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고건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장에 뿌려진 회견문.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애초부터 고 전 총리를 염두해 두지 않았던 당 사수파는 “큰 영향은 없다”는 입장이다. 한 사수파 의원은 “여권 전체로 보면 훌륭한 인물 하나가 낙마해 안타깝지만 어차피 여권의 정계개편이 고 전 총리를 옹립하기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제3 지대 통합신당을 추진하던 통합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고 전 총리를 통합의 큰 축으로 생각했던 이들에게 갑자기 그 축이 무너진 셈이다. 고 전 총리에 기대 밑그림을 그리던 이들은 당장 난파선이 됐고 처음부터 그림을 다시 그리지 않으면 안될 처지다.
게다가 지난 19일 서울 남부지법이 열린우리당 기간당원 11명이 당을 상대로 제출한 당헌개정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인용했다. 한마디로 당헌 개정은 무효라는 이야기로 이 당헌을 토대로 추진하던 다음 달 전당대회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하필이면 같은 날 법원 판결 직전 비대위가 통합신당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전당대회 준비위의 결정을 추인해 의기양양하던 지도부는 창피까지 당한 셈이었다.
가처분신청 인용 판결에 따라 ‘전당대회 무용론’이 확산되면서 열린우리당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처지다. 개헌 문제에 이어 고 전 총리의 낙마, 기간당원제 부활로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 논의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다. 명색이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이렇다 할 대선 주자도 없이 적전 분열만 일삼고 있는 형편이다.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 논의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추적해 보았다.
먼저 고 전 총리의 낙마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친고건파 의원들이다. 김성곤 의원과 안영근 의원은 고 전 총리의 낙마에 대해 아쉬워하면서도 말은 아꼈다. 김 의원 측은 “고 전 총리가 기자회견 2시간 전 대선 불출마를 통보해왔다. ‘대선 승리와 정계개편을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라는 입장만 밝히라고 수위조절을 부탁했는데 본인이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더라”라고 전했다. 고 전 총리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날 안영근 의원은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고 전 총리를 매개로 열린우리당, 민주당을 아우르는 대통합을 꿈꿨던 이들로서는 청천의 벽력으로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고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 바로 다음날 고 전 총리를 지지모임인 ‘중도국민대통합 전국청장년연대’(중청련)는 예정대로 토론회를 열어 향후 정계개편에 대해 논의했다. 당초 토론회는 고 전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준비됐지만 ‘고 빠진 토론회’는 맥 빠진 토론회였다.
토론회는 자연히 고 전 총리가 빠진 정계개편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 민주당의 이낙연 의원은 “고 전 총리가 없어진 상태에서 (통합신당이) ‘고건 신당’으로 오해받을 일이 없어졌다”며 열린우리당 일부 탈당파와 국민중심당, 민주당이 참여하는 ‘신당추진위’ 구성을 제안했다. 이 의원의 제안은 시간이 없으니 일부라도 빨리 밖으로 나와 제3 지대에서 집을 짓자는 것이다. 이날 토론회의 분위기는 인물이 없어졌더라도 구조개혁을 통해 정계개편을 하자는 것이었다. 새 인물이 들어와 경쟁력 있는 대선주자로 성장할 수 있게끔 구조를 먼저 짓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성곤 의원 측은 “고 전 총리가 있어도 잘 안 된 일이 고 전 총리도 없는 지금 잘 되겠나”라며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다”라고 전했다.
열린우리당 일부 통합파에게 고 전 총리의 중도하차는 정국을 카오스 상태로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고 전 총리의 중도하차가 단기적으로는 충격을 줄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 중도파 의원 측은 “길게 보면 고건 변수가 사라지면서 정운찬, 박원순, 문국현 등 제3 후보들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민주당+고건+α’로 반한나라당 연합전선을 구축하려했던 열린우리당 통합파로서는 ‘고건 변수’가 빠지면서 현재 참여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운찬 서울대 전 총장, 박원순 변호사 등 ‘α’마저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통합신당은 결국 ‘도로 민주당’이 되고 만다는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외견상 전당대회 준비위가 전당대회 추진에 합의, 통합신당을 향한 움직임이 속도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인 갈등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있다. 법원의 당헌 개정 가처분 인용은 당장에 전당대회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금 전대 준비위에서 마련한 안은 기초당원제를 토대로 대의원을 선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준비한 것이다. 그것이 무효라고 판결이 나온 이상 열린우리당은 구당원인 기간당원으로 다시 전대를 치러야한다. 현실적으로 중앙위원회를 다시 소집해 중앙위원 3분의 2 찬성을 얻어내 당헌 개정을 추진, 전대를 다시 준비하면 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당 사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중앙위원이 최소한 3분의 1 이상이라는 평가가 많다. 기간당원으로 전대를 치르면 사수파가 이길 수밖에 없다. 판결 후 김근태 의장은 “충격이다”고 말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대부분 통합신당파 의원들은 “창피해 고개를 못 들겠다”는 반응이다.
또한 고 전 총리 중도하차 이후 주춤하던 탈당론이 다시 재점화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 방문을 마치고 22일 귀국한 염동연 의원의 움직임도 관심사다. 그는 개헌, 고 전 총리 중도하차라는 변수가 생겼음에도 “탈당하겠다는 기존 입장에 변함없다”고 밝혀왔다. 더구나 당헌개정 무효 판결까지 나온 마당에 염 의원이 좌고우면할 이유는 없어진 셈이다. 특히 유력 대선주자인 정동영 전 의장과 천정배 의원도 ‘탈당 불사’를 시사해 여권 핵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정 전 의장은 지난 21일 “순수 개혁 모험주의자들에 의해 좌초된다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결단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천 의원도 전대 이전 탈당을 시사하며 곧 결행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당 사수파는 이번 판결 이후 힘이 실렸다. 하지만 전대 참여 방침을 밝힌 사수파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탈당 러시가 일어날 경우 오히려 전대를 치르는 것만도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화영 의원은 “당 지도부의 일 처리가 미숙했다. 사태를 빨리 수습해 전대를 차질없이 치러야 한다”며 “이 일을 계기로 탈당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말해 강경파의 탈당을 경계했다.
분열 직전의 상황까지 밀려온 당의 상황이 암초에 걸렸지만 정계개편 또는 통합신당의 윤곽은 늦어도 4월 초까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수도권의 한 중진의원 측은 “4월 재보선 선거가 통합신당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이때까지 통합신당을 완성하든지, 최소한 범여권이 연합하는 형태라도 갖춰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이 현재의 암초를 이겨내고 대통합의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지가 정가의 큰 관심사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