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시리즈 7차전 잠실 구장에 모인 기아 팬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12년이란 오랜 기다림 끝에 정상 고지를 탈환한 호랑이, 그 우승 비결에 대한 팬들의 생각은 어떨까. <일요신문>은 한국시리즈 4차전부터 7차전까지 야구장을 찾아 팬들의 생생한 소감을 들었다.
KIA 타이거즈가 ‘V10’을 달성한 데 있어, 일등공신은 누구일까? 조범현 감독부터 선수들, 팬들 등 누구 하나 열심히 하지 않은 이는 없지만 굳이 그중에서 한 명만 뽑으라고 한다면 과연 누가 지목을 받을까. 수많은 KIA 팬들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일등공신으로 이종범을 뽑았다. “정규시즌의 이종범이 그냥 ‘커피’라면 한국시리즈의 이종범은 T.O.P”라고 커피 광고를 따 이종범의 특별함을 외치는 팬도 있었다.
WBC대회를 보고 야구에 푹 빠지게 된 후 KIA가 한국시리즈에 오르자 과감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경기장을 찾고 있다는 하슬기 씨(여·서울)는 “정신적 지주로 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이종범 선수를 꼽지 않을 수 없다”며 “시즌 내내 타격감도 좋았고 늘 잘하는 모습, 실망시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광주 토박이면서도 원정경기 때마다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서명석 씨(남·광주) 역시 이종범에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타이거즈의 심장이자 바람의 신”이라고 이종범을 표현한 서 씨는 “타율은 비록 3할에도 못 미치지만 호수비와 후배 선수들을 다독이고 끌어올리는 리더십 등 물심양면으로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열을 올렸다. 서 씨는 KIA와 SK의 한국시리즈 1차전 당일 군 제대를 해 곧바로 서울로 직행했다고. 군 입대 당시에도 한국시리즈를 보기 위해 12월에 입대했다는 서 씨는 “이종범이 은퇴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올해 한을 제대로 풀었다”고 이종범의 열혈팬임을 자처했다.
선성주 씨(남·서울)와 김현진 씨(여·서울) 등 대다수의 팬들도 이종범이 일등공신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그중 김현진 씨는 이종범 팬카페 회원으로 얼마 전에는 이종범한테 피자를 선물했다고 한다. 우연한 인터뷰였지만 20일 경기 전 더그아웃에서 만난 이종범은 “얼마 전 팬이 피자 15판을 보내줘서 동료 선수들과 함께 먹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정도로 큰 힘을 받았던 선물이었다.
김상현이나 윤석민을 꼽는 팬들도 많았다. 이진철 씨(남·수원)는 “우승의 일등공신은 당연히 윤석민”이라며 “어려운 위기 때마다 나와서 잘 넘겨주는 마당쇠다”라고 말했다. 타선의 해결사로 김상현을 뽑은 많은 팬들은 “올해 김상현이 없었다면 우승까지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며 “그의 방망이에서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공을 볼 때마다 감동의 연속이다”라고 지지했다. 물론 경기 마지막 날인 24일에는 나지완의 응원가를 외치며 우승 주역으로 나지완을 외치는 팬들이 많았다.
SK 시절에도 맛보지 못했던 우승의 짜릿함을 KIA에서 2년 만에 이뤄낸 사령탑 조범현 감독에 대한 팬들의 평 역시 칭찬 일색이다. 장보영 씨(21·서울)는 “선수 한 명 한 명의 기량을 잘 살리는 감독”이라며 “특히 선후배 관계에 있어 서열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아 더욱 돈독한 팀워크를 이뤘고, 선수 배합에 있어 강약을 잘 조절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김진호 씨(30·전주)도 “위기 상황에도 투수를 끝까지 믿어주는 배짱이 타이거즈와 잘 맞는다”며 “정말 큰 경기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다 선수기용에도 무리수를 두지 않아 감독의 정확한 눈이 우승에 큰 힘이 됐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결승 홈런을 치고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나지완 선수. | ||
조 감독이 우승을 이끈 주역임에는 확실하지만 불만사항도 있었다. 장승진 씨(23·서울)는 “KIA 타이거즈만의 색깔인 화끈한 플레이 대신 너무 전략적으로만 경기를 치르는 모습이 많이 보여서 아쉽다”며 “프로팀들이 SK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KIA만큼은 예전의 스타일로 재밌고 흥미진진한 게임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나타냈다.
한국시리즈에서 먼저 2승을 챙긴 후 잇따라 2패를 당하며 그 어느 때보다 팬들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기를 했던 KIA. 그런 까닭에 아쉬운 선수도 많았다. KIA 팬들은 올해 가장 아쉬웠던 선수로 한기주, 서재응, 이현곤, 이용규를 뽑았다.
김주원 씨(남·인천)를 비롯해 많은 팬들이 “수비수로서는 최고지만 안타라도 하나 쳐 달라”며 염원했던 이현곤과 “한국시리즈에서 별다른 활약이 없다”는 평을 들은 이용규. 이현곤은 마지막 3경기에서 안타와 호수비를 펼치며 선전했지만 이용규는 5차전에서 선취점을 뽑아낸 기막힌 번트 외에는 중요한 순간에 제 몫을 해주지 못해 팬들의 아쉬움이 더욱 컸다. 또한 KIA 대표 투수로 손꼽히는 서재응과 마무리투수 한기주는 “내년에는 꼭 제자리를 찾길 바란다”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빠른 스피드와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면서도 늘 아슬아슬한 게임을 펼쳐 ‘한작가’라는 다소 치욕스러운 별명이 붙은 한기주. 그에 대해 팬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는데 김정민 씨(34·서울)는 “올해 변화구를 추가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매번 좌절인데 내년엔 정말 다시 되살아나서 윤석민, 로페즈처럼 잘해달라”는 당부를 건넸다.
