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17일 프리미어리그 빅4 맨유와의 원정경기에 출전한 이청용. 로이터/뉴시스 | ||
이청용의 볼턴 이적은 뜻밖이었다. 지난 7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의 볼턴이 이청용을 영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볼턴 측에서는 구단 스카우터를 직접 서울로 파견해 이청용을 면밀히 관찰했다. 무심코 던지는 추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적지 않은 이적료 220만 파운드(약 44억 원)까지 제시했다. 볼턴 구단의 뜨거운 구애에 반한 이청용과 FC서울은 이적에 대한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했다.
계약이 성사된 것에 비해 이청용의 팀 합류는 예상보다 늦었다. 비자 문제 등이 겹치면서 개막전이 코 앞에 다다라서야 영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지난 8월 13일(개막전을 앞둔 이틀 전),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날 이청용은 비행기에서 내려 차로 갈아탔다. 런던에서 볼턴까지는 무려 300km가 넘는다. 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4시간 이상은 족히 걸리는 거리. 이청용 일행은 밤 12시가 다 돼서야 구단에서 마련해 준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던 순간, 이청용은 뜻밖의 환대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볼턴의 게리 맥슨 감독이 호텔에서 이청용 일행을 기다렸던 것. 맥슨 감독은 이청용에게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환영한다”는 인사를 전했다. 짧은 첫 만남이었지만 이청용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맥슨 감독의 파격적인 대우는 이어졌다. 영국에 도착한 지 이틀이 채 지나지도 않은 시간, 이청용은 15일 개막전에 명단 포함은 물론 첫 데뷔전을 치렀다. 예상을 뒤엎은 그의 데뷔였다. 짧은 시간으로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없었지만 팀에서의 충분히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시차도 제대로 맞지 않았던 이청용은 경기 후 “프리미어리그 데뷔가 마치 꿈 같았다”고 말했다.
맥슨 감독은 이청용의 가능성을 확신했던 것일까. 적응에 시간을 보내던 이청용은 9월 23일홈 리복경기장에서 펼쳐진 칼링컵 3라운드 웨스트햄전에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3-1 승리를 거뒀고 이청용은 첫 공격포인트까지 만들어냈다. 그리고 불과 3일 후 버밍엄시티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이청용은 후반 천금 같은 결승골을 터뜨리며 2-1로 팀 승리의 주역이 됐다. 설마 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볼턴팬들도 이청용의 활약에 깜짝 놀랐다. 동료들조차도 이청용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그의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이어진 토트넘전에서 그는 또다시 공격 포인트를 만들어 냈고 홈에서 강호 토트넘과 무승부를 거뒀다. 의기소침하던 맥슨 감독의 기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10월 25일 에버턴과의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끝난 후 맥슨 감독의 입이 귀에 걸렸다. 에버턴을 상대로 3-2의 승리를 거둔 탓에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었지만 그는 힘든 기색 없이 시종일관 밝은 모습이었다. 두 달이 다 되어 가도록 홈에서 프리미어리그 승을 거두지 못하던 맥슨 감독의 숨통이 확 트인 날이었다.
이 날도 에버턴으로 기울던 전세가 전반 16분 이청용의 선제골로 주도권은 볼턴 쪽으로 넘어왔고 3-2 승리와 함께 볼턴은 중위권으로 도약했다. 경질설까지 나돌던 맥슨 감독의 얼굴이 밝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의 시즌 초반은 불안했다. 2009-2010시즌 선덜랜드와의 홈개막전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경기장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단 한 차례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부진한 경기력에 팬들도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청용이 맹활약했던 웨스트햄전을 시작으로 팀은 새롭게 태어났다. 한 달 만에 2골 2도움이라는 폭풍 같은 활약을 펼치는 이청용과 팀의 상승세가 함께했다. 에버턴에서 후반 44분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빠져 나오던 이청용에게 맥슨 감독은 뜨거운 악수를 청했고 둘은 환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이청용은 빠른 적응에 “가장 중요한 감독님이 나를 잘 믿어주고 경기에 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며 맥슨 감독의 배려가 최고의 선물이라고 밝혔다.
‘이청용은 박지성을 이을 차세대 주자’-ESPN, ‘대단한 영입이다’-스카이스포츠, ‘(에버턴전) 이청용의 골이 경기 흐름을 바꿨다’- 맨체스터 BBC라디오
이청용의 활약에 영국 언론들도 호들갑이다. 에버턴전이 끝난 후 이청용에 대한 칭찬이 줄을 이었다. 성공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안정적인 착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청용도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는 “프리미어리그라고 다른 것은 아니다. 와서 직접 부딪쳐 보니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고 말했다.
감독과 팀 동료들의 신뢰 속에서 이청용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도 확실히 달라졌다. 최근 이청용의 활약으로 인해 볼턴의 패턴이 바뀌었다는 평가도 팬들 사이에서 먼저 일었다. 볼턴하면 롱패스로 이어지는 진부한 공격의 단조로움이 대명사였지만 이청용의 합류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팬들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청용은 자신의 활약이 ‘성공’이란 단어와 연결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팬들에게 보여줄 것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 그는 볼턴을 중위권 팀으로 올려놓는 것과 자신이 제대로 프리미어리그에 정착하는 것이 이번 시즌의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한다. 이청용은 볼턴 팬들에게도 실망스럽지 않은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팬들은 이청용이 볼턴의 새로운 영웅이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다.
런던=조한복 EPL전문리포터 chb040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