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영 전 의장 | ||
긴 침묵을 깨고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이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지난해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지 7개월 만이다. 21일 ‘정통’(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모임이 터닝포인트였다.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한 이날 모임에서 그는 “정동영의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의원들의 탈당과 추가 탈당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기간당원들의 당헌개정 무효소송, 전당대회 무용론 등 당내 사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해왔다. 지난해 말 김근태 의장과 합의한 ‘분열 없는 신당’이라는 원론적인 수준의 입장 발표 외에 다른 언급은 없었다. 그런 그가 내놓은 ‘정동영의 정치’란 무엇일까.
정 전 의장은 정통 모임 나흘 뒤인 25일 고향인 전북을 방문, 적극적인 행보와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고 전 총리가 중도하차한 후 무주공산이 된 호남에서 재기의 발판을 다지는 모습이다. 정 전 의장의 한 측근은 “방어적인 입장에서 공세적인 입장으로 전환됐다고 봐 달라”고 주문했다. 당내 최대 계파를 거느린 수장으로 정 전 의장의 행보에 따라 통합신당은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또한 여당의 유력한 대선주자로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분명한 선긋기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는 정 전 의장이 대통령과의 대립각 속에 어떤 행보를 취할지가 여권의 비상한 관심이다.
지난 25일 전북 익산과 전주를 방문한 정 전 의장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정계개편과 개헌 등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먼저 그는 “분열과 갈등을 넘어 대통합으로 가야한다”며 통합신당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음을 밝히고 “열린우리당은 소수 개혁파 정치인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만든 당이다. 당시 대통령은 제동을 걸었다. 노 대통령이 당을 만든 것은 아니다. 과거 3김 시대처럼 사당이 아니다”라고 말해 통합 논의에서 대통령은 빠져주길 주문했다. 연두 기자회견에서 조건부 탈당 가능성을 시사한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도 정 전 의장은 “대통령의 당적문제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라고만 말했다. 노 대통령이 제기한 개헌문제에 대해서도 “개헌은 옳은 일이지만 주도권은 국회와 국민이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개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대해서는 “제안자인 노 대통령이 싫어서 그런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는 ‘대통령이 개헌을 발의하되 그 중심에 서면 안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면서 하이닉스 이천 공장 증설 불허 등 정부정책에 대해 “내가 산자부 장관이라면 그런 결정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적하는 등 정부의 대책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과의 결별 선언이다.
정 전의장은 또 당 사수파에 대해서도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그는 “당내 일부 소수 기득권 집착 세력에게는 미래가 없다”며 “정당의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 가 당에 엄청난 상처를 준 소수 고립주의자들에 의해 대통합이 좌초된다면 결단할 수밖에 없다. 중앙위원회에서 다시 기초당원제로의 개정이 이루어져야한다. 사수파들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야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정치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해 당 사수파에 직격탄을 날렸다. 사수파에 대해 당이 망가진 것에 대한 책임론도 거론했다.
하지만 정 전 의장은 기자들의 ‘탈당하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구체적인 탈당 일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29일 열리는 중앙위원회가 정 전 의장의 ‘탈당 D-day’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그는 부인했다. 하지만 정 전 의장은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탈당 카드’를 띄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 지난 25일 전주를 방문한 정동영 전 의장은 공장에서, 간담회에서, 방송사에서 바쁜 대권행보를 이어갔다(왼쪽부터).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러나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 정계의 일반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창당의 주역’으로 평가받지만 범여권 전체로는 ‘분당의 주역’인 그가 또 다시 새로운 당 만들기에 먼저 나서기에는 부담스럽다. 고 전 총리보다 못한 지지율을 가진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정계개편에 의원들이 선뜻 그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친정동영계로 불리는 의원들도 3김 시대처럼 끈끈하게 엮인 계보도 아니다. 특히 현역 의원 50~ 60명을 거느린 최대 계파를 자랑하지만 이들 중 20여 명은 비례대표로 쉽게 탈당을 결행할 수도 없고 각 의원들마다 정계개편에 대한 입장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정 전 의장이 탈당한다하더라도 현 상황에서는 파괴력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권에서 부상하고 있는 ‘제3후보론’도 그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정 전 의장은 “문호를 활짝 열어놓고 덧셈의 정치를 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중심으로 누구나 하나가 될 수 있다”면서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던 호남 개혁 유권자들이 초인을 기다리는 심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초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국민의 개혁적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모두가 겸손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권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손학규 대안론’에 대해서도 “야당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분을 거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여권의 ‘제3 후보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정 전 의장은 안방이랄 수 있는 호남에서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고건이라는 큰 축이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전북을 발판으로 호남의 민심을 잡고 여권 대안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전략이다. 정 전 의장 캠프도 전에 비해 무척 고무된 분위기다. 고 전 총리 낙마 후 자신감도 더 붙었다. 일부 여론 조사에서는 그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이런 추세로 10%대에 올려 놓겠다는 것이 목표다. 정 전 의장의 측근은 “안방(호남)에서 (지지율을) 확실히 다져놓으면 해볼 만하다”고 전했다. 올 들어 세 번째 방문인 이번 전북 방문은 손학규 전 지사의 ‘민심대장정’을 연상시킨다. 그는 중소기업단지를 방문, 현직 교사들과 교육간담회를 가지는 등 민심 파고들기에 나섰다. 또 익산 조류 독감 피해지역 양계 농가를 방문해 농민들과 토론 시간을 가지며 농가에서 일박했다.
같은 날 전북을 방문한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해서도 정 전 의장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전 시장이 전주에서 열린 한 특강에서 “경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고 한데 대해 정 전 의장은 “한국경제는 국민의 땀과 헌신에 의한 것”이라며 “경제 지도자와 경제 전문가는 다르다. 재벌 총수에 헌신해 온 사람이 무슨 경제지도자냐”며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부동의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전 시장에게 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더구나 이 전시장이 자신의 텃밭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에 대한 강한 견제이기도 하다. 대통령과의 차별화와 이 전 시장 때리기로 정 전 의장은 독자적인 대선 레이스의 출발점에 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정 전 의장에게 유리하지만은 않다. 그가 이미 탈당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노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조건부 탈당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탈당 행렬이 주춤한 상태다. 또한 당 사수파가 대통령의 설득으로 기초당원제를 수용해 정계개편 논의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다. 친정동영계가 당내 최대 계파이긴 하지만 정계개편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정 전 의장은 이미 당 사수파에 등을 돌린 상황으로 이미 원군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또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한 ‘2선 후퇴론’은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 여권에서 고 전 총리도 빠진 마당에 대통합을 위해 정 전 의장과 김근태 의장에게 ‘제3 후보’를 위해 용퇴하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제3 후보’가 정 전 의장과 김 의장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호남에서는 천정배 의원과 맹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할 처지다. 호남에서 일정 지분을 가지고 있는 민주당도 ‘분당의 주역’인 정 전 의장에게 힘을 실어 줄지도 미지수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정계개편과 험난한 대선 레이스에서 정치생명을 걸고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