한편 노선오 씨는 “올 한 해 이렇다 할 활약을 해주지 못한 서재응이 안타깝다”며 “하지만 최희섭이 KIA 입단 3년째인 올해 펄펄 날았듯 서재응도 3년차가 되는 내년에는 잘할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내년 시즌 10승만 해달라는 응원도 잊지 않았다.
‘올해도 SK의 우승인가’ 싶었던 위기, ‘설마 기아가 우승할 수 있을까’했던 우려를 뛰어넘고 정규시즌 1위에 이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손에 거머쥔 KIA 타이거즈의 우승비결에는 팬들도 포함된다. KIA 선수들이 “잠실구장도 홈구장만큼이나 편하다”고 말했을 만큼 팬 수도 압도적이었지만 그 열정도 대단하다.
기아 서포터즈 중 하나인 ‘타이거즈 클럽’ 회원들은 새벽 5시부터 야구장 앞에 줄 서 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는데 회원들 중 30~40명이 포스트시즌에 맞춰 휴가를 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시리즈 일정에 맞춰 휴가를 나온 군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오경태 씨(23·서울)는 20일 기자와 만나 “기아가 연승하면 적어도 22일에 경기가 끝날 줄 알고 휴가를 냈는데 2연패 하는 바람에 결국 우승하는 걸 직접 보진 못하겠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구장을 가득 메운 노란 막대풍선과 팬들의 함성은 오직 한 마음에서 시작됐고, KIA가 우승으로 가는 길을 도와준 크나큰 전력이었다. KIA를 응원하러 온 몇몇 타 야구팀 팬들은 이에 대해 “올해 KIA 선수들이 워낙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서 부러웠지만 전국 어디 구장을 가나 응원석을 가득 메운 KIA 팬들이 더 부러웠다”며 “응원소리만 들어도 KIA가 이길 것 같았다”고 감탄했다.
선수와 감독, 그리고 팬이 똘똘 뭉쳐 이뤄낸 12년 만의 우승. 누구도 그 우승에 ‘행운’이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않는다. 오직 땀과 열정,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팬들의 염원이 이뤄낸 왕좌 탈환이었다.
문다영 객원기자 dymoon@ilyo.co.kr
정유진 인턴기자 kkyy1225@gmail.com
승리의 호랑이들 감동인터뷰 이종범
▲ 이종범 | ||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하염없이 울었다. “12년 동안 기다려 주신 팬들, 정말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긴 기다림 끝에 이런 승리의 맛을 보게 해드린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내년에도 기아의 우승을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세요.”
끝내기 홈런으로 MVP에 선정된 나지완은 “그동안 성적이 안 좋아 마음이 불편했는데 오늘은 배트에 맞을 때 느낌이 좋았습니다”며 “팀에 기여하게 돼서 정말 좋아요”라고 함박웃음으로 우승 소감을 밝혔다.
4차전 때 깜짝 등판해 150km 가까운 강속구로 SK를 기죽였던 양현종은 “선배들이 잘해주셔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며 “무엇보다 팬들의 응원에 정말 힘이 났는데 좋은 모습 보여드릴테니 내년에도 계속 뜨거운 응원 부탁드립니다!”고 일찌감치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한편 이용규는 “오늘 응원 오신 기아 팬들께 너무 죄송해요”라며 “너무 많이 울었고 아직도 우승이 실감이 안 나네요”라고 중요한 순간에 큰 활약을 못한 자신을 탓했다. 또한 안타제조기로 한국시리즈에서 제몫을 한 이현곤은 “정말 치고 싶었던 순간에 날 거르는 바람에 너무 아쉬웠어요”라며 “그래도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정유진 인턴기자 kkyy1225@gmail.com
인턴기자가 본 더그아웃 스케치
취재보다 사인 생각이 간절~
늘 관중석에서 바라만 보던 더그아웃이라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관중이 시끄럽다며 양 손으로 귀를 막던 어린 아이가 열혈 야구팬으로 자라나, 이제 인턴 기자로서 밟는 더그아웃은 그래서 더욱 색달랐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KIA 타이거즈 더그아웃에 발을 디디자 관중석에서 보던 것과는 선연히 다른 초록색 그라운드가 눈에 한가득 들어온다. 평소에 사인 한번 받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선수들이 불과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배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걱정도 됐지만, 평소 존경하던 감독과 몇 마디 나눠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커 단독인터뷰를 따낼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한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해 주는 조범현 감독은 무뚝뚝하고 무서워보이던 인상과 달리 너무나 따뜻했다. 조 감독은 “열정적으로 응원해주는 팬들에게는 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선수들의 컨디션은 좋은데 약간 긴장한 것 같다”는 등 솔직담백하게 근황을 밝혔다.
연습을 마치고 선수들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돼 있던 나와는 달리 선수들은 여유가 넘쳤다. “컨디션 어떠세요? 선수들 분위기는 좋은가요?”라는 질문에도 웃으며 답해줬다.
기자는 4일간의 야구장행 덕분에 더그아웃이 친숙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선수들을 보면 사인을 받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정유진 인턴기자 kkyy12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