있잖아요. ‘올드보이’들이 모두 골도 넣고 열심히 하니까 덩달아 저까지 좋아지는 것 같아요. 누구든 먼저 대표팀에 들어가서 열심히 하고 있으면 저도 불러주지 않겠어요? 친구 덕 좀 보고 살아야죠.(웃음)”
이천수의 예상대로 이동국과 이천수는 이번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고 최태욱이 오랜만에 A매치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이천수는 앞으로 5년 정도 후에 은퇴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 뛰고 싶어도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서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없단다. 은퇴 전에 꼭 한 번은 자기가 뛰고 싶은 팀에서 멋진 모습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밝혔는데 그곳이 어디가 될 지는 알 수 없다는 말로 여운을 남겼다.
이천수에게 ‘박지성과 이천수’ ‘고종수와 이천수’란 연결고리로 질문을 던지자, “지성 형과는 연결시키지 마세요. 잘못했다간 안티 팬만 2만 명 더 늘어요”라며 대답을 사양했고 고종수에 대해선 자신의 감정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축구만 놓고 봤을 땐 종수 형을 능가할 만한 선수가 없어요. 천부적인 실력을 갖고 있었거든요. 종수 형이 일찍 은퇴하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종수 형도 은퇴 후 저한테 전화를 걸어선 ‘나처럼 되지 마라’라고 당부하셨듯이 자기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깨달았던 거죠. 달라져야죠. 축구장에서 직접 보여드릴 거예요. ‘뻘 짓’ 많이 했던 이천수를 그래도 따뜻하게 감싸안아준 분들께 보답하는 길은 그거밖에 없어요.”
광양=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